현산문화19호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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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591회 작성일 2008-03-31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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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각(旌門閣) : 旌-표할 정, 門-문 문, 閣-다락집 각

                     효녀로 칭송이 자자하던 이웃마을 규수가 말곡리 경주김씨 김행장 가문에 시집을 왔다. 시집온지 몇 년 만에 남편이 병고로 사경을 헤매자 단지 주혈(斷指注血)하여 남편의 수명을 몇 시간이나마 연명하게 하였고 남편이 사망하자 청상 수절(靑孀守節)하면서 시부모를 성심 성의로 봉양하였음으로 그의 효행과 정절을 추모하고 숭상하기 위하여 1906년대 초에 말곡리 전 472번지 지점에 건립한 열녀 효녀각이라 한다. 김행장 가는 말곡리 답204번지 산 밑에 기거 하든 중 병자년 대홍수(1936년 7월 11일경)때 김행장이 사망하여 9일장 상례로 일가 친척이 상가(喪家)에서 통야(通夜)하던 중 갑작스러운 산사태(沙汰)를 당하여 가옥이 완전 매몰되고 절손에 가까운 참사를 입게 되어 이후 정문각의 관리 부실과 보수 수리가 전무한 상태에서 6.25전쟁 직후까지 도괴직전의 기둥 몇 개가 서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어디에도 효행이나 열녀의 기록이나 표시가 없고 소문만 전할 뿐이다. 마을에선 정문간 이라고 통칭 하였는데 이는 곧(貞)고 바른(正) 행실의 귀감이 되는 사연들과 열녀의 정도를 기리기 위한 추앙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사성황송(國師城隍松) : 國-나라 국, 師-스승 사, 城-성 성, 隍-성아래못 황, 松-솔 송

121-1.jpg                      말곡리에서 풍암리로 이어지는 고개마루 못미처 말곡리 산71번지 길가의 천년(수령 600년추산) 고송으로 높이 25m 둘레 4m의 위풍이 장엄한 소나무다. 고송답지 않게 항상 푸르른 가지를 드리우고 햇빛을 차단해 주고 있어 무더운 여름철 고개를 넘나드는 길손들의 쉼터로 애용되었다. 지나가는 길손마다 주먹만한 돌을 주어다 성황송 앞에 높고 침을 뱉으면서 소원을 빌어야 운수가 대통한다는 전설이 있어 나무 밑에는 돌무덤 속에서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나기도 하여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서늘케 하기도 했다. 이 돌무덤의 돌들은 왜구(倭寇)등 외부의 침략이 있을 때 이를 물리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기 위하여 돌무덤을 만들어 놓았다고 하니 선조들의 지혜와 애국심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국사란 칭호가 언제 누가 붙였는지 알수 없으나 가장 오래된 성황목이란 뜻일것이다. 국사성황송은 멀리서 바라보면 떡시루를 뒤집어 놓은 듯 2~30m나 됨직한 나뭇가지가 지상에 닿을 듯 하여 등 하교길 학동들이 나뭇가지를 타고 성황목에 오르는 놀이를 하기도 했다. 매년 가구별로 비용을 갹출하여 년초에 날을 정하여 성황제를 지냈으나 1945년 8월 15일 해방후부터 없어지고 말았으나 가구단위의 소원 성취나 부귀안녕을 염원하는 제사나 우환이나 재앙이 있을 때 푸닥거리를 하는 등 매우 신성시 하던 성황목이었다. 1970년대 화목(火木)의 량이 부족하던 옹기 공장 운영자가 성황목 가지수개를 절단하여 옹기 굽는 화목으로 사용했는데 그는 그 후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하고 말았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는데도 주위사람들은 성황목의 업보를 받았다는 허망한 소문을 퍼뜨려서인지 더 이상 성황목에 자극이나 위해를 주는 일은 없었다. 1982년 11월 13일부터 보호수로 지정(道木)관리해 왔으나 2002년 12월 1일 밤 쏟아지는 폭설의 무개를 이기지 못하고 커다란 굉음을 내며 허리가 부러져 수명을 다하고 음흉한 그루터기만 남아 있어 더더욱 애틋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