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문화19호

향토사료 - 第17回 江原道 鄕土文化 發表資料 / 襄陽3.1萬歲運動과 救國女學徒 趙和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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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014회 작성일 08-03-31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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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풍 (江原襄陽)


Ⅰ. 背 景

양양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표현할 수 있겠으나 그중에 단 한마디로 정신적 지주감이 될 것으로 충분한 것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항일의 고장이라 하고 싶다.
그 까닭은 여러 기록상으로 1919. 3. 1 기미만세운동이 요원이 불길처럼 전국방방곡곡 확산될 때 우리 강원도에서는 가장 조직적이며 계획적이며 대규모로 그해 4월 3일 밤부터 4월 9일까지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여러 인물이 있었으나 유독 여성인 당시 호수돈 여학도 조화벽이 있었다는 사실도 크게 주목할만한 사실 일게다.
그럼 내용을 전개하기에 앞서 먼저 양양의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개관을 다음과 같이 요약 기술해 보려한다.

1. 自然的

양양(襄陽)은 동북아 극동 한반도 동해안 중북부 태백 준령 영동의 중심부에 위치한 해안, 산간지대로 동으로는 동해에, 서로는 인제군, 홍천군, 남으로는 강릉시 북으로는 속초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에 경, 위도를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1)

  주석 1) 양양군「양양연감」강원도민일보 출판국, 1999, p10

101-1.jpg

면적은 강원도 대비 3.7%인 628.71㎢이며 임야 535.20㎢(85%) 농경지 58.6㎢(9%) 기타 34.8㎢(9%)로 경지율이 극히 낮고 취락 형성은 주로 산줄기의 공을 타고 이어지고 있으며 높고 낮은 산에 둘러싸인 천혜의 관광자원의 보고인 산, 바다, 계곡을 고루 갖추고 년간 400여만 명의 국내외 관광, 피서객의 왕래가 있으며 1읍 5면에 행정리 124, 법정리 120, 반 432 그리고 296의 행정구역 편성아래 인구 30,000여명을 포용하고 있는 전국적으로 볼 때 매우 열세한 군이라 할 수 있는 악조건의 환경이고, 지형지세는 40여㎞의 해안선 태백준령에 솟은 대청봉(1,708)아래 오색령, 구룡령의 관통으로 동서의 교통이 원활하며 또 양양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남대천은 오대산, 구룡령, 오색령 설악산에서 그 물줄기가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되는 장장 60㎞로서 실로 영동제일의 하천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남대천에 연어가 회귀하며 은어 등 많은 물고기가 서식할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하기도 한다. 기후는 연평균 12℃ 강수량 1,300mm이고 이곳 특유의 계절풍으로 일명 ‘양간지풍(襄杆之風)’이란 말도 나오는 바람도 많은 고장이기도 하다.

2. 歷史的

지명의 시작은 상고시대부터 있었으나 고려 고종 8년(1212) 양주로 하다가 조선조 태종 16년(1416)에 비로소 양양(襄陽)으로 되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중국호북성(中國湖北省) 한수연안(寒水沿岸)에 위치한 그곳 양양과 아름다운 자연과 지리적 환경이 흡사하다하여 부르게 되었다는 한서지리지 완벽국사 대사전 기구회첩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겠다.
이제, 서울대 박물관 팀에 의해 1981년 손양면(巽陽面) 오산리(鰲山里), 쌍호변(●湖●) 선사유적의 발굴로 세계적으로 고고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유구한 선사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주로 지명의 변천과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 기술하겠다.

● 선사시대
1) 구석기유적(20만-50만년전), 신석기 유적(BC 6000-7000)초기 철기시대의 주거지(BC 2000-2500)가 손양면 쌍호(●湖)변을 중심으로 도화리, 오산리, 가평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2) 고인돌 유적지(BC500-600)가 서면 범부리에서 발굴됨으로써 실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겠고
3) 상고시대에는 동예, 한무리에 이르러서는 낙랑군 탄렬현(樂浪郡 呑列縣)으로 소제(昭帝)때에는 동부도위로 그리고 고구려에 이르러는 익현현(翼峴縣)또는 이문현(伊文縣)으로 불러 왔었다.

● 신라시대
신라통일이후 문무왕 8년(668) 익령현(翼嶺縣)으로 그후 수성군영현(守城郡嶺縣)이 되었다.

● 고려시대
성종 14년(995) 10도를 정할 때 삭방도(朔方道)에 속했으며 거란병의 침공을 방어한 공으로 고종8년(1221) 양주방어사로 승격되었다가 고종 44년(1257) 몽고병에게 강참한 사건으로 덕령감무(德寧監務)로 강등되기도 했다.
● 조선시대
태조4년(1395) 강릉교주도가 강원도로 개칭되는 가운데 그 후 태종 16(1416)에 이르러 비로소 양양도호부(일명 峴山)으로 되었고, 광해군 10년(1618) 무오사화로 현(縣)으로 삭강 되었다가 인조원년(1623)에 부(府)로 회복되었으나 재차 역난으로 인조 6년(1628) 현(縣)으로 삭강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었다. 그러나 한때 원주의 한 여인의 강상죄(綱常罪)2)로 강원도의 ‘원(原)’을 없애고 양양(襄陽)의 첫 자를 따서 강양도(江襄道)로 부르기도 했었다.

  주석2) 강상죄는 삼강오륜에 어긋난 행위에 대한 형벌을 말한다.


● 근·현시대
고종 32년(1895) 지방제도의 개정으로 양양군(襄陽郡)이 되었고, 반면 간성군은 폐지되어 죽왕면, 토성면이 본군에 편입(1919)되었다. 8.15해방과 더불어 38선 획정으로 남북이 분단되는 시점에 현남면의 전부가 서면, 현북면의 일부가 38이남임에 강릉군에 속하게 되었다(1945)
그후 6.25전쟁(1950)으로 38선이 무너지고 수복이 되어 1951.4 군자치위원회 구성으로 그해 7월 4일부터 군정(軍政)이 실시되었다가 수복지구임시조치법의 설정에 따라 1954.11.17 현남면은 명주군에 현북면 서면 일부가 환원되어 1읍 7면으로 되었다.
5.16군사혁명 이후 1961.1.1 행정구역개편으로 속초읍이 시로 승격 분리됨은 물론 죽왕면, 토성면은 고성군에 편입되는 반면 현남면이 다시 환원되어 6면이 되었다. 그후에도 수차례의 법개정에 따라 지역의 일부가 타시군으로 편입되고 군내 일부지역도 조정되어 1읍 5면으로 1989.1.1자로 되었다.


3. 現代的

가. 선사문화가 살아 숨쉬는 고장

BC 6000년전 선사문화유적지로 밝혀져 세계의 고고학계에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우리고장은 고구려의 동쪽변경에 익현현(翼峴縣) 또는 이문현(伊文縣)으로 편제되었고 5세기 중반이후 통일신라의 변방일대는 익령현(翼嶺縣)으로 동산현(洞山縣)과 함께 수성군(守城郡)의 속현(屬縣)된 때도 있었으며 고려에 들어와서는 양주(襄州)에서 덕령감무(德寧監務)에서 다시 양주(襄州)로 복호(復號)되기도 하였고 조선 태종 16년(1416)에 이르러 양양(襄陽)으로 개명하였고 고종 22년(1985) 양양군(襄陽郡)으로 개칭되었다.
8.15해방 이후 38선 획정으로 우리 고장은 일부 면을 제외하고는 38이북지역임에 공산치하로(共産治下)로 5년간 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수복되어 군정(軍政)(1951)에서 행정권이 이양(1954)되었고, 1989년에 1읍 5면으로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3)

  주석 3) 양양군. 「양주지」강원일보 출판국. 1990. p61


나. 국난 및 재난을 슬기롭게 극복해 낸 고장

1) 국난극복
고려 고종 8년(1212) 몽고병이 양주부(襄州府)까지 침공 하였을 때 항몽방어 태세가 사전에 충분히 구축되었기 자랑스럽게 격퇴시킴으로 양주방어사(襄州防禦使)로 승되었고 고종 44년(1257) 몽고병의 재침이 있을때 강참(降參)한 사건으로 덕령감무(德寧監務)로 강등되는 비통한 사실도 있었으나 원종 원년(1260) 지양주사(知襄州事)로 다시 승격되기도 하였고, 이런 역사의 영욕속에 그래도 자랑스런 사실이 있게 된 것은 양주성의 축성, 인구민보, 봉수대와 같은 방어시설을 사전에 관민의 합심으로 이루웠기 때문이다.
조선조 성종21년(1490) 오늘날의 해군기지인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이 양양읍 조산리 대포영(大浦營)이 강릉 안인에서 이전 설치되어 인조4년(1545) 혁파되기까지 수군기지로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동해묘(東海廟)에 춘추(春秋)로 조정에서 내려 보낸 향촉으로 국가적 제례행사를 거행하였던 것이다.

2) 수재복구
다음 몇 차례의 재난이 있었으나 그중 특히 철종11년(1861) 윤3월에 가옥 5백여호 이재민 3천여명을 낳게 한 설악산 동쪽 동해안일대에 불의의 대형 산불로 인한 화재와 병자년(1936)의 수해(水害)로 584명의 사망자를 내기도 한 대홍수도 있었고, 최근년에 6.25전쟁으로 초토화된 터전 위에 1954.9.13 주민가옥과 가꾼 전답이 연 36시간의 940mm의 폭우에 가옥 135호, 선박유실 102척등 큰 손실을 가져 왔을 때 제1군단(1軍團)의 지원으로 군, 관, 민의 혼연일체 속에 복구가 빨라 그 이듬해 대부분 완료하였다.

다.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정신이 강한 고장

우리고장 3.1만세운동은 서울탑골공원에서 시발된 지 한달 뒤인 4월 4일 양양장날을 기하여 4월 9일까지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거군적 시위로 전개되었으며 당시 중심인물로는 이석범, 조화벽(당시 호수돈 여학교 학생)으로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입수, 이곳까지 가져와 제작보급에 앞장섰었고 당시 시위로 순국한 사람은 12명 복역은 73명, 태형은 1,230명이었고 보복이 두려워 숨어서 요양 및 치료자를 포함한다면 더 많은 희생이 통계표가 작성될 것이다.

라. 自由守護(反共)와 統一意志가 왕성한 고장

감격의 8.15해방과 더불어 획정된 마의 38선으로 공산치하가 5년간 실시되는 동안 민일당사건(民一● 事件), 반공의거사건, 학생의거사건, 중학생 집단월남사건, 김일성초상화 소각사건, 호림부대, 서북청년회 활동의 반공투쟁사(反共鬪爭史)를 볼 수 있었다.

마. 鄕土史會 구석구석 활기찬 터전으로 변모시킨 재건과 우수 새마을 고장

1) 수복지구
국군 및 UN군의 38선 돌파이후 1950.10.2 군민 스스로 먼저 군자치위원회를 구성하고 10.10에는 군내학교가 일제히 개교하였다. 뜻하지 않게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경선까지 진격한 우리 군인은 작전상 이유로 12월말 철수하게 되어 우리 군민들도 피난하였다가 1951.4 국군과 UN군의 반격으로 귀향한 이후 자치위원회를 다시 구성하여 행정을 펴다가 그해 7.4 군정행정법령(軍政行政法令)에 따라 3년 4개월 군정을 실시하다가 행정권이양이 1954.11.17 있어서 대한민국 품에 안기게 된다.

2) 새마을 운동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 새마을운동으로 우리 군은 우수 새마을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우수 사례를 갖게 되었고 한때 삼다군(三多郡)으로 즉 소자랑 송이자랑 자철 자랑(지금은 폐광)으로 평판 받던 긍지 높은 고장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바. 현산학교설립(峴山學校設立)으로 근대교육에 일찍 눈뜬 고장

고종 44년(1906.9.8)(음7.20) 총 4만량의 기금으로 현산학교를 설립하고 200여명 학생 수용에 수업료는 면제 학용품은 무상지급 되었고, 교과목은 8개 교과목 중 음악, 영어, 체조 교과목은 선진적이라 하게 되며 여기 설립자 남궁억의 교육사상인 자주독립, 근로정신, 남녀평등으로 한 이념의 교육속에 그후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요람이 되기도 한다.4)

  주석 4) 양양문화원「남궁억의 계몽과 민족교육」p29~30


사. 축제와 지방문화 행사(축제와 지방문화 행사)가 해마다 열리는 전통문화예술의 고장

문화관광부지정 축제인 양양송이축제, 회귀어종인 연어를 테마로한 양양연어축제 그리고 전통문화 예술 종합축제인 현산문화제 등은 지역의 홍보와 주민의 화합을 공고히 하게 하는 매체가 되었고, 그 외로 전국대상으로 해맞이축제, 그리고 군민의 화합을 전제로 달맞이 행사(음력 대보름)도 매년 개최된다.

 

Ⅱ. 襄陽의 救國運動


1. 救國運動의 胎動

한국기독교 100년사를 통하여 볼 때 실로 이 나라를 개명시키는데 기독교가 큰 몫을 차지하였음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사실일게다.
보건위생 및 치료방법의 획기적 전환점을 가져오게 함은 물론이요, 역사이래 신교육을 할 수 있는 학교를 설립하여 근대교육 활동의 기틀을 마련한 공로 또한 큰 것임은 자명한 사실일게고 좁던 시야를 세계로 향한 폭넓은 시각으로 열었고 더욱이 나라의 기틀이 흔들릴때는 주권을 회복하도록 하는데 까지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민족자결과 자주독립을 위해 1919.3.1에 봉기한 기미독립만세 시위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기까지 헌신한 수많은 인걸중에도 기독교인이 상당수임을 알 수 있겠다.
민족대표 33인중 16인이 기독교인이요 또 소녀 류관순 열사와 두렁바위의 제암리교회에서의 집단적으로 기름을 붓고 불태움을 당한 끔찍한 사건 역시도 그러하거니와 정작 거사 당일 민족대표들은 평화적 시위 목적으로 매국노 이완용이가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방조약 문서를 작성하고 토의한 장소인 즉 이완용 개인집으로 사용하던 그 당시 요리집인「태화관」에 모여 축배를 들고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된 탑골공원에 운집한 학생과 시민 약2만여명은 격분하게 되었을 때 어서 민족 대표 및 사람만이라도 이곳으로 오기를 요청한 것에 거절까지 당하게 된다. 이때 군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술렁거림과 그야말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을 때 돈독한 신앙심으로 다져진 정재용 학생(당시 해주교회 학교 교사)이 수습하고 단상에 담대히 뛰어올라 역사적인 독립선언서의 낭독으로 시위행진의 장한 기폭제역할을 하였던 장본인도 숨길 수 없는 기독교인인 것이다. 이 같은 요원의 불길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된 그 함성이 이곳 양양까지는 약 한달 뒤인 4월 초승에 거행하게 되었는데(4.4-4.9) 이 운동은 우리 강원도에서는 물론 전국적으로 볼때도 지방 3.1운동 활동사로서의 당연히 제일로 꼽을 수 있겠다.
이처럼 구국의 불꽃을 들게 된 것 또한 당시 양양군수로 재임하던 한서 남궁억(南宮檍)이 설립한 峴山學校(1906.9.8 설립된 학교로서 양양초등학교가 됨) 출신들이 많았다는 것도 매우 괄목할만한 일이겠지만 더욱이 기독교(감리교회)가 1901.10.5에 양양감리교회로 창립되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로운 행동을 위해서는 몸소 몸을 바쳐 살리겠다는 굳은 의지력을 배양할 수 있는 훌륭한 정신적 지주감을 길러낼 수 있는 기관이 바로 교회였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이곳 양양 3.1운동을 주도한 중심인물로는 두 분을 꼽을 수 있겠는데 일반인으로서는 도천면장(지금의 도문, 대포동)을 역임한 咸平李氏 錫範을, 종교인으로서는 바로 趙和璧여사를 내세울 수가 있겠다. 그의 애국심이 강한 의지를 표현이라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자료로서는 류관순 열사의 오빠이신 류우석과 결혼하게 된다. 그래서 여기와 사는 동안 그 집을 동네에서 부르기를 “예수집”으로 했었다.
이에 일반인의 활동상은 뒤로 놓고 즉 양양감리교회를 중심으로 활약한 내용을 약술하고자 한다.

2. 救國女學徒 趙和璧

서울탑골 공원에서 기미년 3월 1일 독립선언이 있은지 약 한 달이 지난 그해 4월 4일부터 4월 9일까지 연착적으로 조직적인 만세시위 운동이 군내 전역으로 확산되었는데 이 만세 운동이 있기까지 태극기 제작이며 독립선언서 등사를 비롯 제반 준비에 헌신한 인물 또한 양양교회 청년 지도자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앞서도 약간 제기 되었지만 당시 양양교회 조영순 전도사님의 따님이신 조화벽이 개성에 소재한 호수돈학교 여학생 신분으로 입수된 독립선언서를 가방에 숨기어 경원선 철도로 원산에 도착한다. 여기에서 다시 배편으로 대포(지금의 속초시 대포동 그 당시는 양양군에 속했음)에 입항하게 되는데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져가고 있을때라 굉장히 검문검색이 심했던 것이다. 안전하게 오는 방법이 오색령(지금의 한계령)을 오고가는 통로가 있지만 보행으로 10일 이상 걸려야겠기에 그 당시로 발달된 교통수단인 철도와 해상을 통한 배편이 유일한 수단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조화벽 학생의 가방도 예외는 될 수 없듯이 일단 압수당하게 된다. 그때 청년이나 학생신분을 눈여겨 둔 경찰은 즉각 경찰서장에게 보고한다. 요시찰인으로 지목된 조화벽을 회유할 목적으로 그날 경찰서장 딸과 함께 저녁식사를 같이 한다는 조건으로 관사로 가게 되어 다행히 가방 수색 없이 되돌려 받게 되었다. 그날 저녁 식사초대를 마치고 교회로 돌아온 그는 청년지도자 김필선에게 버선목에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인계하고 필경과 등사의 책임을 지게 한다. 그와 활동한 교회 청년들은 김재구, 김규용, 김계호, 김주호, 김봉운 등이었다.
 그는 그 당시 양양면사무소 직원으로 있었기에 아주 쉽게 할 수가 있었으며 또한 태극기 제작은 김주호에게 임무를 부여하였지만 그 복잡한 제작과정을 대량으로 해야 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왜경과 그들의 앞잡이 노릇하는 사람들의 감시의 눈을 피한다는 것이 여간 근심거리가 안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인적이 드문 교회 뒷산 양지쪽에 위치한 성내리 상여틀집에 몰래 들어가 그리기로 결심하였다. 그 당시 일반인들도 거사 모의 장소는 거개가 한적한 곳, 눈을 쉽게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토의 협의장소로 택했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숨어서 태극기를 무려 370여장 제작하게 된다. 지금도 밝은 낮이라 해도 상여틀집 부근을 지나치려면 마음 한구석이 무섭다든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이 속일 수 없는 사실인데 그때는 오죽했겠는가! 이는 평소 돈독한 신양의 기초 위에 서서 구국하겠다는 확고한 신념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겠다. 거사 당일 양양교회 청년들은 일반인들과 긴밀한 협조 아래 양양초등학교가 위치한 구교리 고개에서 장에 오는 주민들에게 숨어서 배부했던 것이다. 이를 신빙할 기록문으로서는 당신 양양군수 이동혁이 4월4일 의거사실을 4월 5일 0시 30분에 강원도 장관에게 전문 보고한 내용을 보면 「야수교도가 중심으로 수백 명의 일당이 읍내로 진입하다...」로 한 것을 보더라도 분명히 이곳 만세운동은 틀림없이 양양교회 교인이 중심적 역할을 하였음을 충분히 입증된다. 그 밖의 현북면 기사문 고개(지금은 만세고개로 부르며 기념비가 세워져 있음) 만세시위도 광정교회의 오세옥, 이응렬 성도들이 앞장섰으며 또한 강현면에서도 시위가 있었는데 군내에서는 가장 조직적이었으며 그곳 역시 물치교회의 김두영, 전달원 성도가 가담한 점만 보더라도 이곳 양양의 기미 3·1만세 시위는 일반인을 계도하며 구국의 불꽃을 피웠던 것임이 틀림없다.
이때 양양 3·1만세 운동에 참가한 사람이거나 주동자 검거 선풍이 일게 되자 조화벽은 사촌동생인 조연벽(趙蓮璧) 그리고 친구인 김정숙(金貞叔)과 함께 양구로 피신하게 된다. 그곳에서 화전민들로부터 의심을 받지 않고자 화전민과 함께 산누에를 치기도 했었다. 세월이 흐른 뒤 다시 학업을 계속하여 졸업한 뒤 큰 뜻을 품고 1920년 4월 공주에 소재한 영명학교 교사가 된다.
여기에서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 시위의 주역이었던 유관순(柳寬順)의 두 동생(관복, 관석)을 맡아 돌보기도 하였고 또 유관순의 오빠인 유우석(柳愚錫)의 옥바라지를 해주던 것이 계기가 되어 결혼을 하게 된다.
그들은 공주에서 양양으로 생활터전을 옮기게 된다. 8·15해방으로 서울로 월남하여 살다가 80세 되던 1975년 9월 3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그 후 정부로부터 독립 유공으로 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게 되었다.
조화벽(1895~1975)에 대하여 좀 더 설명하면서 종합정리해보면 강원도 양양사람으로 양양읍내 감리교회 성도가 되어 3·1만세운동 당시 교회 청년 회원들을 포섭하여 조직적인 시위를 개최하게 된다. 그는 개성에 소재한 호수돈 여학교에 재학하면서 선배인 권애라 등 수명의 학생과 함께 기숙생들로 조직된 비밀결사 대원으로 참가한 바 있어 여기에서 보다 더 강령한 성숙된 구국정신으로 3·1만세 시위관계로 임시휴교조치가 내려졌을 때 바로 귀향하여 양양만세시위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화벽은 한국여인의 높은 기상과 기독교 학교인 호수돈 교육을 통해 큰 영향을 받았기에 이 같은 애국적 거사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음은 물론 주도적 역할 기능까지 갖게 되지 않았나 보겠다.5) 기왕 호수돈 학교가 등장하였기에 여기서 그 학교의 면모를 간략히 소개해 보면 호수돈 여학교는 1899년 주일학교 형태로 수업을 전개 운영함에서 시작되어 1904년 정식 학교로 인가를 받아 당시 「개성 여학당」이라 하였고 학당의 당칙이 제정되던 1906년부터 Tallulah 일명 「둘레학당」이라 하였다.
그 후 Holston이라 교명을 붙이게 된 동기는 본관 건물을 신축할 때 Wagner교장의 친구인 Staley박사가 5,000달러의 거금을 희사해 주었기에 이를 기념하고자 제의했으나 자신의 이름을 쓰는 것을 극구 서양하고 미국의 홀스톤 지방의 부인협회로부터 원조를 얻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 도울 것을 약속받았기에 1908년 사립학교 칙령 44호에 의해 보통학교 4년제로 되면서 교명을 그 지명 그대로 따 「호수돈 여학교」로 개칭하였던 것이다.
 개교기념일 제정에 있어서는 1908년 호수돈 여학교로 교명이 개칭되고 그 이듬해인 1909년 5월 15일 4층 규모의 속조 본관 건물이 건립되었고 이어서 구한국정부의 학부대신 이재곤(李載棍)의 인가를 받음으로써 정식 개교기념일로 정하게 된 것이다.
 고등과와 보통과가 별설되어 학급정원 30명으로 하는 4년제 보통과와 3년제의 고등과를 설하였으며 당시 학생수는 보통과 73명 고등과 25명으로 편성되었다. 교과목은 국어(한글), 바이블(성경), 한문, 영어, 수학, 생리, 역사, 찬가, 자수 및 편물로 되어있었다.

  주석 5) 5) 김진홍「호수돈 100년사」(서울 홍익전자출판사 1999) p60~62

 
 여기에 양양 3·1만세 시위가 전개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도약 기술하면
1. 기간 : 그해 4.4~4.9(6일간)
2. 범위 : 군내일원
3. 참가 : 6개면 82마을 4,600여명
4. 피해 : 순국 12명, 부상 50여명, 수형 142명
         그 후 수백 명이 연행되어 고문당함
5. 중심인물
 일반인 - 이석범 (함평이씨)
 종교인 - 조화벽 (양양감리교회)
 역할담당 - 조화벽 : 독립선언서 버선목 숨겨옴
              - 김필선 : 독립선언서 등사
              - 김주호 : 태극기 제작 수백장
              - 김계호 : 성내리 상여틀집에서 옥양목, 한지로 제작
※ 374장 압수당함 (총제작 11,000여장 제작)

만세시위의 진상

4월3일
·임천리 본거지에서 계획이 탄로남
·청년 몇 사람 경찰에 연행

4월 4일
·양양 장날에 시위군중 모이기 시작
·지휘자 - 최인식, 김재구, 김필선, 김계호
·어제 연행된 청년 22명 석방요구
·함홍기 의사 - 김택(金澤)서장에게 화로 던짐
                       일경 추산(秋山), 대석(大石)에 의해 작살 당함
·순국자 속출 - 사망: 군병연, 김학구

4월 5일
·3개면 군중합세로 양양읍으로 진입
·지휘 - 김종석, 최한두, 김진열 (손양면)        
     장세환, 김두영, 박제범 (강현면)        
     김영경, 이종순, 박사집 (도천면)
·대포주재소에 모여 시위 일본인 배를 타고 피신함

4월 6일
·양양 보통학교 (오늘의 양양초등학교) 4학년 생 현산 공원에 올라 만세 부르다 (30명)
·김학구 장례일을 기해 만세 시도
·대포주재소 습격 - 800명의 군중
·양양읍 관청습격시도 - 1,230명

4월 7일
·현북면 산간마을 (원일전, 장리) 주민읍내진입시도
·현북면을 중심으로 연3일간 여러 곳에서 시위
4월 8일
·도천면 논산리(오늘의 속초지역)이장 김주철을 위하여 마을사람들 합심, 동원하여 대포를 향해 행진하다 해산

4월 9일
·가장 치열한 곳 - 현북면 기사문리
·지휘자 - 오익환, 김재한, 박원병, 오정현
·청년들 - 김종대, 이응열
·임병익, 박원병, 오세옥이 주동이 되어 1,000여명 군중이 읍내로 진입 하려던 계획을 변경. 기사문리 주재소를 공격 목표로 하여 고개를 넘는다. 그 고개를 현재 ‘만세고개’라 부르고 있음
·일본 수비대와 경찰에 의해 9명 피살되고 20여명이 부상당함

- 참고 -
참상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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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자료는 한국 독립운동지혈사(上)과 양양향토지에서 발취, 정리한 것임.


Ⅲ. 未來像의 敎訓

1. 양양의 자랑 요약

1) B.C6000년 전의 先史文化를 통해 원양양인(原襄陽人)은 배달민족의 기원으로 큰 갈래로 짐작할 수 있으며 그렇게 양양은 온갖 시련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오늘의 양양(襄陽)을 있게 하였다.

2) 방어태세 : 면밀한 구축으로 몽고 병의 침입을 격퇴할 수 있었던 긍지와 재침 때 강참(降參)한 사건으로 강등하는 비운도 맞았으나 다시 승격(昇格)할 수 있었던 불굴의 끈기를 발견 할 수 있었으며 또 재난 때에는 침착한 자세로 복구에 임하여 단시일에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3) 상실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항일운동은 이곳 양양까지 파급 되어 3·1만세운동은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약 한달 뒤인 4.4~4.9 에 거국적으로 조직적으로 전개된 이석범, 조화벽의 중심 활동은 고장의 3·1운동과 그리고 이 나라 지방 3·1운동사에 찬연히 빛을 발하게 되었다.

4) 분단의 아픔과 이념의 갈등이 있을 때 학생, 청년의 눈부신 반공의지와 호림 부대, 서북 청년회 활동으로 자유 수호에 몸 바치는 활동에서 남긴 업적은 앞으로 통일의 초석으로 승화되리라 믿는다.

5)  6.25전쟁 후 수복지구라는 특수 명칭 아래에서는 초토화된 터전의 복구와 군민 스스로 구성 자치위원회(自治委員會) 활약으로 재기의 꿈을 가꿔 나갔으며, 구각을 벗고 가난을 물리치기 위한 조국 근대화 물결의 하나로 전국적으로 확산된 새마을 운동에 편승한 우리 고장은 우수새마을로 각가지 모범사례가 발표된 긍지 높은 군으로 발전하였다.

6) 현산 학교 설립자 남궁억의 미래지향적 사고방식에 의해 계획되고 추진된 당시의 상황은 가히 도내 제일의 규모와 재력을 갖추고 200명 학동수용에 수업료 전액 면제 학용품 완전무상지급아래 8교과 3학년제 운영으로 그 당시 운영되고 있음이 당연하였으리라 믿고 또 양양초등학교 전신으로 근의 교육사상 자주독립, 근로정신, 남·여 평 등 속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요람이 되고 있는 것은 필연적 결과라 보겠다.

7) 시대에 걸맞은 각가지 특색 있는 축제 개발로 (양양 송이 축제, 양양 연어 축제) 지역홍보와 주민소득증대에도 기여하고 있음은 물론 오랜 역사성과 전통성을 전제한 현산 문화제(峴山 文化祭)는 독창적이며 독자적 운영으로 전 군민의 참여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어 양양의 자존의 길을 개척함에 조금도 손색없는 것이라 믿는다.

2. 3·1정신의 교훈

우리는 지금 3·1 정신인 민족, 민주, 자유, 평화를 통해 분단된 현실에서 먼저 남남의 갈등을 해소 할 수 있는 자존의식과 자긍심으로 밝고 맑은 미래를 정립하고자 함께 나서야 하는 중차대한 시점에 서있다 하겠다.
3·1절을 통하여 국권상실이후, 10년을 참고 참다못해 탑골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하나된 함성을 터트린 민족, 민주, 자유, 평화를 표방한 물결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 방방곡곡 211고을에서 1,542회의 집회와 7,500여명의 순국의 피흘림이 있었고 우리 강원도에서도 13개 고을에서 51회의 집회를 통해 무려 144명의 순국자가 나오게 되었다.
또 양양에서도 8회의 집회를 통하여 12명의 순국자가 나왔고 그 후 무려 수백 명의 주민이 일경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게 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운동을 통하여 우리 선조들은 중국 상하이에 공화제 임시정부를 수립함에 독립군의 활동이 조직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어「청산리 전투」와 같은 승전의 소식을 퍼지게 하였고 우리나라의 위상 또한 국제사회에서 높이게 됨은 물론 세계 피압박 약소민족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 점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현재를 보자. 부끄러운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는가!
국민대회, 민족대회, 촛불대행진과 같은 보·혁 간의 갈등으로 따로 개최한 행사는 진정 그날의 3·1정신에 어긋난 것 아니겠는가! 다시 한번 하나로 역사할 각오를 거듭해야 할 시점이라 보겠다.

 특별히 조명해 볼 것을 아래와 같이 요약 기술해 보면

1) 조화벽(趙和璧) : 1895 - 1975
 부 조영순 전도자(현 장로) 모 김미흠(미리암) 무남독녀로 출생
 원산 루시학교 입학(1912)
 호수돈 여학교 고등과 졸업(1920)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부임(1920)
 양양교회 「정명학원」 설립(1925)
 삼일만세운동 참가 (권애라와 함께)
 양양만세운동의 중심인물(종교인)
 : 경원선 철도로 → 원산 → 배편으로(대포항)
 경찰서장 회유정책 - 저녁초대
 유관순 오빠인 유우석과 결혼(옥바라지 관계로)
 관복, 관석 두 동생 양육(양양으로 은신)
 해방 후 서울로 이사
 1982 대통령 표창 추서

2) 중심인물
 일반인 - 이석범(함평 이씨)
 종교인 - 조화벽(양양 교회)
 조화벽 - 독립선언서 버선목 숨겨 옴.
 김필선 - 독립선언서 등사
 김주호 - 태극기 제작 수백장
 김계호 - 성내리 뒷산 상여틀집, 옥양목, 한지에 그림.
 깃발 - 374장 압수당함.
 태극기 11,000여장 제작

3) 기독인 활약상의 증빙자료가 될만한 것.
 - 거사 후 4. 5. 0시 30분 -
 이동혁 양양 군수가 강원도 장관에게 전문보고내용
 「양양군 읍내 부락으로부터 야소교도를 중심으로 한 수백 명의 일당이 읍내로 진입함에 읍내 배회가 수백 명과 호응하여 만세를 唱하다.」

4) 거사 후 조화벽은 4촌동생인 조연벽과 함께 양구로 피신 누에고치를 하기도 함.
3. 바라는 마음

무한히 산재되어있는 사실적 실증자료이거나 소문에 떠도는 여러 이야기꺼리를 수집, 정선하여 자존의식 강화와 오늘에 사는 우리의 미래를 정립할 수 있는 교훈으로 남게 함이 매우 중요하리라 믿어 보고 이 같은 활동이 몇 사람의 관심이 아닌 전문기관에서 깊은 관심 속에서 소리 없이 묵묵히 정진하려는 수많은 향토사학도들에게 힘을 실어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소망해 본다.

 

<참고문헌>

기독교 대한 감리회「하늘양식」 본부선교국 1986
김성준 「한국기독교사」 서울. 기독문화사 1993
김진흥 「호수돈100년사」서울. 홍익전자출판 1999
문화관광부 「남궁억 (문화인물 1월)」 서울. 문덕 인쇄 2000
양양군 「양양연감」 춘천. 강원도민일보 출판부 1999
양양군 「양주지」 춘천. 강원일보 출판부 1990
양양 문화원 「양양 ‘얼’기미만세 운동」 홍천. 대양출판사 1998
유춘병 「동부연회사」 서울. 신앙과 지성사 1996
이능호 「남선교회 105사」 서울. 보이스 사 2001
홍천 문화원 「남궁억의 생애와 구국운동」 홍천. 대양 문화사 1999

<참고자료>

양양 문화원 : 남궁억의 계몽과 민족교육
양양 문화원 : 양양의 역사
현산 문화제 위원회 : 우리고장의 기미독립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