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문화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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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461회 작성일 2009-03-04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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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호북성 양양현과 자매결연을 맺은지 10년이 되는 2008년 11월 6일 이진호 양양군수 외 10명의 양양군 교류사절단이 중국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필자도 영광스럽게 일행과 동행하게 되어 매우 감회가 깊었다. 중국호북성양번시양양구인민정부 우호교류 10주년 기념행사방문내용

(中國湖北省襄樊市襄陽區人民政府友好交流10週年記念行事訪問內容)

1. 방문기간 : 2008년 11월 6일(목)부터 11월 10일(월) 까지 4박 5일간
2. 방문교류사절단 : 11명

양양군수 이진호
양양군의회의장 김준식
강원도의회의원 임용식
양양문화원장 양동창
농협양양군지부장 김철래
강원일보주재기자 박기용
경제도시과장 김진하
보건소장 김선택 외 수행원 3명

3.방문목적

∙우호교류 10주년 기념행사
∙기타 우호교류 협력관계 협의 등

2008년 11월 6일(목) 오후 2시 양양을 출발하여 밤 9시 30분에 인천 공항을 이륙하여 3시간에 걸친 비행을 한 후 중국과 우리나라의 시차가 1시간이므로 중국 현지시간 밤 10시30분에 중국 호북성 무한 공항에 도착 입국 수속을 마치고 홀리데인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10년 전에는 김포국제공항에서 북경국제공항을 거쳐 국내선인 양번공항에 도착하여 승용차로 양양 현을 방문했는데, 이번에는 무한(武漢)에서 하루 밤을 보내고 관광버스로 세 시간 동안 의십 고속도로(議十高速道路)를 달려 양양 구를 방문하게 되었다.

11월 7일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내리고있었다. 현지가이드 이용남이 무한에 대한 여러 가지 안내를 해 주었다. 그 중에 무한 사람들은 머리를 잘 굴리는 사람이고 말이 많다고 하는데 심지어 자동차 넘

버 앞 글자가 입구 자가 두 개가 있는 악(●)자를 쓴다고 하였다. 창밖으로 거리의 풍경을 보니 자전거,오토바이로 출근하거나 다니는 사람이 많았는데 자전거와 1인승 오토바이, 2인승오토바이가 눈에 많이 띠는데 비가오기 때문에 우비를 착용한 모습이 이색적 이었다. 우비를 핸들 앞까지 덮고 2인용 오토바이는 2인용 우비를 쓰고 있는 것이 매우 정겨웠다. 기후가 온난하여 논에서 벼를 이모작 한다는데 들판에는 수확한 논과 수확하지 않은 논의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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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중국 사람은 평생 자기나라 땅 다 밟아보지못하고, 자기네 요리 다 먹어보지 못하고, 자기나라 말 다 못 배우고(못하고) 죽는다고 한다.오전 11시 30분에 양양 구에 도착하니 여러분이 나와 영접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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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이 방문하는 곳마다 열열이환영한다는 현수막을 게시하고 있었다.숙소를 배정 받고 여장을 풀고 나서 양양구 인민정부 왕군(王軍)부장이 환영 오찬을 베풀어 주었다.

오찬에 앞서 환영사와 양양군수의 답사를 주고받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오찬을 즐겼다.오후 2시 20분 공식행사인 기념식수를하였는데기념수는 개화나무(중국에서는 계수나무를 개화나무라고 함)로서 가지가 2개 똑같이 곧게 뻗은 나무를 골라서 양국의 우의를 상징하고, 10월에 꽃이 피기 때문에 교류의 뜻을 더욱 깊고 영원한 의미를 부여하였다고 했다.

표지석에는

記念中韓兩襄陽建立友好關係十週年

友誼樹

大韓民國江原道襄陽郡廳中國湖北省襄樊市襄陽區人民政府

2008 年十一月七日

이라고 새겼다. 기념식수를 마치고 양양구 제1고교를 방문하기 위하여 출발하였다.

 

10년전 양양현과의 교류를 계획할 당시를 회고하면필자가 양양군청에 재직 중 인천에 소재하고 있는 제일물산 양양출신 정인화 사장님께서 당시 오인택 양양군수 님에게 우리 양양군의 지명이 중국의 양양에서 연유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상호 교류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함으로써 이를 받아들여 1998년 7월 26일부터 교류하게 되었는데
 

양양의 명칭은“한서지리지 완벽국사 대사전 기구회첩(漢書地理志完璧國史大辭典耆舊會帖)”에 의하면{1416년(태종 16년) 비로서 襄陽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양이란 본래 중국 호북성 한수연안(漢水沿岸)에 있는 지명으로서 아름다운자연과 지리적 환경이 양양과 유사하고 사람들의 품성(稟性) 또한 자연의 섭리(攝理)에 감모(感慕)하는 기개(氣槪)가 잠재하여 사대부의 문헌(文獻)이 찬란하고 풍습이 선미(善美)하여 다른 고을 보다 더 훌륭함으로 양양이라 명칭 하였다 고전하고 있으며 이곳 현산(峴山), 한수(漢水)[남대천],무산(巫山), 휘문(麾門)[�泉], 태평 루(太平樓) 등의 명칭도 중국양양의 명칭에 연유(緣由)되었다고 전하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초의 교류 시작은 여러 차례 실무적인 절차를 거쳐 1998년 7월 26일부터 7월 29일 까지 4일간에 걸쳐 중국 양양현의 부원장외 6명이 우리 군을 먼저 방문하게 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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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에서는 1998년 11월 8일부터 11월 11일 까지 오인택 양양군수 외 8명이 방문하여“상호 공동발전을 위한 국제교류 협정”을 체결하였다.물론 상호 교류를 제안 하셨던 정인화 사장님도 동행하셨다.그 당시 중국에서는 1994년부터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개혁개방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시기였는데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의 기업을 유치하려고 하였고 우리나라 역시 인건비등 생산비가 저렴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기업이 중국으로 진출하기를 희망하는 시기였다. 정인화 사장님은 양양현의 여건을 보고 회사이전을 염두에 두면서 양양 현을 방문하였으나 교통의 불편과 물류이동이 여의치 않아 이미 청도(靑島)에 진출해 있던 남애전자를 인천의 제일 물산과 연계하여 사업을 크게 번창시켜 현지에서 중국정부로부터 많은 각광을 받았으나 지금은 고령으로 은퇴하고 서울에서 노후를 보내시고 있으며 항상 고향을 잊지 않고 후원해 주시고 계신다.

그 후 양 정부는 매년 상호 교류가 계속되고 있으며 2001년부터는 공무원 상호 파견근무로 농업,보건, 관광 교류가 더욱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때와 비교하여 보면 당시 중국의 양양현은 아주 초라한 농촌이 대부분이고 집에서 돼지를 들어내 놓고 키우는 광경도 보였으며 진흙 밭에 버드나무를 심어 바구니 등 생활용구를 만들어 소득을 올리려고 하는 것을 견학시켜 주었다.한마디로 우리나라의 60년대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방문단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 방문 시 분위기는 세월이 많이 흐른 탓도 있겠지만 2008년 8월에 열린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엄청난 발전을 가져온 것 같았으며 중국 전역이 화장실을 정비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으며 곳곳에서 개발의 붐이 일고 있었다.주택 건축에서 부터 마을정비, 상가정비, 도로개설, 학교시설 개선, 공원조성, 관광 유적지 정비등 어느 곳 할 것 없이 공사를 끊임없이 하고 있었으며 쉴 사이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양양 구 제1고교에 도착하니 학교 내는 공사 중으로 어수선하였으나 학생 수는 80개 반에 5,000명이고 전교생이 기숙사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방문 후 교장 선생님과 선물을 주고받고 시설을 둘러보던 중 교실 벽면에 타일로 중국 주변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의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어 교장 선생님에게 시정하여 줄 것을 건의하였다. 교장 선생은 검토해보겠다고 하였으나 난색을 표했다.

귀국 후 동행했던 강원일보 박기용 기자가 2008년 11월 12일(수)자로 강원일보에 다음과 같이 보도 하였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전문을 소개한다.

<기사 내용>

“잘못된 일본해 표기 바꿔 주세요”
-양양군 교류 학교 중(中) 양양 구 제1고교 지도에 동해 잘못 표기-
-현지 방문 중인 군 교류사절단, 한국 영토 사실적 교육 당부-

양양군과 10년째 교류를 하고 있는 중국 양번 시 양양 구 제1고등학교 벽면에 타일로 설치된 대형 중국 주변 지도에 우리의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돼 양양군이 이에 대한 수정을 요청했다.

지난 7일 교류 10주년 행사 차 중국 양양 구를 방문한 교류사절단은 현지 제1고등학교를방문한 자리에서 일본해를 삭제하고 동해로 표기해 줄 것을 요청한데 이어 독도 등 한국영토에 대한 사실적 교육을 주문했다. 현지 동포 졸업생에 따르면 중국 대부분의 학교가 한국의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 지도로 교육하고 있다며 일본해로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 중국은 상하이 동쪽의 바다를 동해로 표시하고 있어 한국의 동해 표기 보다는 한국해로변경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 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양양 구 제1고교 관계자는“검토해 보겠지만 학교 측이 단독으로 결정 할 사안이 아니다.”며“상부기관에 보고해 변경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양양군 관계자는“당장표기가 변경될 것으로 보지는 않지 만 교류를 통해 지속적으로 요청 할 계획이다.”며“변경 표기가 불가 할 경우 일본해의 명칭을 삭제토록 요구할 방침이다.”고 했다. (지도사진 생략) 양양=박기용 기자.

제1고교 방문을 마치고 양양구의 내륙지방 건재 시장인“화중광채 대 시장(華中光彩大市場)”을 둘러보고, 다음 탐방지로 이동 중 차중에서 가이드가 양번시에 대한 소개를 하여 주었다. 10년 전에는 양양 현이었는데 2001년 12월 양번시 양양구로 행정 체제가 개편되었다고 한다.

“양번시는 양양성과 번성을 합쳐서 양번시가 되었으며 한강 남쪽은 양양성 북쪽은 번성이라고 한다.양번시의 세 가지 보배는 두부면, 식혜, 술 인데, 바퀴가 세 개인 인력거가 유명하다고 한다. 삼국지의 중심 배경지이고 재갈 량이 살던 곳이 관광 명승지 문화재로지정 운영되고 있으며 인구는 580만 명이라고 한다. 양양 구의 현황을 살펴보면 면적은 우리군의 네 배인 2,306 평방키로 미터이고 그 중 경지 면적은 130,000 헥타르 이다.인구는 100만 명이 조금 넘으며 호북성 서북부 양자강의 최대 지류인 한수의 중류에 있다.

기후는 아열대 습한 계절풍 기후로 분지의 특성상 여름엔 무덥고 겨울엔 춥다고 한다.농업은 밀, 벼, 면화, 깨, 옥수수 등이 주요 곡종을 이루고 호북성 내에서 최고의 생산량을 자랑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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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0여개의 중소기업의 공업기반으로 방직업, 의류업, 화공업이 발달해 있으며, 외국 자본으로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공장도 유치되었고, 소, 돼지의 가축사료 생산체계가 잘 정비되어있다고 한다. 관광자원으로는 녹문사와 국가급 관리의 산림공원과 제갈량의사당이 위치하고 있다.”고 하였다.다음에 도착한 곳은 2001년에 새로 조성했다는 제갈량 광장 공원이었다. 양번시에서 제일 큰 광장이며 실물의 열두 배 크기의 제갈량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제갈량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모신(謨臣)이다 자는 공명(孔明)이며 와룡(臥龍), 복룡(伏龍)으로도 불렀다.

제갈량은 산동 성 사람이며 181년에 낭야 군의 지방관이었던 제갈 규(諸葛珪)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14살에 양친을 여의어한동안 백부 제갈 현이 예장에서 제갈량을 돌보았다고 한다. 제갈 현이 죽자 형주로 온 제갈량은 스스로 농사를 하고 양보음이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고 하는데당시 형주는 난세를 피해온 명망 높은 선비들이 많았는데 제갈량은 이들과 교류를하면서 인맥을 넓히고 지식을 쌓았다. 당시 유비도 여남에서 조조에게 패한 후 유표에게 의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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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에 대한소문을 듣고 삼고의 예를 하여 결국 제갈량을 영입하게 되었는데 이때 제갈량이 유비에게 제안한 계책이 그 유명한“천하삼분 지계”이다. 제갈량은 양번시에 와서 10년 동안 살았다고 한다.

제갈량의 광장을 뒤로하고 제갈량의 성지인 고륭중(古隆中)을 탐방하게 되었다. 제갈량의 은거지로 해발 306미터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6년 11월에“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공포 된 곳이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역시 경내 정비공사가 한창이었다. 작업광경은 대부분 인력으로 하고 있었으며 어설프게 보였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어구에 머리는 용, 몸은 봉황, 등은 거북, 독수리 발을 한 초려비(草廬碑){뒷면에 �臥處라 새겨있었음}가 신기하였다. 와룡 유지(臥龍遺址)에도 제갈량 동상이 있는데 여기 동상의 크기는 실물의 두 배로서 “한제갈승상무후사(漢諸葛丞相武候祠)”라 새겨져 있다.삼고유적(三顧遺跡)이 있고 도원결의를 맺은 장면을 재연한 삼의전(三義殿)이 있는데 뜰에는 맏배나무 세그루가 있고 영화 촬영 세트장이 있어 년 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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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륭중 탐방을 마치고 용화 공업지구(자동차생산), 신천공업지구(자동차부품생산)의 견학을 끝으로 탐방 및 견학 일정을 마치고 저녁 6시 양양구 당서기장이 주최하는 공식 만찬이 시작되었다. 만찬은 개회 선언에 이어 참석인사 소개가 있었는데 양양구 참석인사는 당서기장이 소개하고 우리군 사절단은 이진호 군수가 소개를 하였다.

참석인사 소개가 끝난 후“교류단의 방문을 환영하고 앞으로 우의를 더욱 돈독히 하자”는 왕군 부장의 환영사에 이어“우리 교류 단 일행을 열렬히 환영하여 주신대 대하여 교류 단을 대표하여 감사

 

드리며 지속적인 교류를 통하여 양정부의 발전을 도모해 나가자”는 이진호 군수의 답사를 마치고, 양국 간의 우의를 다짐하는 기념품을 교환하였으며 상호 대표의 건배로 흥겨운 만찬이 무르익었다. 공식 일정을 모두 마치고 귀국 도중 우리군의 숙원 사업인 케이블카 (로프웨이)의 필요성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설치반대 이론에 대응하기 위하여 장가계 5경구의 황석채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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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黃石寨�道)를 시찰하였다.

삭도의 거리는 1,200미터이고 1기당 50명이 탑승 할 수 있는 대형 케이블카 였으며 자연훼손도 없었으며 자연경관 훼손 보다는 자연 보존에 더 큰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다음에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천문선산(天門仙山)의 6인승 케이블카를 탑승하여 보았는데 해발1,500미터 까지 연결되어 있었으며 거리는 7,500미터이고 운행 시간은 평균 35분이 소요되었고 삭도가 주택 위를 지나 천문선산에 이르는 시설인데 지붕 위를 상당한 거리를 지나면서도 추락방지 등의 안전시설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정상에 오르는 도중 주위의 경관이 장관을 이루었으며 삭도 중간 역에서 천문으로 가는 셔틀버스

 

를 운행하고 있었 는 데 절벽 위를 달리는 버스가 아슬아슬하였다. 천문선산에는 두 개의 삭도가 있었는데 하나는 지상에서 산 정상까지 운행하는 6인승 케이블카이고하나는 천문산 정상에서 짜릿짜릿한 절벽의 귀곡잔도(鬼谷棧道)를 지나 천문사(天門寺)에 가면 여기에서정상까지 운행하는 2인용 리프트용 삭도가 있어 탐방객이 편리하게이용하게 되어 있었다.

2008년 11월 10일 (월) 4박 5일의 일정을 마치고 중국 장사 공항을 출발 인천공항에 도착 육로로 귀향 하였다.이번 중국 양양구의 방문을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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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소감은상호 교류를 통해 우리의 기업이 진출하지는 못하였지만 관광 문화 교류, 농업기술교류를 통해 중국의 문물을 조금이나마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는 것이 보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매년 상호 공무원 교환 근무를 통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앞으로 중국의 개혁 개방에 참여 할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데 기여를 하고 있으며,

중국의 역사와 지리교육에 있어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인식시켜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다든지 동북공정에 대한 잘못된 역사의식을 바로 세워 나가야 하겠다는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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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후 로프웨이 설치에 대한 찬성반대 토론회가 있었는데 이진호 군수께서 주제 발표를 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써

2008년 12월 19일 환경부로부터 자연공원 내 로프웨이 설치운영 가이드라인이 확정 발표됨에 따라 기존 탐방로나 도로의 제한 내지 폐지를 유도할 수있는 지역과 자연 친화적 공원 환경조성에 기여 할 수 있는 지역을 우선 선정하고, 주요 경관을 조망 할 수 있는

 

곳에 설치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당해공원의 대표적 상징성을 지닌 주봉(主峰)을 피해 설치하는 등 주요 기본방향을 제시했다.이에 따라 우리군의 설악산~

오색 로프웨이 설치 사업이 2009년부터 탄력을 받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다행이 아닌가 생각이 되었다.앞으로 양 정부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양 정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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