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문화20호

<향토사료> 제23회 강원도향토문화공모(우수상) - 襄陽海村의 生活과 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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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883회 작성일 2009-03-04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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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학자 이 재 풍

Ⅰ. 導入

A. 地理的

양양(襄陽)은 동북아 극동 한반도 동해안 중북부 태백 준령 영동의 중심부에 위치한 해안, 산간지대로 동으로는 동해에, 서로는 인제군과 홍천군, 남으로는 강릉시, 북으로는 속초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에경∙위도를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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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은 강원도 대비 3.7%인 628.6㎢이며 임야 535,20㎢(85%) 농경지 58.6㎢(9%) 기타 34.8㎢(9%)로 경지율이 극히 낮고 취락 형성은 주로 산줄기의 공을 타고 이어지고 있으며 높고 낮은 산에 둘러싸인 천혜의관광자원의 보고인 산, 바다, 계곡을 고루 갖추고 연간 200여만 명의 국내외 관광, 피서객의 왕래가 있으며1읍, 5면, 124리 436반의 행정구역 편성 아래 인구 28,500여명을 포용하고 있는 전국적으로 볼때 매우 열세한 군세라 할 수 있는 악조건의 환경이고 지형지세는 40여㎞의 해안선 태백준령에 솟은 대청봉(1,708m)아래 오색령, 구룡령의 관통으로 동서의 교통이 원활하며 또 양양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남대천은 오대산 구룡령, 오색령 설악산에서 그 물줄기가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되는 장장 60㎞로서 실로 영동제일의 하천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남대천에 연어가 희귀하며 은어 등 많은 물고기가 서식할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하기도 한다. 기후는 연평균 12�C 강수량은 1,300mm이고 이곳 특유의 계절풍으로 일명‘양강지풍(襄江之風)’이란말도 나오는 바람도 많은 고장이기도 하다. 지명의 시작은 상고시대부터 있었으나 고려 고종 8년(1212)양주로 하다가 조선조 태종 16년(1416)에 비로소 양양(襄陽)으로 되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중국 호북성(中國湖北省) 한수연안(漢水沿岸)에 위치한 그곳 양양과 아름다운 자연과 지리적 환경이 흡사하다 하여 부르게 되었다는 한서지리지 완벽국사 대사전 기구회첩의 기록을 찾아 볼 수 있겠다.

이제, 서울대 박물관팀에 의해 1981년 손양면(巽陽面) 오산리(鰲山里) 쌍호변(●湖●) 선사유적의 발굴로 세계적으로 고고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유구한 선사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주로 지명의 변천과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 기술하겠다. B. �史的지명의 시작은 상고시대부터 있었으나 고려 고종 8년(1212) 양주로 하다가 조선조 태종 16년(1416)에 비로소 양양(襄陽)으로 되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중국호북성(中國湖北省) 한수연안(漢水沿岸)에 위치한 그곳 양양과 아름다운 자연과 지리적 환경이 흡사하다하여 부르게 되었다는 한서지리지 완벽국사 대사전 기구회첩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겠다. 이제, 서울대 박물관 팀에 의해 1981년 손양면(巽陽面), 오산리(鰲山里), 쌍호변(●湖●) 선사유적의 발굴로 세계적으로 고고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유구한 선사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주로 지명의 변천과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 기술하겠다

● 선사시대

1) 구석기 유적(20만~50만년전), 신석기 유적(BC6000~7000), 초기 철기시대의 주거지(BC2000~2500)가 손양면 쌍호( 湖)변을 중심으로 도화리, 오산리, 가평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2) 고인돌 유적지(BC500~600)가 서면 범부리에서 발굴됨으로써 실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알 수 있겠고
3) 상고시대에는 동예, 한무리에 이르러서는 낙랑군 탄렬현(�浪郡呑列懸)으로 소제(昭帝)때에는 동부도위로 그리고 고구려에 이르러는 익현현(翼峴縣) 또는 이문현(伊文懸)으로 불러 왔었다.

● 신라시대

신라통일이후 문무왕 8년(668) 익령현(翼嶺懸)으로 그후 수성군영현(守城郡�縣)이 되었다.

● 고려시대

성종 14년(995) 10도를 정할 때 삭방도(朔方道)에 속했으며 거란병의 침공을 방어한 공으로 고종8년(1221) 양주방어사로 승격되었다가 고종 44년(1257) 몽고병에게 강참한 사건으로 덕령감무(德�監務)로 강등되기도 했다.

● 조선시대

태조4년(1395) 강릉교주도가 강원도로 개칭되는 가운데 그 후 태종16(1416)에 이르러 비로소 양양도 호부(일명 峴山)으로 되었고, 광해군 10년(1618) 무오사화로 현(縣)으로 삭강되었다가 인조 원년(1623)에 부(府)로 회복되었으나 재차 역난으로 인조 6년(1628) 현(縣)으로 삭강되는 비운을 맞기도했었다. 그러나 한때 원주의 한 여인의 강상죄(綱常罪)2)로 강원도의‘원(原)’을 없애고 양양(襄陽)의첫 자를 따서 강양도(江襄道)로 부르기도 했었다.

● 근∙현시대

고종 32년(1895) 지방제도의 개정으로 양양군(襄陽郡)이 되었고, 반면 간성군은 폐지되어 죽왕면, 토성면이 본군에 편입(1919)되었다. 8.15해방과 더불어 38선 획정으로 남북이 분단되는 시점에 현남면의 전부가 서면, 현북면의 일부가 38이남 임에 강릉 군에 속하게 되었다(1945) 그후 6.25전쟁(1950)으로 38선이 무너지고 수복이 되어 1951. 4 군자치위원회 구성으로 그해 7월 4일부터 군정(軍政)이 실시되었다가 수복지구임시조치법의 설정에 따라 1954.11.17 현남면은 명주군에 현북면 서면 일부가 환원되어 1읍 7면으로 되었다. 5.16군사혁명 이후 1961.1.1 행정구역개편으로 속초읍이 시로 승격 분리됨은 물론 죽왕면, 토성면은 고성군에 편입되는 반면 현남이 다시 환원되어 6면이 되었다. 그후에도 수차례의 법개정에 따라 지역의 일부가타시군으로 편입되고 군내 일부지역도 조정되어 1읍 5면으로 1989.1.1자로 되었다.

C. 精神的

가 . 선사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고장

BC6000년전 선사문화유적지로 밝혀져 세계의 고고학계에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우리고장은 고구려의 동쪽변경에 익현현(翼峴縣) 또는 이문현(伊文懸)으로 편제되었고 5세기 중반이후 통일신라의 변방일대는 익령현(翼嶺懸)으로 동산현(洞山懸)과 함께 수성군(守城郡)의 속현(屬縣)된 때도 있었으며 고려에 들어와서는 양주(襄州)에서 덕령감무(德�監務)에서 다시 양주(襄州)로 복호(�號)되기도하였고 조선 태종 16년(1416)에 이르러 양양(襄陽)으로 개명하였고 고종 22년(1985) 양양군(襄陽郡)으로 개칭되었다. 8.15해방 이후 38선 획정으로 우리 고장은 일부 면을 제외하고는 38이북지역임에 공산치하(共産治下)로 5년간 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수복되어 군정(軍政)(1951)에서 행정권이 이양(1954)되었고, 1989년에 1읍 5면으로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3)

나. 국난 및 재난을 슬기롭게 극복해 낸 고장

1) 국난극복

고려 고종 8년(1212) 몽고병이 양주부(襄州府)까지 침공하였을 때 항몽방어 태세가 사전에 충분히 구축되었기 자랑스럽게 격퇴시킴으로 양주방어사(襄州防禦使)로 승격되었고 고종44년(1257) 몽고병의 재침이 있을때 강참(降參)한 사건으로 덕령감무(德�監務)로 강등되는 비통한 사실도 있었으나 원종 원년(1260) 지양주사(知襄州事) 로 다시 승격되기도 하였고, 이런 역사의 영욕 속에 그래도 자랑스런 사실이 있게 된 것은 양주성의 축성, 인구민보, 봉수대와 같은 방어시설을 사전에 관민의 합심으로 이루었기 때문이다. 조선조 성종21년(1490) 오늘날의 해군기지인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이 양양읍 조산리로 강릉안인에서 이전, 「대포영」으로 설치하였으나, 인조4년(1545) 혁파되기까지 수군기지로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동해묘(東海廟)에 춘추(春秋)로 조정에서 내려 보낸 향촉으로 국가적 제례행사를 거행하였던 것이다.

2) 수재복구

다음 몇 차례의 재난이 있었으나 그 중 특히 철종11년(1861) 윤3월에 가옥 5백여 호 이재민 3천여명을 낳게 한 설악산 동쪽 동해안 일대에 불의의 대형 산불로 인한 화재와 병자년(1936)의 수해(水害)로 584명의 사망자를 내기도 한 대홍수도 있었고, 최근 년에 전답이 연 36시간의 940mm의 폭우에 가옥 135호, 선박유실 102척 등 큰 손실을 가져 왔을 때 제8군단(軍團)의 지원으로 군, 관, 민의 혼연 일체 속에 복구가 빨라 그 이듬해 대부분 완료하였다.

다.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정신이 강한 고장

우리 고장 3.1만세운동은 서울탑골공원에서 시발된 지 한달 뒤인 4월 4일 양양 장날을 기하여 4월 9일까지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거군적 시위로 전개되었으며 당시 중심인물로는 이석범, 조화벽(당시 호수돈 여학교 학생)으로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입수, 이곳까지 가져와 제작보급에 앞장섰었고, 당시 시위로 순국한사람은 12명 복역은 73명, 태형은 1,230명이었고 보복이 두려워 숨어서 요양 및 치료자를 포함한다면 더 많은 희생의 통계표가 작성될 것이다.

라. 自由守護(反共)와 統一意志가 왕성한 고장

감격의 8.15해방과 더불어 획정된 마의 38선으로 공산치하가 5년간 실시되는 동안 민일당 사건(民一堂事件), 반공의거사건, 학생의거사건, 중학생 집단월남사건, 김일성초상화 소각사건, 호림부대, 서북청년회 활동의 반공투쟁사(反共鬪爭史)를 볼 수 있었다.

마. 鄕土社會구석구석 활기찬 터전으로 변모시킨 재건과 우수 새마을 고장

1) 수복지구

국군 및 UN군의 38선 돌파이후 1950.10.2 군민 스스로 먼저 군자치위원회를 구성하고 10.10에는 군내학교가 일제히 개교하였다. 뜻하지 않게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경선까지 진격한 우리 군인은 작전상 이유로 12월말 철수하게 되어 우리군민들도 피난하였다가 1951. 4 국군과 UN군의 반격으로 귀향한 이후 자치위원회를 다시 구성하여 행정을 펴다가 그해 7.4 군정행정법령(軍政行政法令)에 따라 3년 4개월 군정을 실시하다가 행정권 이양이 1954.11.17 있어서 대한민국품에 안기게 된다.

2) 새마을 운동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 새마을운동으로 우리 군은 우수 새마을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우수 사례를 갖게 되었고 한때 삼다군(三多郡)으로 즉 소 자랑, 송이 자랑, 자철 자랑(지금은 폐광)으로 평판 받던 긍지 높은 고장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바. 峴山學校設立으로 근대교육에 일찍 눈뜬 고장

고종44년(1906.9.8)(음 7.20) 총 4만향의 기름으로 현산학교를 설립하고 200여명 학생 수용에 수업료는 면제, 학용품은 무상지급 되었고, 교과목은 8개 교과목 중 음악, 영어, 체조 교과목은 선진적이라 하게 되며여기 설립자 남궁억의 교육사상인 자주독립, 근로정신, 남녀평등으로 한 이념의 교육 속에 그 후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요람이 되기도 한다.

사. 축제와 지방문화 행사가 해마다 열리는 전통문화예술의 고장

문화관광부지정 축제인 양양송이축제, 회귀어종인 연어를 테마로 한 양양연어 축제 그리고 전통문화 예술종합축제인 현산문화제 등은 지역의 홍보와 주민의 화합을 공고히 하게 하는 매체가 되었고, 그 외로 전국대상으로 해맞이축제, 그리고 군민의 화합을 전제로 달맞이 행사(음력 대보름)도 매년 개최된다.아. 상징물로서 나무는 소나무, 꽃은 해당화, 새는 백로, 고기는 연어로서 그 생물의 특징과 고장과의 충분한 관계성을 고려하여 지정하게 되었다.

D. 定義

우리 양양은 백두대간을 배경하여 동쪽으로 급경사를 이룬 지방으로서 굳이 마을형성을 구분한다면 전체면적의 약 84%를 차지하는 임야가 있는 곁에 마을, 산촌과 약간의 버덩을 끼고 있는 야촌 그리고 해안선 굴곡 따라 자리한 바닷가 마을 해촌으로 구분해 본다. 여기에서 굳이‘어촌’이 아닌‘해촌’으로 밝히고 싶은 건 수산업에 그래도 종사하는 사람들이 영서 같은 내륙지방에서 호수나 강가에서 민물고기만 잡아서 생업을 영위하는 사람과 달리 오직 바다만 바라보면서 생업을 이어온 순수 바닷가 어업인으로 표현하고자 밝히는 것이다.

E. 制限点

본 조사연구의 제한점으로서는 우리지방에 있는 현재의 포구 중심으로 역사성, 시대성, 문화성 그리고 생업의 수단과 방법에 초점을 맞춰 수립∙정리해 보고자하겠다.

Ⅱ. 展開

A. 海村形成

1. 始原

인류역사는 지구 창성 이래 수집, 채집생활을 거치면서 일정한 장소를 택하여 정착을 꾀하면서 이른바 定住生活이 열리게 된다. 이때부터 강가 평평한 들판을 보다 효능적으로 이용하는 농경 문화권을 형성하고 동시에 주변의 강, 호수, 바다에로 시야를 넓히고 돌리면서 소위 어로생활도 병행하게 되면서 생존의 수월성을 추구하게 된다. 특히 우리 고장에서는 오산리 선사 유적지가 발굴됨으로 해서 원양양인(原襄陽人)이 이미 BC6000년경부터 살아왔음이 증명되고 있겠다.5)그리고 영북권은 단조로운 해안선에다 인구밀집도가 극히 미약해서 항만발달 또한 열악한 탓에 여건상 오늘에 이르기까지 해촌생활 환경이 그리 여유 있고 쾌적하다 보기엔 어렵겠다. 석호가 오산리 선사유적지 부근에‘쌍호’가 있겠으나 현재로서는 형태만 있을 뿐 그 기능은 전혀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다만 현남면‘매호’는 아직도 충분한 호수로서의 그 기능을 감당하고 있다. 이 같은 현재의 해안선이나 석호는 후빙기 해면 변화로(약 7,000년 전으로 추산)형성되면서부터 그 영향을 받아 상승하였기에 이른바 융기율이 매우 컸다는사실도 알 수 있겠다.

2. 背景

위에서 약간 언급한 것처럼 우리고장의 해안선은 태백산맥의 동쪽으로 급하게 기운 관계로 들고 나옴이 그리 심하지도 않음은 물론 그 구조가 심히 단조롭고 그 길이 약 39.5㎞밖에 안되고 부속도서로서는 3개가 있겠으나 무인도이며 어떤 섬으로서 기능자체도 기대하기 힘든 편이다.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그래도 섬다운섬은 현북면 기사문리 앞바다 즉 38선 휴게소에서 바라보이는 일명 새 섬이라 하는 조도와 현남면 인구리 앞바다의 암초(3개의 암초군 형성), 그리고 현남면 남애리 암초(바위)를 꼽을 수 있는 실정이겠다. 기상 관계는 인근 지방의 것을 참조해 보면 연간평균 기온 13.1�C, 강수량 1442.7mm 풍속은 2.3m/sec, 증발량은 1216.1mm라 하겠다. 또 바다 밑 환경은 서해에 비해 퍽 깊은 바다이라 무려 3,000m 되는 곳도 있겠다. 그 까닭은 한반도 동해안에서 급격하게 푹 깊어지며 해안으로부터 7㎞바다 밑은 약 1,000m정도가 되고다시 말해서 지질학적으로 살펴본다면 현재 태백준령의 높은 곳은 1,500m 솟아났다면 바다 바닥은 3,000m까지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해는 평균 수심이 약 1,700m이고 이로 인하여 대륙풍 발달이미약한 반면에 동해 중앙부에는 얕은 해저언덕인「대화퇴(뱅크)」가 발달하여 좋은 어장의 조건을 가졌다 할수 있겠다. 그 밖의 일반적 상황을 밝히면 대략 다음과 같겠다. 또 우리고장의 해촌 실태를 살펴보면

1) 국가어항 : 남애, 수산
2) 지방어항 : 동산, 물치
3) 어촌정주어항 : 전진, 후진, 기사문, 오산동호, 광정, 하광정, 인구

그리고 어업에 종사하는 가구는 532호이고 인구는 1,502명, 어촌계는 13, 어촌계원은 405명이고 조합원은 553명이 되겠다. 어선세력을 살펴보면 총 어선 348척에 총 1,121톤에 평균 3.2톤에 해당되는 것인데 그중에 동력어선은 340척(1,117톤)이 되겠다. 그 밖에 어업기반시설로는 위판장시설 8동 급유시설 1개소, 어업인 복지회관 3동(인구, 기사문, 물치항)이고 활어회센터 2개소와 어업 정보센터는 현재 남애에만 설치되어 있겠다. 9) 또 어업권을 살펴보니 정치어업은 24건에 477ha, 양식어업이 13건에 104ha이며 수산가공품은 942톤인데 주로 냉동품이 되겠다. 이어서 어획량을 소개하면 어류가 1,029톤, 갑각류가 33톤, 연체동물 278톤, 기타 134톤이나 강원도나 전국적 수준으로 보기에는 매우 약한 편에 속한다 하겠다. 수산물을 살펴보면 강원도 해안선 고성군 북쪽 끝에서 삼척시 남쪽 끝자락까지의 길이는 약 236.3㎞이며 옛날에 서식하던 생물을 신증 동국여지승람을 참조하니 다음과 같겠다. 즉

∙ 어류 - 대구, 송어, 연어, 도루묵, 황어, 방어, 고등어, 광어, 농어, 쌍조어
∙ 갑각류 - 전복
∙ 패류 - 홍합(이곳에서는‘섭’이라 부르기도 함)
∙ 연체동물 - 문어
∙ 수산동물 - 해삼
∙ 해조류 - 김, 미역을 들 수 있겠다.

오늘날 수산물로서는 어류 - 가자미, 꽁치, 학꽁치, 넙치, 도루묵, 대구, 감성돔, 멸치류, 명태, 방어, 복어, 숭어류, 까나리, 연어, 임연수, 쥐치류, 청어, 새우

∙ 갑각류 - 전복, 골뱅이
∙ 패류 - 홍합, 일반조개
∙ 연체동물 - 문어, 오징어
∙ 해조류 - 미역, 김 등을 들 수 있겠다.
∙ 수산동물 - 해삼

3. 해촌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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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生活環境

1. 漁撈活動

보편적으로 어로작업을 위해 바닷가 뱃머리에 일단 나와 서서 그 날의 기상을 소위 경험에 의한「觀天望氣法」으로 출어하게 된다. 오랜 경험을 가진 나이 많은 어민(가급적 어부란 말을 안 쓰려는 뜻에서)이 한참동안 사방을 두루 보게되면 산 밑의 구름의 형태라든지 하늘과 수평선 부근의 현상을 면밀히 관찰하고 나서 출어를 결정하게 된다. 정말로 심사숙고한 상태의 결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하겠다. 이때 관찰하는 한 예를 들어 본다면 어느 방향에서 어떻게 바람이 불어 온지를 보고, 몇 시간 뒤면 구름의 위치와 방향을 예상하고서는 물고기의 이동 상태를 파악하기도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지상에서의 동식물의 현 상태를 보고 예측도 해 본다는 것이다. 더욱이 동해안은 단조로운 관계로 비교적 바람과 파도도 사나울 수도 있기 때문이겠다. 바다에 나가서도 항상 수평선 멀리 멀리 보이는 산마루나 산 밑을 보고서 이상 유무를 재차 확인하면서 순간적 판단을 게을리 하지 않고 항상 긴장된 준비상태로 작업에 임하게 하여 순조롭게 일과를 마치고 귀항하기만은근히 비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하겠다. 그래서 어떤 신앙심의 발로가 일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해촌의 신앙에 대하여서는 뒤에 기술하기로 하겠다. 근∙현대에 들면서부터 어업기술의 개발과 어장의 새로운 개척으로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특히 1921.6. 14 조선총독부 강원도령 제 5호에 의거 강원도 수산시험장 규정의 공포를 보게 된다. 이 같은 수산 시험장은 바로 어업기술 향상과 어장개척의 구심적인 역할 기능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1922~1929에 시험선을 매년 파견하여 자망, 유자망, 저인망 및 중층토롤을 이용한 고기잡이 시험에서 후일 명태어업의 주어구로 등장하게 된다.10) 그러나 기선 저인망이 동원되면서부터 강원도 자망업자는 치명적 타격도 받게 되었다. 아무튼 이와 같은 변화무쌍 속에 실로 연안의 수산업은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잠깐 옛날의 어족을 살펴보게 되면 여기 조선시대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어류 대략 다음과 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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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실록에 실린 수산물
어류 - 대구, 수어, 사어, 연어
패류 - 홍합
해조류 - 곽, 상곽, 곤포, 해조
기타(수산동물) - 문어
가공품, 기타 - 전

2. 漁具活用

강가나 바닷가 그리고 호수부근에 주거를 형성하면서부터 수산자원 확보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하게 되니 생활 속에서 자연히 생산기술 개발이 일기 시작되겠는데 그의 고기잡이 법을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겠다.

1) 刺突漁法- 자돌구 개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작살, 창, 찔개살로 고기를 보고 재빨리 찔러 잡는다.
2) 弓矢漁法- 고기를 향하여 화살로 쏘아 잡는다.
3) 釣어법 - 각종 낚시의 개발
4) 網어법 - 그물로 한꺼번에 많은 어획을 꾀한다.
5) 결합식 작살 - 짐승의 뼈, 뿔, 멧돼지의 어금니로 한쪽에 비늘을 세워서 고기를 잡는데 한번 물리면 쉽게 달아날 수 없게 한 방법
6) 曲釣針- 갈고리형, 교차 결합식 낚시에는 낚시 바늘과 낚시 추를 달아서 같은 곳에 있는 물고기까지 잡을 수 있게 함
7) 直釣針- 흘리개, 찌르개형, 면 결합식 곡추어로작업을 위해 일단 뱃머리에 나와 서서 그 날의 기상을 소위 경험에 의한「觀天望氣法」으로 출어하게 된다. 즉 어느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보고 몇 시간 후면 비를 몰고 올 것이고, 바다에 나가 바람과 구름의 위치와 방향을 보고 물고기 이동 상태를 파악하기도 했었다. 뿐만 아니라 지상의 동식물의 현재의 상태도 보고 예측하기도 했다. 동해안은 비교적 바람과 파도가 사납다 할 수 있기 때문일게다. 조선후기에 들면서부터 특히 청어와 명태가 많이 잡히게 되는데 이때 도구로서는 주로 자망과 거망(정치망의 일종)을 썼고 또 연승과 같은 그물어구와 낚시어구를 사용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3. 연안어로 작업선

1) 선박

● 범선(돛단배)

우리나라의 전통적 선박을 다른나라와 구분하여 부른다면 굳이‘한선’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특별히 논의하고자 하는 배는 범선(돛단배)이 되겠는데 다름 아닌 명태바리를 하는 것으로 규정 해 놓고자 하겠다. 그 크기는 길이가 약 13m(옛날 표현대로라면 40척), 무게는 약 1톤 내외로서 순수 목제로 제작된 선박이되겠다. 그 당시 배를 제작할 수 있는 용도의 목재를‘삼’이라 불렀으며 또 나무로 제작하였다해서‘木船’이라 하기도 하였다. 그 선상에서 어로작업에 필요한 인원은 보통 6명이 승선하여 각기 역할기능을 하게 된다. 먼저 항해에 임하는 위치는 노를 저을 수 있게끔 된 위치 배 양면에 적당한 간격으로 두 곳이 설치되어있고 매 뒷자리 중앙부에 선장의 몫으로 방향을 조정할 수 있게 된 위치로 구분하겠다. 그런데 그 노를 젓기에 보다 더 수월하게 도움을 주고자 배 위쪽에‘노 젓’이라고 하는 돌출부를 쇠붙이로 박아 놓았고 보다 좌우로 젓기에 불편을 최소화하고 속력의 가속화를 위하여 노가 밀리지 않도록 적당 길이의 노끈도 달아놓고 해서 적은 힘으로 충분히 진취력을 내게 하였다. 그런데 연근해 어로활동에서는 노만으로도 어장에로 쉽게 접근할 수 있겠으나, 명태바리와 같은 좀 먼 바다로 출어를 하게 될 때에는 포구를 벗어나고부터는 돛을 올리게 되는데 이것은 일종의 항해 속력의 기술이라 하겠는데 즉 부는 바람을 지혜롭게 피할 줄도 알고 또 가속에 이용할 줄도 아는 법과 밀려오는 크고 작은 파도의 방향과 높이를 보고서 물길을 잡아 앞으로 또는 서서히 회전하는 방법의 하나로 어떤 수월성속에 목노가리꺾태, 코다리(관대), 햇태, 석태, 반태 등 다양한 별칭도 듣게 된다. 또 명태의 특성은 몸은 따뜻하고 찬물을 좋아하고 조류따라 생활반경을 이동하면서 수심이 깊은 곳에서 서식한다 하겠고 성질은 급한 편이겠으나 꽁치보다는 못하다하겠다. 적 해역까지 무사히 속히 순조롭게 들고 날 수 있게 한 이용도구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명태바리와 같은 규모가 조금 큰 배에는 두개의 돛대를 꽂고 항해를 하게 된다. 앞쪽에는 작은 돛대, 뒤쪽(배의 중앙부)에는 좀 긴 돛대를 세워 꽂고 항해를 한다. 배 밑창으로 여러 용도의 칸을 개폐식으로 구분지어 놓아 선원의 쉬는 공간, 어획물의 적재고로도 이용하게 하였다. 돛단배는 일정거리까지는 노 저으며 항해 하였다가 돛을 이용하여 보다 빠르게 목적해역을 오고 갈 수 있는 무동력이었지만 그 당시로는 그래도 기동성을 발휘한 기물이라 하겠다.여기에서 잠깐 동해안의 배 모양을 소개하면 앞은 좀 뾰족한 편인 반면 뒤쪽은 뭉퉁한 편이 되면서 약간 올린 형체가 되겠다. 조선후기에 연안어로 활동 시에 주로 사용된 배는‘떼 배’가 되겠는데 이것은 여러 개의 원목을 다듬어서 평으로연결하여 노를 젓게 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떼배를 타고 사둘(일종의 쪽대그물채)이나 긴 장대로 바다 밑의 해산물을 채취하였다.
돛대의 모양은 전체적으로 윗부분은 좀 좁고 아래부분은 너른 광목천에 황토물을 들인 재료를 쓰는데 중앙에 세워 꽂는 돛대는 단단한 낙엽송으로 하고 광목에 가로지른 활대는 단단한 대나무로 그 배의 크기에 따라 균형 잡아 설치한다.
그리고 돛대는 기둥은 평소 내려놓을 수도 있고 활대로 된 광목천으로 된 바람맞이 감도 줄로 올리고 내릴 수 있게끔 간편하게 제작되어 어로작업에 불편을최소화하는데 까지 세심한 배려를 해 놓았다 보겠다. 여기에서 또 배의 부분별 명칭을 소개한다면 앞은‘잇물’뒤는‘도모’라 하였고, 그 배를 바다로 띄우거나 육지로 올리게 될 때 적은 힘으로 신속히 하고 지렛대 원리를 이용한 방법으로 하나인 배 양 밑에‘괘테’라고 하는 긴 나무를 바쳐놓고‘둔대’하 하는 보통사람 키 만한 길이의 나무로 올리며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는 가운데 육중한 배를 조금씩 움직여 오르내리게 하는데 이용하였다. 지금은 볼 수 없겠다.

2) 전마선

연근해에서 주로 노만 저으면서 작업하거나 이동통신 운반용으로 활용하던 소형의 선박이 되겠는데 그 길이는 대략 5m내외라 하겠다. 이는‘떼배’의 발전적 선박이라 할 수도 있겠는데 주로 이 작은 배로는 가까운 거리에서 긴 쪽대나 긴 틀이개를 가지고 해산물을 채취하는데 많이 쓰이게 되었다.더욱 창경바리에 적격의 배라 할 수 있겠다. 지금 동력선이 아닌 무동력선은 이런 작은 규모의 선박은 쉬이 해촌에서 볼 수 있겠다.

4. 어종별 어로장면

1) 명태바리

동해안의 어종은 비교적 다양하다하겠으나 그래도 최대어종은 명태를 꼽겠다. 우리나라 국민의 선호도를 보아도 명태를 먹는 것이 많은 편이고 아무튼 명태는 알, 내장, 아가미까지 먹을 정도이니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먹는 식품이라 할 수 있겠다. 명태는 동해안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실정이고 그 명태의 생존조건 중 수온은 0.2~15.C겠으나, 최적의 온도는 2~7.C라 할 수 있겠다.명태바리는 11월부터 시작되면 이듬해 2월까지 하게 되어있고 산란기는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이며 보통명태가 산란하자면 3년정도 성장하면 가능하고 명태가 한 번에 낳는 알의 수량은 대약 25만~40만개정도이겠다.
부화된 어린새끼는 수심 200m안팎의 바다에서 자라게 되며 2년 자라면 25~35㎝, 3년이면 35~40㎝, 4년 되면 40~50㎝, 5년이면 50㎝, 그 후 8년 동안 자라게 되면 그 크기가 60㎝이상까지 된다는 것이다. 명태는 생선, 냉동, 말림, 소금 절임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관처리 될 수 있겠고 생물인 경우에는 특히 겨울에 잡힌 것은 동태, 그물에서 잡힌 건 자망태, 낚시로 잡은 건 연승태, 건조된 상태에서는 황태, 먹태 등으로 불리어지겠다. 또 크기별로는 노가리, 소태, 중태, 대태, 왕태로 나타내는데 그 길이를 소개하면

대태 - 20㎝이상
중태 - 20㎝까지
소태 - 20㎝이하
노가리 - 12㎝이하

아무튼 크기 기준선은 대약 20㎝가 아닌가 하겠다. 시기별로 부르는 명칭은 도루묵 고기가 잡힐 무렵에 잡힌 명태는 은어받이, 동지 무렵에 잡힌 건 동지받이, 설을 쇤 다음에 잡히는 건 춘태라 한다. 그 밖에 애기태, 여기에서 낚시바리 즉 연승어로 활동을 집중적으로 열거해 보면 먼저 낚시바늘은 80㎝간격으로 약 250~300자루를 달게 되는데 그것을 대나무 가지에 차례대로 끼워놓는데 그것을 한초락 이라 부른다. 이렇게 초락에 끼운 낚시를 아낙네들이 함지 또는 초락(초래기)라 부르는 나무판에 양미리 또는 임연수를 잘게썰어서 낚시에 미끼를 끼워 그 판에 가지런히 정성껏 올려놓기를 거듭하여 보통 한 선원 이 한번 출어할 때 10초락(초래기)를 찍어서 승선하게 된다. 출어시간은 무동력선으로 행하던 그 시절에는 새벽 3시~3시반경에 그리 멀지 않는 어장으로 나가 부표를 띄우고 낚시를 이어서 놓고 나면 아침 07:00경 되겠다. 이때 선실로 내려가 11:00까지 잠도 자며 쉬었다가 다시 뱃전으로 올라와 낚시걷는 작업에 임하게 된다. 이렇게 작업에 임하는 동안 걸려 올라온 명태를 뱃전으로 떨구어 놓은 다음 미리 준비한 칡줄로 20마리씩(한두름) 꿰어 놓는다. 그리하여 오후 늦게 귀향하게 되면 그제서야 아낙네들이 뱃전에 나와 맞이하고 낚시그릇을 받아 이고 집으로 간다. 바닷가 생활에는 이런 일들이 하나의 풍습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새벽에 출어할 때 남편보다 아내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지 않고 물론 배웅하지 않는 것이 하나의 불문율 형식으로 내려오고 있겠다. 이렇게 헝클어진 낚시 초락을 집에 돌아와서 하나씩 풀어서 미리 준비된 나무에 초락 기준으로 잘 정리해끼워놓고 착착 물에 헹군 다음 다시 미끼 끼울 준비를 반복하고 있는 생활의 일면이 연속되고 있다하겠다. 이때 밝은 불을 해놓고자 카바이트 불을 준비해 놓았기에 여간 밝지가 않다. 전기 없는 시절의 하나의 개량되고 불편이 최소화 된 풍경이라 할 수도 있겠다.

※ 用語

∙ 1손 : 두 마리씩 꿰어 놓은 것
∙ 1두럼 : 20마리씩
∙ 1쾌 : 마른명태 20마리씩 싸리나무와 칡줄에 꿰어 놓은 것
∙ 1바리 : 100두럼(2,000마리)
∙ 1초락 : 명태 낚시를 약 80㎝ 간격으로 250~300개 단위로 줄에 달아 굵은

대나무에 위로부터 차곡차곡 꿰어 놓은 상태 또는 함지로도 그 단위를 표시하기도 함

2) 멸치후리

후리는 그물로 잡는 어업의 한 방법으로서 보통 어로활동은 연안에서 봄에서부터 늦가을까지 주로 행하여진다.대개 주업이 아닌 바닷가 마을에서는 가을철 농사를 어느 정도 맞춰 놓고 후리를 하는 것이 많다하겠다. 그리고 후리 어로활동은 해안지역이 바다에 모래가 깔려있는 곳에서만 가능하겠다. 부근 바닷 속에 암초가있다면 후리 그물을 치기 곤란하기 때문이라 하겠다. 우리고장에서는 아직까지 명맥을 계승하고 있는 마을은 동호리라 하겠다. 후리작업을 하기 위한 기본사항을 말씀드리면 명태바리 배와같은 크기의 배가 있어야하고 승선인원은 기본적으로 10~15명이어야겠다.각기 임무가 있게 되겠는데 먼저 후리작업을 위해서‘망지기’가 있어야겠는데 망지기가 있을 높다란 망대를 바닷가 잘 보이는 곳에 설치를 하게 된다.그러면 망지기는그 곳에 올라서서 바다를 응시하면서 멸치떼를 관찰한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고기떼가 검붉게튀며 물결을 이는 걸 보면 재빨리 신호를 보낸다. 신호방법은 소리치는 방법, 징과 같은 물체를 두들겨 소리내어 알리는 방법도 있다. 그래서 그 소리를 듣고 선원들은 뱃전으로 모이게된다. 이때 선장(사공)이 배를 내리라 띄우라 급히 외치면 일제히 움직인다.

멸치 작업 시기가 되면 배는 미리 바다에 띄워 놓았기 밧줄만 쉽게 당기면 오는순서대로 승선이 가능하겠다. 이렇게 승선해서 바다에 나가면 때에 따라‘살주’라는 고기몰이를 담당하는 선원이 미리 준비해놓은 주먹만한 돌을 던져 멸치떼가 더욱 집결하도록 유도하겠다. 이렇게 일정시간동안 최대로 모여졌다 싶으면 출어 할 때 한끝 줄을 뭍에 놓고 왔기에 600m나 되는 후리그물을 재빨리 멸치떼 에워싸면서 또한 끝을 뭍 쪽으로 들면서 잡아당기기를 신호를 하면 깃발을 휘두르면서‘당겨라, 빨리 빨리 당겨라’를 반복하면서 재빨리 움직이겠다. 이때 그물 속에 많은 멸치떼가 든 것을 감지하면 쪽대를 들고 아니면 대야 같은 그릇으로 멸치를 퍼서 건조를 위해 미리 펴놓은 바닷가 모래밭에 있는 가마니에 갖다놓고 고르게 펴놓아 마르게 한다. 그 기간은 한 일주일 된다. 이때 만선에 흥겨운 사공은 웃옷도 벗고기도하면서 흥에 겨워‘야 빨리 당겨라’외치게 되면 같은 일행들은‘어사 어사’‘지여사’하며 합창으로 화답하며 쉽게 힘들지만 고된 줄 모르고 열심을 다하게 된다.멸치후리 작업에 앞서 고사도 지내게 되고 바닷가에 돌아와 선원들을 내려놓고 다음 사공은 선원한 사람과 바다에로 나가 그물의 이상유무를 파악한다. 그 까닭은 많은 멸치 떼가 들게 되면 그 물이 터질 경우도 있기 때문인데 만약 그물이 군데군데 보수할 곳이 발견되면 다시 손질을 해서 다음 작업에 지장이 없도록 사전 준비에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겠다. 정말로 만선되었을 때의 모두의 기쁨은 대단했었다한다. 만선기를 꽂고 덩실덩실흥에 겨워 즉석 소리로 매겨 노동요로 탄생하는 것이다. 멸치 푸는 쪽대는 산대라 부르기도 한다. 그때 소리를 하게 되는데 그 소리를 산대소리라 하겠다. 아무튼 한 일주일 걸려(청명한 날씨를 만나면) 건조한 멸치를 가마니에 넣어 여러지방으로 팔려 나간다. 때로는 동네 사람끼리 후리그물을 쳐서 얻게되는 고기들은 함께 참여한 모두에게 고루 나누워지던 해촌의 훈훈하고도 넉넉한 인심도 엿볼 수 있었기도했다.

※ 用語

∙ 연승 : 한 배에 승선한 선원의 미끼 끼운 낚시 초락을 이어 어장에 내려 명태 잡이 하는 낚시 이은 상태
∙ 자망 : 고기떼가 지나는 곳에 길게 그물을 쳐서 물고기가 그물코에 걸리게 하여잡는 그물
∙ 저인망 : 바다 밑 바닥을 끌고 다니면서 고기잡이하는 그물
∙ 건착망 : 고기떼를 수직으로 둘러막고 밑에 달린 금속고리에 꿴 밧줄을 죄어서 차차 오그라들게 하여 배옆에 바싹 붙이고 고기를 퍼내어 잡게 만든 그물
∙ 정치망 : 일정한 곳에 쳐 놓은 그물
∙ 어량 : 물을 한군데로 흐르도록 막고 그곳에 통발을 놓아 고기를 잡는 장치
∙ 수괴 : 바닷물 온도와 염분, 빛깔 따위의 특성에 따라 나눌때에 거의 균일한성질을 가진 바닷물 덩어리
∙ 염분(鹽盆)=염부(鹽釜) : 바닷물을 고아 소금을 만드는 큰 가마
∙ 浦口: 배가 드나드는 개의 어귀
∙ 港口: 바닷가에 배를 댈 수 있도록 시설을 해 놓은 곳
∙ 漕運: 해운항로
∙ 津: 나루
∙ 渡: 나루터, 물 건너감
∙ 浦: 개펄

3) 창경바리

근∙현대 전통적 어법 중 하나로서 옛날에는 수경이 없기에 바닷 속 작업을 위해보다 밝게 물속을 들여다보기위해서 고기 애기름(간유)을 몇 방울 물위에 떨구어 놓으면 잠깐 밝게 볼 수 있었기에 그런 방법을 지혜롭게 활용해왔으나 그 후에수경을 이용한 어구를 고안해 냈던 것이다. 그 창경의 제작은 4개의 송판을 사다리꼴 모양으로 위는 좁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게 하여 맨 밑 부분에 유리를 바착한 기구라 하겠다. 수경을 단 창경의 길이는 약 50~60㎝정도라 할 수 있겠고 그 창경 윗부분 한쪽면을 좀 파이게 하여 양 끝에 굵은 끈을 팽팽하게 매어놓고 그 주위를 입에 물고 작업할 수 있도록 헝겊을 몇 겹 감아 놓았다. 그리고 그 창경이 작업 중 멀리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끈을 달아 작업하는 곳에 고정으로 묶어 놓을 수 있게끔 하였다.창경바리 배는 작은 전마선으로서 바다 작업장에 나갈 때 까지는 긴 노를 저으며 나갔다가 작업장에서는‘가이노’라 하는 작은 노로 자리에 앉아서 준비된 위치에 노를 끼워서 빙빙 물살을 가르게 된다. 그러면서 수경 즉 창경으로 물속을 들여다 보면서 어로에 임한다. 주로 얻어지는 수산물은 철따라 다르겠지만 미역, 해삼,바위틈의 전복, 조개, 문어, 고기등을 그에 필요한 작업도구를 활용하게 된다. 그 어로도구를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겠다.

작살, 창 - 고기 찌르기
장대 - 쪽대나 낫 다는 것으로 활용
쪽대 - 해삼, 전복, 성게 뜨기
꼽쟁이 - 문어잡이용
미역낫대 - 해초류 채취용

4) 오징어 잡이

오징어는 동해안에서 서식하는 난류성 어종으로서 수온 4~27�C가 적정생활 온도이고 연간 어획고가 명태 다음으로 연간 한때 26만 톤까지 되는 절대 여름철소득원이 되었다. 산란기는 5월~8월이 되겠고 오징어가 한창인 시기는 7월에서부터 9, 10월경인 즉추석 때까지라 할 수 있겠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고정된 가로막대에 늘여뜨린 양갈래 줄에 비늘없는 오징어 낚시를 한쪽에 3개씩 총 6개를 세로로 매어 달아 바닷물 속에 일정 깊이 까지 떨어뜨려 위 아래로 손놀림을 해서 오징어를 낚아채어 잡기도 한다.이때 선장에는 환한불을 밝혀 놓았다. 출어해서 작업하는 시간이 오후(점심때 지나)에 나가서 어장에 도착해서 어두워지면 오징어 떼 몰려오면 낚시를 드리워 낚아채곤 했던 것이다. 이때 낚아채어 뱃전에 떨어진 오징어는 먹물로 자기방어를 하기도 하며 괴성을 내기도 일쑤이다. 지금은 집어등을 밝혀 육지에서 수평선 저 끝까지 바라볼라치면 해상에 한도시가 형성된 듯 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장관을 일으킨다 하겠다.이튿날 새벽, 작업을 마치고 귀향하게 된 활복하여 모래밭에 길게 장대를 박고 걸고 줄도 늘여뜨려 놓고 생오징어를 걸어 놓는다. 며칠동안 청명한 날씨를 만나게 되면 품질 좋은 마른 오징어로 20마리 기준으로 묶어 시중에 내기도 한다. 오징어종류는 세계적으로 460여종이 되겠고, 우리나라에는 80여종이 있겠는데 우리고장에서 주로 잡히는 오징어는 살오징어와 갑오징어 등 8종정도 되겠다.

5) 손 꽁치잡이

우리나라 전통어법중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보통작업은 6월 하순에서 7월 사이에 이루어지겠는데 먼저꽁치를 유인할 수 있는‘뜸북이’란 해초를 뜯어 모아 장방형으로 엮어서 배 옆구리에 띄워 놓는다. 그러하면그 위로 산란기를 맞이한 꽁치떼가 좋은 보금자리로 착각하고 모여든다. 그러할 때 꽁치를 쥐어 잡기만 하면되는 아주 쉬운 어법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때 보다 많은 어획을 올리기 위해서 먼저 꽁치 한 마리를 붙잡아손가락 사이 끼워가지고 그 해초위에 손을 담그면 더 많은 꽁치 떼를 유인할 수 있다는 말도 있겠다. 그물로잡는 법이 보급되기 전까지 이와 같은 맨손잡이 어법으로 어획을 올려 생계유지에 도움을 가져오게 되었다. 우리고장 뿐만 아니라 이런 어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어로활동이 이제는 전설로만 남게 되었다.

6) 도루묵 잡이

동해안 겨울 연근해에서 그물로서 포획하던 어종이다. 옛날에 하도 많이 잡히어 천대받던 고기로 기억된다. 심지어 부둣가에서 상거래를 할 때 마리수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삽으로 푹푹 퍼서 어름치고 계산하였다. 그러나 상인들은 근년에 들어 자동차(소형화물차)에 가득 싣고 영 너머 지방이거나 아니면 같은 군내라 할지라도 산골마을로 가지고 판매하여 짭짤한 소득원이 되기도 했었다. 70년대부터 그처럼 흔하던 도루묵도 주위환경 변화에 따라 명태처럼 급격히 어획량이 감소하게 되는 데가 어떻게 일본에 수출할 길이 열리며 그값도 좋은 것은 물론 진귀한 고기로 부상하게 된다. 마치 전설에 나오는 도루묵이 은어가 되고 은어가 도루묵이 되는 격이 되기도 했다. 수출 이후로부터 국내에서도 조리해서 먹는 법도 많은 사람들이 다른 어종 즉 고급 어종 취급하듯 겨울철이면 도루묵에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주점에서 구워먹고 찢어 먹고 볶아먹는 풍경이 심심치않게 벌어지게 되었고 가정에서도 천대받던 고기가외국에 수출까지 하게 되니 동시에 귀히 여기게되었다. 이에 대한 전설은 다음장으로 넘기기로 하겠다. 그 밖에 바닷고기를 소개하면 청어가 내가 어린 시절에는 굉장히 귀한 어족이었기에 손님이 온다던가 아니면 가정에 특별한 날이 되면 장터에 가서 사다가 생선을 석쇠에 소금 뿌려 굽는 것이다.그런데 그 냄새가 이웃까지 번지게 되어 청어 굽는 집에 특별한 일이 있는 줄 알고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정어리는 지금 멸종하다시피 되었는데 일제 시대에는 동해안 어지간한 마을이면 정어리 포획과 정어리 기름 짜는 공장이 많았다. 바로 그 기름이 일제의 수탈용으로 전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무분별하게 많은 정어리 떼를 남획하였기 지금 보기 힘들다는 얘기를 해촌가의 화제로 곧잘 등장하고 있겠다.아무튼 고기는 규정대로 포획하며 양식도 잊지 말아야 할 교훈으로 남게 한다.

7) 미역채취

미역은 대개 봄철 3월~5월 사이에 채취 작업을 하게 되는데 채취방법은 전마선을 혼자 타고 나가 긴 장대에 낫을 부착하거나 감 장대와 같이 사이에 끼워 빙빙돌려 뜯어 올리는 방법도 있겠다. 대개는 2~3 사람이 1조가 되어 미역틀이로 감아올리거나 톱날 같은 끌개살로 바다속에 미역바위에 넣고서 멀리 끌고 가면서 채취하는 방법도 있다하겠다. 이렇게 채취한 미역은 뭍으로 들어와서는 약 1m크기의 형체로 가마니에 널어 건조하여 20장씩 한축으로 하여 묶어 놓게 된다.

∙ 낫대각 - 창경바리로 통해서 낫으로 미역을 한포기씩 뜯어 올린 미역
∙ 긁각 - 2~3명이 1조가 되어 톱날과 같은 기계로 된 끌개살로 뜯어 올린 미역
∙ 절각 - 갈쿠리 같은 것으로 물속으로 던져 넣어 뜯어 올린 미역 뿐만 아니라 높은 파도가 혹 일 때이면 바닷가 모래밭에 갖가지의 해초가 뜯기어 밀려오게 되는데 긴 줄에 갈쿠리를 매어 던져 걸리는 갖가지 해초 중에서 미역만 골라내는 방법이거나 긴장대에 갈쿠리 같은 모양의 나뭇가지를 매어 미역만 건지는 것이라든지 이때 재수좋게 심퉁어, 문어도 횡재로 얻는 경우도 있다는 얘기도 했다. 정말 한때의 바닷가의 진 풍경의 연출이라 할 수 있겠으며 더욱 60~70년대 경제 사정이 그리 좋지않을 때 해촌 경제에 다소나마 도움이 되게 하는데 한 몫 톡톡히 했다 하겠다.

8) 돌김채취

겨울날 아낙네들이 바닷가 바위에 돋은 돌김을 채취하여 먹기 좋은 김을 생산하게 되는데 먼저 작업장에 나가기 위한 준비과정을 살펴보면 두툼한 옷차림에 바위에서 쉬이 미끄러지지 않고 작업에 용이하도록 특별신발에 유념하게 되는데신발은 짚신을 신고, 가는 새끼줄로 바닥에서 발등을 빙빙 감아서 걷는데 편하게 한다. 그리고 김을 채취할 수 있는 도구로서 바구니와 바위에 돋은 김을 긁을 수 있는 전복껍질이거나 쓰다버린 놋 숟가락도 이용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바닷가 바위를 돌고 돌아 긁어모은 물김을 집으로 가져와서는 먼저 큰 함지 같은 그릇에 물을 담고서 일게 된다. 이때 이는 까닭은 이물질을 고른다던가 긁을 때 함께 붙어온 바위부스러기를 골라내는 작업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부드럽게 손질한 김을 미리 준비된 약 20~40㎝크기의 김발을 물이 잠긴 큰 그릇에 띄워놓고 적당량의 김을얹어 골고루 살살 발에 펴게 하여 건져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발 그대로 양지바른곳에 한 장 한 장 건조하여서 나중에 떼어 20장 기준으로‘첩’으로 하여 짚 또는 노끈으로 묶는다. 한첩 한첩 묶음을 10단위로 해서‘한 톨’이라 하여 겨우내 짭짤한 가외소득을 올리기도 했었다. 김을 말리는 과정은 옛날 닥종이를 제조하는 과정과 연관해 보면 쉬이 이해가 되리라 보겠다. 돌김을 부업으로 하는 활동은 비단 해촌의 아낙네뿐 아니라, 인근마을까지 부인네들의 특별한 가내 보탬의 역할을 톡톡히 해 왔다 하겠다. 지금 우리고장에서는 그리 흔히 하지 않고 몇 마을 부녀자들만 하고 있는데‘재래김’으로 값도 그리 만만치 않으리라 보겠다. 돌김 못지않게 해초를 김 채취하는 방법과 거의 똑같게 하여 긁거나 또는 베어다가 잘 헹궈 김발에다 바로 뜨는 것도 있겠으나‘얼개미’를 물함지에 뒤집어 띄워놓고 살살 손으로 피어가며 말릴 수 있도록 펴놓되 좀 억센 관계로‘고르매’자반은 두텁게 하고‘파래’자반은 김발에 같은 요령으로 건조하여 20장 단위를 한 첩으로 하여 짚(지금은 포장 끈)으로 중간허리를 묶어 장에 나가 팔거나 두고두고 밥반찬 감으로 입맛 돋우는데 한 몫 톡톡히 차지하게 하였다. 그밖에‘보리해둥’‘진저리’‘청각’같은 해초도 채취하여 무침 또는 된장,막장, 고추장에 깊이 넣어 장아찌로 식품화하여 특히 도시락 반찬감으로 인기가 아직도 대단한 줄 안다.

5. 물고기에 얽힌 속설

1) 명태

함경도 明川에 살던 太씨 성을 가진 어부가 바다에서 잡은 귀한 이름도 모르는 관찰사에게 고기를 올린다. 이 물고기를 먹은 관찰사는 맛도 좋고 해서 이름을 물어보나 없다기에 명천의 태씨가 잡은 고기라 해서 첫머리 글자를 따서‘명태’라 지어 내렸다 한다. 뿐만 아니라, 이 고기는 그때 형편상 여러 식량 못지않게 이용되었음은 물론 심지어 눈이 어두운 사람이 먹으면 눈이 다시 밝아진다 해서 밝을‘明’자를 붙여 명태라 불리게 되었다는 얘기도 전해오고 있겠다. 아무튼 명태는 하나도 버림 없이 다 식용화 할 수 있는 고기로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름도 다양하겠다. 이는 앞에 열거하였기 생략하고 이에 얽힌 얘기 몇 가지도 덧붙여 보게 되면

● 창란은 당숙에게 보내고 명란은 외숙에게 보낸다.
● 눈이 흐린 사람은 눈을 밝게 해 달라는 뜻으로 국을 끓여 먹는다.
● 소원 성취를 위해 쓰이기도 했다.
∙ 마른명태를 대문 문설주 위에 달아 놓고 복 받기를 기원하는 풍습
● 새 차를 사도 산사람의 무사운행을 위해 태실에 마른 명태를 묶어 차안에 특히 트렁크나 큰 차인 경우에는 핸들 쪽에 고이 달아놓는 풍경

2) 도루묵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피난길에 나섰는데 한 어부가‘묵어’라는 고기를 진상하게된다. 하도 맛있게 그 고기를 먹은 임금께서 고기 이름을‘은어’라 하사한다. 그러나 뒷날 선조가 피난길에서 그처럼 맛있게 먹던 그 맛을 되찾지 못하게 되므로 그때‘도루묵’이라 부르도록 했다는 전설 사람의 심리가 참 이상하다. 국내에서 소비 될 때에는 돌아다보지도 않고, 실정에 맞게 요리개발은 아예 생각도 않다가 외국 수출되고 그 나라에서 여러 영양적 가치를 인정하니 그제서야“누가 먹으니 나도 먹어야지”하는 식으로 덩달아 먹는다는 건 퍽 우스운 일은 물론 우리들의 의식 또한 생각해볼 대목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3) 양미리

동해안에서 근년에 보기 드물게 많은 양미리가 잡히고 있어서 한 겨울 해촌 또는 수산물 시장 근처 먹을거리 좌판에 좋은 풍경을 수놓고 있겠다. 지난날 양미리 새끼를 봄철 후리그물로 살주가 돌로 모으며 작업을 하여 얻게 된어린 양미리를 뭍에 올라와서 미리 끓인 바닷물에 슬쩍 데치다시피 하여 발리거나, 가마니를 깔고 볕에서 잘 건조하여서 상품화 되었다. 요즈음은 그전 어로작업은 없고 늦가을부터 다 큰 양미리 떼를 그물로 잡아 소득을 올리게 되는데 정확한 명칭에 많은 혼란을 가져 온다. 즉 종, 속, 과, 목, 강, 문, 계와 같은 생물학적 분류체계에서는 양미리가 까나리인지 혼돈하고 있겠다. 아무튼 동해안에서는 그 본명이 까나리이든, 농어목에 있든 양미리로 불리어지고 있겠다.뱃전에서 수산시장으로 수산시장에서 각 가정 또는 전문 음식점으로 옮겨지면 삼삼오오 짝을 이루고 활활 이글이글 피워 오르는 화롯가에 앉던지 서서이던지석쇠에 되는대로 양미리를 올려놓고 굵은 소금을 훌훌 뿌려가면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혹 설익었더라도 정담을 나누며 먹는 그 자리가 진정 희희낙락의 꽃피는 삶의 동산으로 자리 매김하는데 큰 몫을 겨울 양미리가 차지했다 해도 그리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연안 밑바닥에서 서식하는 양미리는 그물로 포획하게 된다는 사실을 앞에 밝힌 바 있겠는데 그 양미리를보다 많은 어획을 올리기 위해서 그물추를 달아서 바다 밑 모래에 닿게 하여 모래 속에 숨어 있는 양미리를자극하여 이동을 가속하게 하여 그때 피하다가 그물코에 걸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 고기의 특성을 잘 이용하여 잡는 방법 중의 하나라 말할 수도 있겠다.

4. 수산물의 유통과정 형성

생존의 수단의 하나이겠으나, 해촌에서 얻어진 갖가지 수산물을 지금처럼 다방면의 경제구조가 형성되지 않은 그 시대에는 물물교환 형식으로 내가 생산또는 채집 그리고 잡아 올린 산물을 이웃마을로 이고 지고 가서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키며 살아왔다 하겠는데 우리나라에서 시장형성은 신라시대부터 시작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을 기억한다면 굉장한 역사를 가졌다하겠다. 바닷가 풍경을 더듬어 보면 최근 년까지 잡힌 고기를 두 마리씩 새끼줄에 아니면 짚에 꿰어 단위를‘한손’이라 했고, 어떤 때는 몇 마리씩 또 잔고기는 여러 마리를 단위를 하여‘바꿈이’를 해서 필요한 양식이거나생활필수품을 가져오는 유통구조 과정이 있었다. 특히 영동지방은 강릉을 생활권으로 잘 형성되었다 하겠으나 우리고장 같은 곳에서는 場市가 조선전기까지가 강릉중심으로 발달하였다는 것을 문헌을 통해 알 수 있겠고 우리고장에서도 근거리가 유통을 형성한 장날을 보니 양양읍내장이 4일, 9일, 물치장(강현면)이 5일, 10일, 인구장(현남)이 3일, 8일에 열리게 되어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겠고 오래전에는 산촌의 중심지로 서림(서면)도 장이 열렸다한다. 상상만해보아도 힘들었다는 걸 알게 된다. 영을 넘어서 몇 십리 길을 걸어서‘바꿈이’를 하였다는 걸 생각하니 그때 선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겠다. 좀 달리 얘기한다면 서림은 산간의 중심지는 틀림없는 것 같다. 38선 분할로 이남으로 되었을 때 서면 일부를‘신서면’이란 명칭 아래 수복되고 행정이양되기 전까지 한동안 독립 면단위로 지내왔음이 결코 우연이 아닌 사실로 생각해 본다. 여기에 잠깐 조업 중 얻어진 소득에 대한 기준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겠다. 선주가 3,5, 선장이 2,5, 기관장이 2,5, 낚시사공이 1,5, 평 선원 1을 차지하게 되는 그 배분기준을‘10’으로 하였다.

C. 생활문화

1. 풍습

1) 2월 영동(영동할머니 맞이)

영동의 세시풍습은 해촌 뿐만 아니라 농촌에서 지켜지던 전해오는 행사라 하겠는데 �登또는 영동으로표현하는데 영동에서는‘영동할머니’로 신봉하고 있겠다. 즉 2월초 하루날 바람이 심히 부는 날이면‘바람영동’이라 하였고 비가 오는 날이라면‘물영동’이라 하겠다. 속설에 의하면 바람영동에는 딸과 함께 오고 비 오는 영동이면 즉 물영동이라면 며느리를 데려온다 했었다. 이날 해촌에서는 명태와 무를 썰어 끓인 소위‘와재기’를 밥과 함께 장독대에 얹어놓겠는데 밥그릇에는식구대로의 수저를 꽂는다. 그러면 떡도 장만하게 되는데 그 떡 재료는 바닷풀인‘뜸북이’를 뜯어다가 삶아말리어 가루로 하여 쌀을 섞어 떡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빌기를“바람님 잘 잡수시고 우리 온가족 잘 되게 하옵소서”를 빈다. 2월 15일 바람님이 올라가시기 전까지 혹 이곳에서 음식이 들어오면 장독대에 먼저 진설해 놓았다가 그 후 집에서 먹게 된다. 그 외에도 매달 세시풍습이 있겠으나 특별한 것은 없고 그리 어로를 위한 사전준비하는 그물손질하기나 정월대보름 달맞이를 하며 그저 고기 많이 잡히게 해 달라는것과 무병장수를 달을 보고 빌었던 것이 좀 특별한 연중행사라면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지금은 해촌의 풍습도 작업과정도 옛날과 크게 변화하고 있기에 하나의 전통적 행사로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하겠다.

2) 걸립(乞粒)

당초 뜻은 마을의 공동기금조성을 위해 풍물을 울리며 마을의 집집마다 방문하면 한바탕 춤판을 벌리며 그 가정에게 복을 기원하는 뜻도 가지고 있겠으나, 점점 내려오면서부터 명절이 되고 정초가 되면 대개 정월보름을 전후해서 마을깃발을 앞세우고 청장년들이 가장도 꾸미고 풍물을 각기 나누어 들고 신명나게 치며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나면 방문하는 집에서 끝날 무렵 주안상을 장만하여 마당에 진설해 놓으면 우두머리가 또 축원을 하며 함께 즐기며 또 다른 집으로 옮기어 온통 온 동네 축제의 분위기 속에 마을의 안녕과 풍농, 풍어 그리고 나라의 태평성대 까지 기원하며 희희낙락하겠다. 마련된 곡물이나 현찰은 다시 정리하여 공동기금으로 유용하게 쓰이게끔 의논해서 처리하는 미풍의 계승이라 하겠다. 이 기회를 통해 특히 아낙네들이 바깥세상도 함께 보며 이웃간의 돈독한 화목을 더욱 다지는 복된 장면의 연출로 날로 좋은 소문나는 마을로 성장하는 계기 또한 충분하리라 보겠다.

2. 신앙생활

해촌에서의 신앙은 대단하겠다. 그 까닭은 생활터전이 목숨을 때로는 담보하면서까지 생업현장으로 들고 나야할 위기의 순간 이 보다 많다는 것도 하나의 까닭이될 것이다. 그러면서 아늑한 곳에 제단을 축성하고 아니면 오래된 나무가 있다면 어떤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면서까지 원시신앙으로부터 계승발전하고 있다 보겠으며 그러나 지금 해촌에도 기독교도 전파되어 신앙의 다양성도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라 볼 수도 있겠다. 이어서 우리고장에 특히 해촌과 관계 짓고 있는 묘와 제당 몇을 종합적으로 열거해보려 하겠다.

1) 동해신묘

최초설립년도는 정확하지 않지만「고려사」익령현조에 나타내기를「동해신묘」가 있다는 기록이 있겠고 즉 고려 공민왕 5(1356) 四海중 첫 번째로 동해신의 이름을 내렸다하겠다. 본래 강릉 안인포에서 조선 성종21(1490)수군만호영이 양양 대포(오늘의 조산)에 영을 이전하게 되므로 옮겨 지은 곳이 아닌가 보기도 한다. 당시 건물은 3동이었는데 허균이 1605년에 동해신묘 중수기를 작성하였고 그 후 남공철이 동해신묘 중수기사급명이란 비석을 1800년에 건립하여 잘 내려오다가 일제강점시기인 1908. 12. 26 일제의 훈령에 의해 신위를 뒷산에 묻고 철폐사실이 있겠는데 당시 군수인 최종락은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피를 토하고 사망 하였다는 것이다. 동해신묘의 위상에서 한 말씀드리면 당시 조정에서 춘추(2월, 8월)에 향촉을 내려 보내제의를 봉행 할 만큼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후 1993년 총320여평의 대지와 옛 모습과 같이 새롭게 개축하여 해마다 1월1일에 봉행하고 있겠다. 동해묘에 대한 위상을 좀 더 소개해 보면 동해 수호신으로 양양땅에, 서해의 수호신으로‘서해단’을 황해도 풍천에 남해의 수호신으로‘남해신사’를 전남 나주에 세우게 되었다. 북쪽에는 바다 없으나 함북 경원에‘두만강 신사’를 평북의주에‘압록강사’를 세웠다. 그런데 동해는‘廟’, 서해는‘壇’, 북쪽에는 두만강과 압록강에는‘●’로 이름 붙였다.
※ 사전적 의미
∙ 묘 - 종묘의 준말(격이 매우 높음)
∙ 단 - 흙이나 돌로 쌓은 제터
∙ 사 - 규모가 작은 집
그러므로 양양의 동해신묘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겠고, 그래서 앞으로 제례행사 원형을 되찾는다는 뜻에서 국가 단위 봉행으로 발전, 격상되기를 개인적 입장의 소망을 밝혀본다.

2) 해촌의 제당

마을마다 제당을 짓던지 아니면 오래된 나무에 석각을 쌓고 금줄을 띄워 놓은 신앙의 대상을 만들어 놓은것이 상례이겠다. 특히 바닷가 마을은 더욱 더 그런 현상이 현재까지 보존 계승되고 있는 실정으로 보면서 우리고장 바닷가 마을들의 제당을 살펴보면 공통점을 발견해 볼 수 있겠다.제당이름 대개 성황당으로 명명하고 성황신을 섬기는 것으로 되어 있겠고 제의일자도 춘추 또는 정월 택일하던지 아니면 고정 제의일자를 지키는 곳도 있겠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풍어굿판을 벌이는 것이 지금도 있겠는데 경비관계로 3년에 5년에 한번씩 하고 있는 마을도 있겠다. 제의일자의 공통점은 정월, 3월 3일, 9월 9일로 하는 곳이 많다는 것도 특징이라 하겠다. 또한 마을(현남, 광진)은 3불을 모시었는데, 3불이 삼신, 성황, 부처를 말하고 있겠다. 동산마을은 제당명을 붙이고 있는데 그 제당은‘湖海●’로 하고 있겠다. 남애 2리(현남)는 할머니 성황을 모시고 있다하고 할아버지는 설악산에 있다고 전한다. 지금 제의에 드는 모든 비용은 대개 마을 공동 추렴으로 하고 있다하겠다.

3) 해촌 주민의 전통적 금기사항

1. 출어 할 때에는 인사를 하지 않는다.
2. 출어 할 때에는 뒤를 돌아다보지 않는다.
3. 출어 할 때에는 여자가 앞을 지나면 그 날은 포기한다.
4. 아비와 아들이 한 배에 승선하지 않는다.
5. 출어를 위해 가까운 이웃이라도 문상을 안한다.
6. 바다에서 조업 중 쇠붙이를 바다에 빠뜨려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