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문화21호

민속예술자료 - 원일전리 풍구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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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726회 작성일 2010-03-2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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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전리 풍구질

이 쇠가 어데 쇠냐
경상도 안동땅 우성계 쇠로다
불어라 불어라 불어라 불어라 푸~ 푸~ 무아
풍구풍구 풀무야 불어라 불어라 피~익
그래가지고 픽~해
아~하 쇠 좋~다

대장간은 쇠를 달구어 각종 연장을 만드는 곳이다. 옛날에는 시골 장터나 마을 단위로 대장간이 있어 무딘 농기구나 기타 각종 연장을 불에 달구어 벼리기도 하고 새로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그런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대장장이라고 하는데, 대장장이는 오랜 숙련을 통해 담금질로 쇠의 강도나 성질을 조절한다. 대장간에는 풀무, 모루, 정, 메(앞메와 옆메), 집게, 대갈마치, 숫돌 등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진다. 대장간이 없는 마을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연장을 벼리는 떠돌이 대장장이도 있었다. 자급자족하는 농어촌에서 대장간은 필수적이었다.
모두 25점으로 이루어진 김홍도의《단원풍속화첩》중 <대장간 풍속도>를 보면 대장간의 풍경이 잘드러나 있다. 달군 쇠를 모루 위에 대주는 사람, 이를 쇠망치로 내리치는 사람들, 다 된 연장을 숫돌에 갈고 있는 사람, 그리고 이 중 가장 나이가 어린 견습생인 듯한 이는 풀무에 바람을 넣는 듯 줄을 잡아당기고 있고, 담금질하는 데 쓰이는 기다란 목제 함지박도 보이고, 여러 공구를 담는 나무 상자도 보인다.
풀무란 대장간에서 쇠를 달구거나 녹이기 위하여 화덕에 공기를 불어넣는 연장이다. 네모난 통에 한쪽은 손잡이와 공기 흡입구를 두고, 한쪽은 풍로를 끼워 화덕의 밑부분과 연결한다. 풀무에는 손풀무(橫武)와 발풀무(縱武)가 있다. 발로 밟아서 바람을 일으키는 풀무를 골풀무 또는 발풀무라 한다.
손풀무는 손잡이를 밀고 당기는 방식으로 바람을 일으키는데, 숯불을 피우기 위하여 손풍금 같이 생긴 손잡이를 잡고, 폈다 오므렸다 하며 바람을 일으키는 허풍선(虛風扇)은 역시 손풀무의 하나이다.
풀무로 바람을 일으키는 일을 풀무질이라 한다.
뜨거운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하면서 노동의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소리를 하기도 했다. 다음은 북쪽 지방에서 불려졌던 풀무와 관련된 소리 몇 토막이다.

1. 어기여차 불어라 불불 불어라
   슬근 살짝 불어도 가마솥만 나온다
2. 신기곡산 풍구가 얼마나 좋길래
   꽃같은 날 두고 돌아올 줄 모르나
3. 신기곡산 풍구는 칠팔 명이 불어도
   우리집에 풍구는 단둘이 분단다
4. 신기곡산 풍구는 참나무 풍구는 녹이고
    대장간에 풍구는 무쇠동이를 녹인다

위 소리를 통해서 풍구에 관한 대략적인 개념을 추출할 수 있다. 풍구질을 해 가마솥을 만들고, 적어도 7~8명 이상이 이 일을 했고, 또 무쇠를 녹여 연장을 만들었고, 그런 일을 한 곳이 대장간임을 알 수 있다. 양양에서도 점간이라고 하여 대장간이 있었고, 농가에 필요한 쇠붙이, 연장 등을 만들어 내었다.
현북면 원일전리의 호수는 대략 48호로 박, 김, 전, 윤씨 등이 거주하고 있고, 이중 밀성 박씨가 과반수를 넘고 있어서 밀성 박씨 집성촌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을 성황당 제사는 음력 정월 초정일 새벽 5시 반 경에 지낸다. 옛날에 원이 다니던 길이라 해서 원일전리라고 불려졌다고도 하고, 또 원일(元日)이란 화전민이 전토(田土)를 개척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한다고도 한다. 옛날에는 윗마을 원일전리와 아랫마을 원일전리로 구분되었는데, 대략 100여 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 1936년 병자년 수해에 아랫마을 원일전리가 사라진 후 그 후로는 윗마을 원일전리만 남아 있다.
이 마을에서는 50~60여 년 전에 박용하, 박신병, 박기병, 박영원, 박용권, 박용택, 박용환, 박용한, 박용정, 박용심 등 밀성 박씨 일가 10여 명이 주주가 되어 점일을 시작을 하였고, 이중에서 박용택이 대장을 하였다. 주주란 돈을 대었던 사람을 말하고, 점일이란 쇠붙이를 녹여 연장을 만들어내는 일을 말한다. 현재 원일전리에는 그때 일했던 점터가 남아 있는데, 성황당 자리가 바로 그 점터 자리이다. 지금도 성황당에 가보면 쇠똥, 쇠꼽통(오리) 등이 널려 있어서 그 당시의 영화를 짐작케 해준다.
위 10여 명 말고 박국병, 박대원, 박찬원, 박준원, 박용순, 박용우, 박귀병, 박상빈, 박상열, 박만원, 박시원, 박창원, 박사원, 박윤원, 박용주, 박용남, 박용덕, 박용저, 박귀원, 박용균, 박형원, 박수원, 박회원, 박상욱, 박보원, 박양원, 박윤원, 박용태, 박장원, 박창원, 박용건, 박순원, 박흥원, 박용수, 박낭원, 박태병, 박용준, 박용봉, 박주원, 박길원, 박기운, 박인원, 박필원, 박용혁 등이 풍구를 부는 부역을 하고, 또 인접 읍면에 다니면서 쇠붙이를 모아오는 일도 맡았다.
보통 점일을 이 곳에서는 방언지이지만‘즘’혹은‘짐’이렇게 말을 했다. 징을 불린다고 하면 이웃동리에 금방 소문이 나서 이웃동네에서 너도나도 쇠붙이를 갖고 오거나 구경을 온다. 헌 쇠붙이를 갖고 와 팔기도 하고, 새 것으로 교환해 가기도 하고, 또 연장이나 물건을 맞추어 놓고 가기도 한다.
마을은 바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흥겨운데, 어른들만 분주하고 신이 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또한 신이 난다. 쇳물이 흘러 떨어진 작고 동그란 것을 쇠똥이라고 하는데, 아이들은 이것을 주어 새총을 만들어 새를 잡곤 했다. 도가니 불꽃도 풍구질을 할 때면 어떨 때는 한 10여 m 올라가는데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점일은 연중 자주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해야 일 년에 3번 정도였다. 그만큼 힘들기도 하였고, 쇠붙이를 구하는 일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 지역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새마을운동으로 도로가 넓혀지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겨우 다닐 정도의 길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에서 물자를 운송해오는 것은 전부 인력으로 충당하였는데, 무거운 쇠붙이도 등짐으로 져 날랐고 또한 물건을 판매하는 것도 인력으로 져다 팔았다. 당시 다니던 길은 아랫마을 원일전리쪽인 물곶(수동리)으로 해서 어성전으로 해서 다니던 물길이 있고, 또 하나는 동쪽 질마재를 넘어 명지리로 해서 다니던 산길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북쪽길로 하천을 따라 양양읍으로 다니던 길이 있었다.
당시 점일은 상당히 경제적 부가가치가 높아서 풍구를 맡는 잡부 일당으로 쌀 닷 되를 줄만큼 고소득 산업이었다. 그 당시 농사짓는 보통 일꾼들이 하루에 받는 일당이 쌀 한 되, 좁쌀 반 되었다고 하니 상대적으로 점일의 부가가치가 상당하였으리란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이런 점일은 40년 대 초 그만두었는데, 이후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양은 그릇 등으로 대체되었다.
점일을 시작하려면 우선 도가니를 만들어야 한다. 오늘날의 용광로인데, 이 지역에서는 가마솥배, 솥집이라고 부른다. 도가니는 흙으로 빚는다. 둘레는 세 사람이 안을 정도이고, 높이는 150cm 정도 이고, 직경은 120cm 정도이다. 형태는 위는 터져 있고 밑은 동그랗게 되어 부뚜막에 올려놓을 수 있는 형태인데 마치 밥사발과 비슷하다. 그런데 맨 위는 좌우 높이가 동일하지는 않다. 다른 쪽과 비교해 숯과 쇠붙이를 넣는 쪽은 조금 낮게 만든다. 이는 그쪽으로 쇠붙이와 숯을 넣어야 하므로 조금 낮게 하고, 다른 쪽은 불길이 덜 닿으라고 조금 높인다. 부뚜막 높이는 대략 100~120cm 정도 된다. 도가니를 올려놓기 위하여 중간에 우묵하게 구멍을 파 놓았다.
도가니를 만들기 위해 우선 제일 좋은 흙으로 모형을 만든다. 옹기를 만드는 흙이면 무난하다. 동그랗게 밥사발처럼 모형을 뜬 후 철사를 동여매고 싸릿대로 둘레를 친후 다시 흙을 바른다. 이런 과정을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니고 상당히 여러 번 해야 도가니가 만들어진다. 도가니 벽의 두께는 대략 17cm 정도이다. 대강 형태가 만들어지면 그 안쪽에 뽀얀 찰질(찰흙)을 물에 풀어서 덧바르는데 이 과정을 상당히 여러 번 한다. 일종의 유약을 바르는 것과 같은데, 이렇게 해야 단단해서 잘 깨지지 않는다. 이 물기가 다 마르기까지 대략 닷새 정도 소요된다. 다 마른 후 단단하게 구워지라고 숯불을 해놓는다. 이렇게 해서 잘 구워진 도가니를 여러 사람이 작대기를 밑에 괴어 들고 부뚜막에 올려놓는다.
한 번 도가니를 만들면 상당히 여러 번 사용한다. 망가진 곳이 있으면 그곳만 수선해서 다시 사용하곤 한다. 도가니에는 밑에서 한자 반 정도 높이에 쇳물이 나올 구멍을 자판기 컵 정도 크기로 만들어놓고, 또 그 조금 위에 쇳물 나오는 구멍보다는 좀 크게 하여 다른 구멍을 하나 만들어 놓는다. 이 구멍은 사용하다 남은 쇳물을 다시 붓는 구멍이다.
도가니 뒤로는 풍구를 설치하는데 도가니의 뜨거움을 어느 정도 막아내고자하여 벽을 설치한다.
보통 도가니 높이만큼 되는 흙벽을 만들어놓고 그 뒤에 풍구를 설치한다. 풍구는 보통 소나무로 만드는데, 길이는 보통 8m 정도이고, 두께는 15푼, 너비는 두자 정도이며, 도가니 뒤로 한 일(一) 자 형태로 가로로 배치한다. 한글 고어의‘ㆆ’자를 연상하면 좋다. 풍구 길이만큼 땅을 파낸후 풍구를 설치하는데, 지렛대 모양으로 중앙을 도톰하게 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좌우 양편 땅 흙을 비스듬히 파내어 밟으면 쑥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든다. 이렇게 풍구 길이와 너비만큼 땅을 파내고 설치하는 이유는 풍구가 옆으로 노는 것을 방비하기 위함이다. 풍구를 지표면에 설치하므로 풍구의 바람을 도가니로 보내기 위하여 풍구 아래쪽에 웅덩이를 파내어 바람의 연결통로를 따로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풍구를 설치한 후 풍구인부 배치는 왼편에 10명, 오른편에 10명씩 배치하는데, 각각 10명은 또 길다란 풍구를 중심으로 왼편으로 5명 오른편으로 5명씩 나누어 서서 풍구를 밟는다. 이를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위 ○는 도가니를 표시한 것이고, 윗줄의 �는 풍구인부의 배치도다. 도가니하고 흙벽 사이 거리는 한자 정도 되고, 흙벽과 풍구 사이도 그 정도쯤 되었다. 풍구를 밟기 위해서 보통 마을 주민들이 모두 동원되다시피 했는데, 왜냐하면 한 번 불을 지피면 원할 만큼의 쇠붙이도구를 만들 때까지 불을 꺼트려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24시간 이상 작업을 할 때가 많기 때문에 20명이 2교대로 작업을 하였고, 대략 한 시간마다 교대를 하였다. 또 위 도표에서 보다시피 흙벽 길이보다 풍구 길이가 조금 더 길었다. 그래서 풍구 양끝에 있는 사람들은 흙벽 너머로 고개를 쑥 내밀어 도가니의 불길을 볼 수가 있었으나, 다른 나머지 풍구인부들은 도가니 불길을 볼 수가 없었다. 일기가 불순할 때를 대비하여 흙벽과 풍구 사이에 서까래를 설치하여 그 위에 짚으로 지붕을 해 씌운다.
흙벽은 그 속에 싸릿대를 넣어 만든다. 두께는 15cm 정도쯤 되고 높이는 사람 키 높이 정도이다.
위 도표에서 풍구와 흙벽 사이의 세로줄은 도가니까지 이어지는 줄인데 바로 풍구의 바람을 도가니(사실은 도가니 밑의 부뚜막)로 보내는 연결통로이다. 이 통로는 나무로 만들었고 흙을 칠했다. 이 부분의 바람의 양을 조절하는 것이 갈랍쇠이다. 풍구 왼편을 밟으면 갈랍쇠 왼편 문이 열려 바람이 들어가고, 또 풍구 오른편을 밟으면 갈랍쇠 오른편 문이 열리며 바람이 들어간다. 왼편, 오른편 풍구를 밟을 때마다 바람이‘푹 푹’소리를 낸다.
도가니에 불을 지피고 풍구에서 바람을 계속 불어넣으면 도가니 속의 쇠붙이가 녹는다. 이때 추가로 쇠붙이나 숯을 넣을 때는 부뚜막에 올라가 삼태기로 퍼 담아 넣는다. 숯은 백탄을 사용하는데, 여기에 사용하기 위하여 인근 산에 숯가마를 직접 만들었다.
쇳물을 받아낼 때는 쇠꼬챙이로 쇳물 받는 구멍을 찌른다. 마치 칼로 무엇을 도려내는 것처럼 찌르면 도가니 벽채 흙이 빠져 나오고, 다음에‘줄~ 줄~ 줄~’쇳물이 흘러나온다. 그러면 오리(귀떼동우 같이 생긴 쇳물을 받아 담는 도구)를 가지고 쇳물을 받아 미리 본을 떠놓은 곳에 들고 가서 쇳물을 부어 여러 연장을 만든다. 뜨거운 쇳물을 오리에 가득 담으면 상당히 무겁다. 둘이 들기에도 힘이 부칠정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명만이 오리를 들고 옮긴다. 왜냐하면 3~4명이 옮긴다면 그들의 보폭이 서로 안 맞아 오리가 기울어질 가능성이 2명이 옮기는 것보다 크기 때문인데, 오리가 기울기라도 하면 그 속에 담긴 쇳물이 땅에 쏟아질 염려가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반드시 두 명이 오리를 들고 발을 맞추어 쇳물을 옮긴다. 쇳물을 오리에 담아서 옮기는 중 쇳물이 늦게식으라고 짚으로 그 위를 덮는다.
쇠를 다루는 것을 담금질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댐금질이라고 한다. 양양을 이 지역에서 애양이라고 발음하는 식과 동일하다. 댐금질을 하여 이곳에서 주로 만드는 물품은 논가는 버섯, 밭가는 흙쟁이 버섯, 다리쇄, 가마솥, 가마솥에 든든하라고 거는 쇠꼽덩어리(붓거리), 항아리, 불을 담는 화로, 물 저장 철항아리인 물두멍, 쟁개비(냄비), 옷 대리는 대리미(다리미), 인두, 불구문, 화덕 등 20여 가지가 넘었다. 이중에서 가장 비싼 것이 물두멍이다. 물두멍은 길이는 1m, 직경도 1m 가 되는 항아리다. 집에 물을 떠다 놓은 저장탱크 같은 구실을 한다. 쇳물이 가장 많이 들어가므로 가장 비쌌고, 그만큼 무거워 장정 두어 명이 달려들어야 겨우 옮길 정도였다. 가마솥은 주문한 집으로 갖고 가서 설치를 한 후 하루 정도는 직접 불을 지펴 무쇠솥이 제대로 된 것인지 확인을 해준다. 처음에 불의 강도가 너무 세면 무쇠솥이 갈라질 수도 있으므로 화력 조정을 잘 하여 무쇠솥이 갈라지지 않도록 길을 들여주는데 이를‘질 들인다’고 한다. 이럴 경우 필경은 하룻밤을 그 집에서 머무르게 된다.
싸릿대를 엮어 흙을 발라 거푸집을 만든다. 여기에 모래를 풀로 이겨서 집어넣은 후 다시 모래덩어리를 꺼내 3푼 정도 깎아낸다. 이후 거푸집에 깎아낸 모래덩어리를 집어넣고 그 사이를 쇳물로 채워 여러 물품을 만든다. 혹 물품을 만들 때 쇳물이 오리 한 바가지로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이 되면 한꺼번에 여러 오리를 갖고 와 일시에 붓는다. 중간에 잠시라도 중단하였다가 다시금 붓게 되면 흔히 ‘쩍’이 생겨 물건이 쉬이 깨져서 수명이 오래가지 못한다. 여러 물품을 만들고 남은 쇳물이 또한 하나의 물품 만들기에 부족하다면 역시 사용하지 않고 도가니에 부어놓고, 새로 오리에 쇳물을 가득 채워와 모형에 쇳물을 붓는다. 사용하다 남은 쇳물은 다시 도가니에 붓고, 물품을 다 만들고 도가니에 불이 꺼지면 도가니의 쇳덩이를 끄집어내어 보관한 후 다음에 사용한다.
당시 노동의 힘겨움을 이겨내고자 소리를 하였다고 하나, 그 소리를 채록하지는 못하였다. 손양면에서 풍구소리를 예전에 채록한 문헌이 있었다. 둔전리에도 대풍구간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대장간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도 가보면 당시 녹였던 쇠똥이 녹이 슨 채 여기저기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양양군 관내에서 점일을 했던 곳은 여러 곳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작은 연장들은 직접 집에서 만들어 쓰기도 하였다고 한다.
원일전리에 박씨들이 처음 들어온 것은 약 300년 전 박구동으로부터 시작한다. 8대 할아버지 박창숙의 묘를 쓰기 위하여 장지를 잡을 때의 일이었다. 당시 상주가 지관과 친한 관계로 산소에서 패철을 놓아 방향을 잡을 때 평어를 사용했다. 이 말에 지관은 마음이 상하여 육군대장이 날 자리를 약간 비켜써 징대장이 나게 했다. 이런 사실은 그 지관이 산소자리를 잡아준 후 장지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랫동네 주막에서 술을 한잔 걸치면서 옆사람에게 말하면서 전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박씨 문중에서 13대에 이르러 박용택이란 점일을 하는 점대장이 났다고 모두들 말을 한다.
원일전리는 풍구질뿐만 아니라 명주길쌈으로도 유명하다. 명주는 주로 산뽕을 따서 길쌈을 했는데, 이곳의 명주는 양양군 관내에서도 유명할 만큼 질이 좋았다.
이상에서 풍구질 과정을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서낭당 제사를 올린다.
2) 가마솥배(도가니)를 만든다. 흙과 싸릿대를 엮은 후 철사줄로 칭칭 감고, 그 위에 찰흙을 여러겹 발라 가마솥배를 만든다. 크기는 150cm 정도다.
3) 가마솥배를 부뚜막으로 운반한다.
4) 가마솥배 뒤에 흙벽을 만들고 풍구도 설치한다.
5) 설치가 끝나면 숯과 쇠붙이를 가마솥배에 집어넣는다.
6) 풍구를 불어 불을 붙인다. 40명이 20명씩 나누어 교대로 풍구질을 한다.
7) 쇳물이 흘러나오면 오리(쇠꼽통)에 받아 본에다 부어 여러 물품을 만든다. 오리는 아무리 무거워도 2명만이 들고 옮긴다. 오리 위에는 쇳물이 식지 말라고 짚을 덮는다.
8) 여러 물품이 만들어지면 도가니의 불을 죽인다.
9) 가령 무쇠솥의 경우는 직접 주문한 이의 집을 방문하여 하루 정도 머무르며 직접 불을 떼어 화력조절을 해주고 온다. 이를‘질 들인다’고 한다.

강원도 도내 인제군에서도 무쇠점골 보습점간이 있었다.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약 200년 전 부터 인제군 서흥리(무쇠점골)에서 무쇠가 나왔다 하여 무쇠점골이라 칭하였으며, 이곳에서 철광석(원석)을 채취하여 점간에서 녹여 밭가는 보습을 만들었다고 한다. 보습점간은 다른 곳에서도 있었겠지만 무쇠점골 보습은 철광석이 좋고 생산기술이 뛰어나 인근 양구, 홍천, 고성, 양양지역에까지 인제무쇠점골 보습을 이용함으로써 판로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숯으로 쇠를 녹여 농사일의 기본이 되는 농기구를 만든다든가 또는 무쇠솥 등 가정생활에 필요한 일상 생활용품을 만들던지 하여 현재의 주물공장에 해당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인제군에서는 1988년 당시 보습을 만들었던 이들의 고증으로 이를 놀이화하여 道민속예술축제에 참가하여 종합우수상을 수상한바 있다. 이래 마당은 그 세부 마당이다.

제1마당 : 풍구 설치, 파쇠 수집, 철광석 수집, 손수틀, 보습뎅이, 세음구덩이, 가제간, 뎅이틀 등을 준비하여 농악에 맞추어 입장을 한다.
제2마당 : 뚝제사(치성드리기) ; 각종 제물을 준비하고 보습이 잘 구워지게 해달라는 치성을 드리고 풍구 주변에 술을 붓고 다함께 음복한다.
제3마당 : 풍구, 보습뎅이, 세음구덩이, 가제간, 뎅이틀을 설치하고 농악과 노리에 맞추어 풍구질을 시작으로 보습을 만들기 시작한다.
제4마당 : 참가자 모두 농악에 맞추어 만들어진 보습을 홀치기에 지고 각종 연장과 소도구를 들고 한쪽에서는 소로 실제 논을 가는 흉내를 내면서 보습이 잘 구워진 것을 자축하는 한마당놀이 춤을 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