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문화21호

〈문현산학교작흥하양양인사(聞峴山學校作興賀襄陽人士)〉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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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429회 작성일 2010-03-2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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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강원도 동해안의 양양, 강릉 일대의 근대기 무렵 신학문을 위한 학교가 세워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06년에 개교한 현산학교다. 이 무렵에 세워진 강릉 동진학교 등과 함께 사설교육기관으로 개설되어 종전의 서당과 향교 중심의 유림교육을 바꾸는 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역 유림의 반발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되나 국내외적으로 불어오는 신조류는 교육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가운데 남궁 억 양양군수가 부임하여 초등학교 교육에서부터 영어, 일어, 한문과 역사, 국어 등을 가르치는 등 현대적 사조에 맞춘 신교육의 전당이 마련되었다.
본고에서 소개하는 자료는 양양 현산학교가 설립된 지 불과 한달이 채 지나지 않은 8월 17일 쓰인 첩문으로, 영동지역에서 200여명이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들었으며, 지역과 향교에서 거금을 만들어서 현산학교를 건립하는데 앞장 선 남궁 억(1863~1939)군수의 노고를 치하하고, 양양군민을 격려하는 형식의 글로 작성되었다. 간략하게 현산학교 설립에 따른 지역적 동향과 현산학교 개교 관련 자료를 소개하고자 한다.

2. 현산학교 설립과 지역 유림동향
《양주지》에 의하면 현산학교 설립과정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800년 말기에 정부로부터 공립소학교를 특설하라는 훈령이 내려오자 기존의 유림에서는 신식교육 반대가 심하였다. 1904년에 이교필이 양양향교 재산으로 소학교를 설립하고자 학부허가를 주선하다가 유림의 반대로 중지되었고, 동년 7월 최항렬, 최영삼 등이 향교 소유인 학전과 기타 재산으로 소학교 설립청원을 학부에 제출하여 특허로 훈령이 내렸다. 그러자 동년 8월 양양유림의 향교에서는 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결의를하고 이항열, 최영삼을 동행케하여 양양부 관아에서 처벌해 줄 것을 소청하였다. 당시 군수 김흥기는 허가 취소원서에 이항열이 강제 날인케 하고 상부에 보고하였으며, 정현동, 노병익, 이두재 등은 반대하려고 상경하였다. 동년 12월 정현동 외 2인이 의정부에 제소하여 5인을 처벌하고 유림적부에서 제명하였다.
이런 가운데 1906년 양양군수 남궁 억이 부임하였다. 동년 2월 소학교 설립문제로 군민 대표들을 소집하여 향회를 개최, 협의한 결과 반대론이 있었고 변재안(辨財案:재정조달방법)이 곤란하자 수향(首鄕)과 통유(通儒)들로 하여금 재정을 조달하게 하였다. 그러나 통유들이 거부하므로 유림들이 향교에 모여 대회를 열고 각 종친회와 서당계에서 1만량을 조달토록 하였다. 동년 4월 9개면에 사는 재산가들을 현재의 군청사 뒤 태평루 정자로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환대하였다. 연회가 파할 무렵 그 자리에서 소학교 설립보조금 3만량을 모금하였다. 이에 따라 향교의 향장(鄕長)은 폐지되고, 향청(鄕廳)에 남아있던 재산과 유림들이 모은 1만량을 합하여 4만량으로 현산학교를 건립하였다. 이로써 재력이나 학교 내실면에서 도내 제일로 손꼽혔던 것으로 강릉 선교장의 동진학교와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1907년 순종 원년 4월 민긍호, 이강년, 박장호, 주광신, 한갑복 등 의병들이 본부 군청을 점령하고 현산학교에 불을 질렀다. 이후 다시 건물을 수습하여 1911년에 양양공립보통학교로 개칭했다. 교사는 남궁 억을 비롯하여 정우영, 김홍식, 김홍영 등 여러 명이 있었으며, 김성제는 현산학교 교사로 한문과 수학을 전담하였으며 산학통편에 능숙하고 만년에는 한의로서 지역에 공헌하였다. 《향토지》(양양문화원, 1976. 168쪽)에는 다음과 같이 현산학교에 대해 기록하였다. 한서(翰西) 남궁 억(南宮檍) 선생은 고종 병오 1906년 1월에 양양군수로 도임하셨다. 한말의 애국지사로서 조국애와 민주사상에 불타는 개화의 선구자이며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불세출의 위인이시다. 국권회복과 민족부강의 길은 교육에 있음을 선각하시고 먼저 민의를 들으면서 현산학교를 설립한 것이 1906년 7월 20일이다. 선생은 기부금을 모집하는 한편 각 문중 재산을 거둬드리니 그때 화폐로 4.000환의 거액의 기본금을 세우고 현산(峴山)이라는 관사(冠詞)를 따서 동헌 옆에 현산학교를 세워 한문, 국문 외 양학을 주로 가르치셨다. 반대자와 침략자를 붙잡아 태형까지 하면서 모집하니 200여명의 학생이며 거개가 상투를 짠 학생들이었다. 그 당시 수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영어, 음악 - 교사 남궁억 - 양양군수
● 수학, 역사 - 교사 정우용 - 후에 서흥군수
● 일어, 체조 - 교사 김홍식 - 참영사관학교 출신
● 국문, 한문 - 교사 김홍영 - 후에 면장
이것이 바로 양양초등학교 전신인 동시에 선생이 가르치신 민족정신이 맥맥히 흘러 3.1만세운동에 횃불을 울렸던 것이다. 아직도 제자 몇 분이 남아 있어 선생의 거룩한 덕을 흠모할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추존하여 영세불망하고 길이길이 그 공적을 빛낼 것이다.(주:선생의 호는 한서(翰西)이며 그 동상은 홍천에 세워져 있다)

3. 현산학교 설립 축하첩문 내용
〈현산학교가 흥성하였다는 것을 듣고 양양인사들에게 경하함(聞峴山學校作興賀襄陽人士)〉이라는 첩문(牒文)은 음력 병오년(1906) 8월 17일에 작성되었다. 이 자료는 고급한지에 먹으로 내려 쓴 국한문 혼용체로길이 120cm 너비 15cm 두루마리에 1천자내외의 반초서체로 작성되어 있다. 양양교육사의 귀중한 사료로서 내용의 일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이 학교가 생긴 후 몇 달 되지 않아 원근의 학도가 일시에 운집하여 이미 2백여 명을 넘었고 그 가운데 강릉, 간성, 삼척 등 군에서 오는 학도가 끊이지 않으며, 연조금이 합하여 엽 3만여 량이고 향교 에서 보내주는 매년 벼가 일백석이고 의연금을 내는 자가 여전히 끊이지 않는다.…금일 양양을 위하는 일에 이곳 군수 남궁 억 씨가 열심히 개발하고 이끌어 세상의 목탁과 몽매를 깨우치는 종이 되는것을 남궁 억씨가 일시에 일으켰다.…아, 장하다 양양이여, 번성하라 양양이여. 나는 양양인사들을 경하하고 또한 전국동포에게 격려하노라.”
이 격려문은 현산학교가 개교한 1906년 7월 20일 이후 불과 27일 만에 학생수가 2백 명이 넘고 모인 금액이 4천환을 넘게 되어 전국에서는 유일한 학교가 된 것을 경하하는 글이다. 1906년 1월 양양군수로 부임하여 1907년 5월에 사임한 한서 남궁억 군수는 부임한 1906년 2월부터 헌신적인 노력으로 불과 몇 달 후인 7월에 당시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한 현산학교를 개교하였다. 당시 한학을 교육하던 유림들의 반대와 학교 건립을 위한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서당이 아닌 신학문학교를 개교한 것은 지역교육사로서 중요한 뜻을 지닌다. 당시 양양은 소읍이고 벽지인 곳에서 영어, 국문 등 신학문을 가르쳤으며 인근 강릉, 간성, 삼척 등지에서도 우수한 학생들이 운집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당시 팔도 가운데 가히 양양에 부끄럽지 않은 군이 몇이나 되겠느냐고 말하는 등 양양 현산학교가 어려움 속에서 개교한 것은 타 지역에서도 본받아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 글은 작성자가 밝혀져 있지 않아 판단할 수 없으나 남궁 억 군수를 치하하고 양양인사들의 협조에 대하여 감사하는 문장내용으로 보아 지역유지나 당시 교육분야 상위직책자의 글로 판단된다. 획이 분명치 않은 벽자가 더러 있으나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聞峴山學校作興賀襄陽人事

1906년 9월 8일 인가되어 양양읍 구교리 20번지에 설립된 현산학교는 1910년 4월 1일 양양공립보통학교, 1951년 9월 1일 양양국민학교, 1996년 3월 1일 양양초등학교로 그 명칭이 바뀌었으며 100년이 넘는 역사를 계승한 양양지역 초등교육의 산실이다.
주지하듯이 남궁 억 군수는 구한말 독립운동가, 교육자, 언론인으로서 활동하였는데 독립사상 고취를 위해 무궁화 보급운동을 펼쳤으며, 교육입국의 관점에서 양양군수 재임시 현산학교를 설립한 공적을 남겼다. 동사략, 동화집인 조선이야기, 가정교육 등 여러 책자를 썼으며, 관동학회 회장, 배재학당 교사, 홍천 보리울 교회와 학교를 세워 무궁화 보급에 노력한 인물이며 특히 강원도 인재육성에 많은 애정을 쏟았다.
한서 남궁 억 선생의 묘역은 선향인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 있으며 1977년에 세운 묘비명은‘正三品通政大夫漆谷府使南宮公檍之墓’라 되어 있으며, 2004년 6월 29일 남궁 억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한서 남궁 억 선생은 양양부사로서 현산학교를 세웠으며 지역의 학생들에게 개화교육과 무궁화를 통한 애국사상을 고취한 큰 공로자다. 아울러 양양에서부터 전국으로 신학문에 대한 열기가 퍼져 나가는 데에 기여한 인물이다. 다행스럽게 발견된 이 축하문을 통해 현산학교가 지닌 시대적 의미와 교육사적 의의를 반추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