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2009 양양의 6·25 비화 목록
    포매리에 좌익이 많았던 이유 현남면에서 유독 포매리에 좌익이 많았다. 6․25가 터지기 전부터 이 지역은 좌익의 온상처럼 여겨졌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면 조두원으로부터 기인한다. 조두원은 일제강점기 때 소련으로 유학을 갔다. 일설에는 모스크바대학이라고도 하고 그냥 어…
    모둠 6․25가 터지기 전에 모둠을 많이 했다. 장소는 주로 인구리였지만 참가자는 인구리만 모이는 것이 아니고 현남면 전체의 모둠이었는데, 당시 인구리가 면소재지였기 때문에 인구리에서 많이 모둠을 한것이다. 모둠이란 좌익이나 우익이 자기네 세를 보여주기 위하여 개최한…
    농촌과 어촌은 1촌 6․25가 터지고 북한에서 내려와 소위 백일정치란 것을 할 적에 의용군을 차출했었다. 의용군을 차출하기 위한 회의가 인구리 학교에서 열렸는데 당시 의용군에 해당될 만한 나이의 장정들은 모두 소집을 당하였다. 입암리의 최현규도 갈 수밖에 없었다. 그…
    면옥치리에서 21명이 동사(凍死)한 내막 면옥치리는 38선 접경인데 공비가 자주 출몰하였다. 도채바우(주89) 등을 타고 가면 매봉령으로 곧장 나가고, 또 양양 정족산을 타고 벽실령 줄기가 매봉령으로 나가니 공비의 루트(길)가 되었다. 또 벽실령에서 면옥치를 내려다보…
    뱀에 물리면 의용군에 가지 않으려고 우리 시숙이 차골에 숨었다. 그리고는 맏동서가 밤낮으로 사람들 몰래 밥을 해 갖다 주곤 하였다. 가면서 남에게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마치 나물을 하는 것처럼 꾸며 나갔고 또 돌아올 적에도 일을 하다가 오는 것처럼 보이려고 갖가지 일…
    감자밭의 주인은 누구? 삼척에서 피난 할 적의 이야기다. 어촌 사람들은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언제 아군 군함이 나타나 함포를 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농촌지역으로 피난을 많이 했다. 6․25가 처음 터질 무렵은 감자가 익어 가는 계절이었다. …
    공 차는 켈로 한림부대 윤회장은 19살이 되던 해, 1952년에 아버지를 따라 동산리로 왔다. 아버지가 고향 땅에서 말년을 보내고 싶다면서 동산리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줄곧 동산리에 눌러 앉아 터주대감이 되었다. 6․25사변이 나자 윤상률 씨는 양양에 …
    2) 38선 이북의 양양 금번 전수조사를 통하여 드러난 사실은 이북사람들도 이북에서는 살기가 힘들었다는 점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경제적으로 현물세, 사회적으로 매일같이 이어지는 학습, 정신적으로 꼼꼼하게 죄어오는 사회주의 체제의 특성 등은 사람들을 지치게 하기…
    영혈사의 지불(주93) 영혈사는 의상대사 창건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는 고찰이건만 6․25의 참화를 피해가지는 못했다. 6․25 이전 영혈사는 전쟁준비를 위한 탄약등 군수물자를 저장하는 창고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당시 법당 안에 모셔져 있던 지불이 근처 계곡 불담골에 …
    동호리 앞바다에 좌초된 함선 지금의 을지병원연수원 있는 그 아래 바닷가 쪽에 터널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철도가 있었을 적에 만들어 놓은 것인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한국전쟁 중에 유엔군의 배들이 와서 함포 사격을 가하곤 하였다. 그러면 주민들은 …
    윤석진 월남사건의 진실(주94) 윤석진은 1933년 생으로 당시 말곡리 아랫말에 살고 있었다. 그는 인공 때 현북중학교를 들어갔다. 제대로 졸업을 하였다면, 인공시대 현북중학교 1기95)인데, 물론 졸업은 하지 못했다. 사건은 1949년 3월에 벌어졌다. 인공은 사상…
    1950년대 전후 현북면의 교육기관 윤석진이 월남을 할 당시 현북중은 3학년까지 있었는데, 3학년과 2학년은 1개 반, 그리고 1학년은 남녀 각기 한 개 반씩 총 4개 반이 있었다. 각 반당 50여 명 정도의 학생이 있었는데, 위치는 지금 하광정리의 면사무소 옆에 있…
    설악대 설악대는 양양군 치안대에서 탄생했다. 치안대는 마을의 젊은이들을 동원하여 자기 마을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면, 설악대의 목적은 상복리, 둔전리 등 설악산 일대의 치안과 공비소탕을 위한 특별부대였다. 따라서 이들은 지원을 받아서 선정하였고, 이들은…
    1945년 : 징병, 해방 그리고 K는 1945년 21살에 징병을 가야 했다. 처음 훈련을 받으러 간 곳은 길림성 막석이란 곳이었다. 훈련을 서너 달 받고 이제 부대를 배치할 때에 해방이 되었다. 일본이 항복한 것이었다. 일본군이든 한국인이든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야 …
    조선해방기념비 조선해방기념비 현재 중복리에 있는 이 비석은 1945년 해방이 된 다음 중복리의 김형배, 김천배 등 5-6인이 뜻을 모아 만들었다.이 비석을 처음에 세웠던 김형배, 김천배 등은 지금 살아있다면 92살-93살 정도 되지만 생사는 알 수 없다. 이들은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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