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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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552회 작성일 2010-04-06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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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은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 상당히 특이한 지역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동학이 왕성하였고, 그 일파인 보천교가 손양면을 중심으로 성행했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설치된 38선은 양양군을 접경지로 만들었다. 인공은 양양군의 향교를 주둔지로 하여 빨치산(유격대)를 남파시키는 기지로 삼았다. 1948년 11월부터 시작된 빨치산의 남파는 1950년 3월까지 10회에 이를 만큼 대규모로 보내졌었다. 이 모두 남한 사회의 혼란을 부추키기 위한 술책이었다. 남한에서도 가만있지 않았다. 호림부대라는 유격대를 양양 쪽으로 파견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양양군은 수시로 38선 근처에서 충돌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전쟁 발발 후 1950년 10월 1일 유엔군은 38선 돌파를 준비한다. 그러나 이미 국군은 돌파를 시도하고 있었다. 38선 돌파는 사실 상당히 주요한 의미를 띠는 사건이었다. 유엔군의 도움은 38선 이남까지의 대한민국 영토의 회복에 1차적으로 있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엔군의 38선 이북으로의 진격명령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38선 이북은 원칙적으로 북조선의 땅이었다. 유엔군은 이들 지역을 점령한 다음 이들 지역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 지역은 수복지였기 때문이었다. 그 수복지의 개념은 다른 38선 이남의 지역, 즉 예를 들어, 강릉이나 삼척과는 다른 의미의 지역이었다. 그래서 10월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수복한 지역에 대하여 비상계염령 (1950년 10월 16일)이 선포되고 민간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기 시작했다. 당시 국군의 통수권이 유엔군에게 있었으므로 결국은 미군정이 시작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양양은 1945년경의 소련군정, 그리고 이번엔 미군정이라는 당시의 이념체제에서는 적대적인 두 국가의 군정을 받는 아주 독특한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하여 전황은 돌변하고 말았다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하여 원주-삼척 라인을 마지노선으로 하는 후퇴를 감행했다. 이 기간 동안 다시 양양은 인공의 나라가 되었다. 그 후 1951년 5~6월의 중공군 공세를 물리친 국군은 다시금 양양을 수복한다.

이번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수복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밀고 밀리고 하는 과정에 양양군의 민간인들은 말로 표현 못할 고통을 겪었다. 국군이 올라오면 인공에 협조했던 민간인들은 쫓겨가야 했고, 또 인민군이 밀려오면 국군에 협조했던 사람들이 짐을 싸야 했었다. 그 와중에 오해를 받아 죽음을 당한 이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고 난 후도 양양은 미군정이 지속되고 있었다. 미군으로부터 양양지역에 대한 행정권을 이양 받은 것은 1954년 8월이었다.(주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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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13)『한국전쟁(하)』부록의 연표 참조. 그러나 김귀옥의 글(「잃어버린 또 하나의 역사」, 『경제와 사회』, 2000년 여름호, 30쪽)에는 11월에 대한민국정부가 지역행정권을 이양받는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