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현북중학교 폭격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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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914회 작성일 2010-04-07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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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북중학교 폭격사건(주82)

1948년도 하광정리 205번지 부근에 설립된 현북중학교는 38선 이북지역인 기사문리, 상광정리, 중광정리, 하광정리, 손양면(여운포리, 상운리, 동호리)를 학구로 15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었다.6․25전쟁이 나고 북한군이 대구 외각까지 남진하였다가 유엔군의 반격으로 후퇴를 시작하는 시기일 것이다. 제공권을 장악한 유엔군의 비행기 폭격이 날로 심해져 1950년 8월 15일(음력)부터 단축수업을 하기로 했다. 비행기 폭격이 오후에 집중하고 있으니 오전에 수업을 끝내고 학생들을 귀가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8월 14일(음력) 오후 3시쯤에 문제가 생겼다.

학교 뒷산(하광정리 산66번지) 정상에 대공화기(기관총)를 설치한 북한군인들이 그 날 처음 나타난 쌍가달 전투기에 총격을 가하게 되었다. 비행기는 피해를 입지 아니하고 양양 남대천 교량에 폭탄을 투하하고 되돌아 갈 땐 고도를 높여서 비행했기에 또 다른 총격은 없었지만 북한군의 대공화기 진지임을 노출시킨 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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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때의 현북중 (사진제공 : 현북면 하광정리 한경석)



추석날(음력 8월 15일) 아침 8시부터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북한군인 몇 명과 마을청년들이 운동장에서 축구시합을 하고 있었다. 이때 정찰기 한 대가 나타나 하광정리 상공을 두어 번 선회하는가 싶더니갑자기 큰 굉음을 내며 나타난 전투기 4대가 편대를 이루고 학교를 목표물로 급강하와 비상을 반복하면서 폭격자세를 취하는 것 같았다.수업 중이던 학생들에게 선생님들은 비행기에 노출될까봐 염려에서 인지 책상 밑에 머리를 박고 엎드리라고 명령만 할 뿐 다른 조치는 없었다. 그러나 겁 많은 1학년 여학생 교실에서 우당탕거리며 밖으로 뛰어나가는 소리가 들리면서 남학생들도 뛰어 나갔으나 평소 항공대피 훈련 때 지정된 대피호는 가까운 거리부터 먼저 나온 학생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피소에 엎드린 지 몇 초나 지났을까? 가슴이 터지는 듯 고막이 심하게 충격을 받으면서 소이탄(폭탄이 폭발하면 끈적끈적한 액체가 비산되어 불이 붙는 폭탄) 여러 발이 투하되어 삽시간에 불바다가 된 것이다. 온 몸에 불티 붙은 학생들이 살려달라고 이쪽으로 가면 이쪽 학생의 몸에 불이 붙고 저쪽으로 가면 저쪽 학생에게 불길이 번지는 정말 무서운 폭탄이었다.

불은 사람뿐만 아니라 교사, 마당, 시멘트바닥에서 훨훨 타고 있었다. 50여 명의 학생들이 사망하거나 화상을 당하고 말았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폭격이 끝났어도 의료시설이 전무했으니 불에 상처를 입은 학생들을 가마니 들 것으로 소달구지에 싣고 양양병원까지 후송했다고 했으니 도중에 사망한 학생이 부지기수라 했다. 말곡리에서도 2학년이던 윤인희 학생이 사망하고 윤여봉은 화상을 당했는데 흉측한 흉터를 그대로 안고 살아오다 이젠 고인이 되고 말았다.

사상도 이념도 생각할 수 없는 어린 학생들 천진난만한 동심으로 공부에만 열중하던 학생들에게 오인폭격치고는 너무나 참혹한 사건이 아닌가? 약 한 알 먹어보지도 못하고 험한 상처 소독 한 번 못 받았음에도 누구 하나 어디에 하소연 한 번 못 해보고 그렇다고 위로해주는 사람도 없이 구천에 누워 있는 어린 학생들의 영혼이 가엾게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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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82) 김순기,『말곡의 땅과 택호 이야기』, 2005, 81-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