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이근우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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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621회 작성일 2010-04-0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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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우의 죽음(주74)

낙동강 전투에서 패배한 북괴군은 총퇴각을 개시하고 동해를 끼고 북괴군 김무정은 북상하였다. 이것이 그 당시의 사실이다. 1950년 10월 2일 북괴군이 후퇴하면서 강선리 인민위원회에 와서 전 주민을 간성읍까지 피난할 것을 명령하였다. 주민들은 거의가 북으로 피난하였으나 반공청년들은 산중에 피신하였다.

10월 3일 국군이 남대천을 건너 북진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3일 오후 5시에 하산하여 귀가하였다. 이 날 이근우는 주동자 김장연, 김흥기, 이상호, 손동린, 신귀남 외 3명의 동지들과 동사에 집합하여 국군 입성을 환영하고자 태극기를 만들고 마을 자치를 논의하던 중 불의에 북괴군 패잔병 4명이 8시경에 출현하여 마을주민들의 후퇴를 강요하였다. 여기 모인 동지들은 태극기 제작 등의 모의사실을 숨기고침착하게 대응하였다.

반면 이상호로 하여금 패잔병 출현사실을 국군백골부대에 신고케하고 이어 이상호는 백골부대 1개 분대와 작전계획을 하고 반공청년들과 패잔병이 모인 자리를 포위하고 공격한 바 여기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반공청년 이근우는 총탄에 맞아 즉사하고 신귀남은 부상하였으며 신원미상의 30세 가량의 청년도 사망하였다. 야간전투이기에 반공청년만 희생되었으니 참으로 분한 일이다.

그 다음날 이근우는 마을장으로 장례하였다. 5년간의 원한은 수포로 돌아가고 태극기를 들고 대한민국만세를 불러보지도 못한 것과 대한민국 품안에서 살아보지 못한 것이 애국영혼들의 천추의 유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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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4)『양주지』, 양주지 편찬위원회, 1990, 143-1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