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김창수, 이선영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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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779회 작성일 2010-04-07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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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수, 이선영의 죽음(주73)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강현면 하복리에서는 좌익분자 청년들이 날뛰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이종상은 왜정에 반대하고 소련에 망명하여 고아원장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어 귀향하니 그 문중청년들은 민청, 부녀동맹의 중견인 과격공산분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작은 모스크바’라불렀다. 그리하여 반공청년들과 서로 대립되어 사사건건 암투하고 그들의 감시를 받으며 자기들의 비위에 맞지 않으면 비판시키고 심하면 매질까지 하여 못 살게 굴고 그들의 부모까지도 반동으로 낙인을 찍어 공산주의 사상으로 몰아넣으려고 갖은 악랄한 수법을 다하였다.

반공청년들의 반발심은 더욱 가중하여 반공에 열을 가하였다. 그중에서도 김창수, 이선영은 그네들의 눈에 가시였다. 1950년 10월 국군진격으로 반공청년들은 6년간의 복수를 하기 위하여 공산분자들을洞舍에 모아놓고 그들의 만행을 규탄하고 매질도 하였다. 그러나 1․4후퇴로 김창수와 이선영은 월남코자 38선까지 갔으나 벌써 막혀 더 이상 피난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또 1․4후퇴로 도피하였던 과격분자들도 돌아와 김창수가 한 사실을듣고 격분하여 김창수와 이선영을 동사에다 철사로 손발을 묶어놓고 죽도록 매질하여 빈사상태로 만들었다. 그뿐인가 전세가 다시금 불리하게 되자 다시 두 사람을 김창수의 옆집에 몰아넣고 수십 명의 극렬분자들이 혹독하게 매질을 하여 유혈이 낭자하고 피바다가 되었다.

김창수의 부친은 “이 놈들아. 차라리 나를 죽여라”고 외쳤으나 아랑곳없이 인정사정없이 두 사람을 계속 때려 인사불성이 되었다. 참으로 악독한 만행이었다. 수일 후 국군 반격으로 북진을 하게 되자 운신부동의 두 사람을 방공호 속에 쳐 넣고 총살하였다. 그 후 김종환(김창수의 부친)은 아들이 매질 당하던 충격으로 마음에 병이 생겨 일찍 돌아가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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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3)『양주지』, 양주지 편찬위원회, 1990, 1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