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장리 지서원 납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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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864회 작성일 2010-04-07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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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리 지서원 납치사건(주72)

현북면 장리는 강을 경계로 이남인 까닭에 장리에 지서가 설치되어 38선상의 국토방위의 전초기지며 도리는 강남산정까지가 38선인 연고로 이북의 치안대와 소련군이 주둔하여 38선상에서 서로 총질하는 분규가 비일비재하게 생기고 또 빈번히 납치사건이 일어나 사상자가 많았다.

부소치는 월남하기 가장 용이한 곳이었다. 소위 루트가 되었기에 이북의 감시망의 초점이 되었다. 도리는 지형상 양협 사이에 끼어 있어 경계가 삼엄하였다. 그러나 부소치 사람과 장리 사람들은 같은 강물에서 서로 목욕도 같이 하며 담소하기도 하였다. 밤이 되면 월남자가 많았다. 양쪽 경비원이 38선의 시비로 남은 강 중심이라 하고, 북은 아니라고 억지를 부렸다. 당신네는 강 중심이라 하나 우리 지도를보고 38선을 확실하게 정하자고 제의하기에, 우리 이남에서는 응답하고 경찰관 2명과 한청대원 3명이 도리에 갔다. 그것이 이북의 유도책인 줄 모르고 도리에 도착하니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이북 내무서원과 소련군이 포위하고 “손들어” 하고 모두 납치하여 양양에 끌고 갔다.

이것이 1949년 11월 20일이라고 한다.

끌려갈 때 소피를 보겠다고 야음에 도망친 자도 있었다. 끌려간 자들의 생사도 모르고 그들의 처리관계도 알지 못하여 답답하다. 그들의 간계는 항상 비열하고 비인도적 행위였다. 이상열 순경은 1949년 11월 20일자로 전사로 처리되고, 그 가족은 원호를 받고 있다. 또 부인 장씨는 평생 수절과부로 장리에서 살고 있다.

- 경찰관은 지서주임 박문수와 이상열 순경이다.
- 끌려간 한청대원은 2명이며, 그 중 신현복은 도망쳐왔다. 그 유족은 경북 예천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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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2)『양주지』, 양주지 편찬위원회, 1990, 1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