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호림유격대 제5대대, 제6대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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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532회 작성일 2010-04-07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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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림유격대 제5대대, 제6대대 사건(주69)

① 편성
1949년 12월에 강원도 주문진에 본거지를 두고 대북 유격전 및 첩보공작을 해오던 백의곤 대대와 오대산 유격대 김현주 대대가 육군호림부대로 명명되어 제5대대장 백의곤, 재6대대장 김현주 각 대대 120명으로 특수편성되어 작전임무를 수행코자 1949년 6월 29일 38선을 돌파하고 북한지역에 침투하여 멸공유격전을 감행하였다.

② 작전의 개요
제5대대 및 제6대대는 1949년 6월 23일 장도에 올라 6월 29일 38선을 돌파하여 태백산맥의 정봉산을 정복, 능선을 타고 박달재를 통과 오색리 일대에 침투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호림부대는 설악산을 정복하여 대청봉 1708m 고지로부터 동북방 약6㎞지점인 봉정암을 점거하였다.

1949년 7월 1일 봉정암에서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제6대대는 영서중부지구로, 제5대대는 영동지구로 북상작전하면서 7월말 양덕맹산지구에서 합류키로 맹약하고 결사적 행동을 개시하였다.

③ 작전의 실제
1949년 7월 1일 봉정암을 철수하여 대청봉에서 화채봉을 본거지로하여 양양지구의 반공청년과 연락을 맺고 게릴라 공작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때 이계화는 병력배치상황을 정보탐색차 금풍리에서 연락원을 양양읍에 파견, 위조군표로 물품을 매수한 것이 탄로되어 인민군이 금풍리를 급습하여 체포되었다. 화채봉 본거지의 반공청년들은 후방 교란목적으로 게릴라 활동을 하였으나 이계화가 전사하므로 정보가 두절되었다. 군량 등은 현지에서 반공청년들이 자진제공하였다. 양양출신의 부대원 김종익, 이종억, 김재수 등이 지리에 밝으므로 상복리에 침투작전을 직접 지휘하였다.

④ 상복리의 모의 탄로
김종모와 김정배의 집에 4일간 나누어 거주하면서 작전모의한 것이 김정배의 조카딸이 자기 남편인 극열분자 이범구에게 비밀을 전하므로 사전에 게릴라 활동이 발각되어 공산분자들은 도피하고 인민군은 잠복 비상경계태세를 갖추었다.

상복리 반공청년은 식량, 우육 등 주․부식 제공과 정보를 연락하여 호림부대를 적극 협조하였다. 공산당 연락원 김흥수는 야밤에 연락도중 호림부대에 발각되어 사살당하였다. 쌍방간 교전하다가 형세가 불리하여 상복리 피곡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피곡 전투에서 보안대 6명과 열성당원 3명을 사살하고 천진 남북방의 신선봉을 점거하고 큰령을 거쳐 북진하여 국사봉에서 전멸상태로 분산하였다.

이 전투에서 많은 반공청년들이 산화하여 이북땅에서 한 많은 원한을 품고 호국의 신이 되었다. 7월 7월과 8일의 전투로 상복리, 중복리,하복리 양민의 피해가 자못 컸다.

⑤ 반공청년의 말로
호림부대 습격시 기밀연락 식량제공 등을 반동죄로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6․25 국군진격시 전원 사살되었다.

투옥자 명단과 형기는 다음과 같다.
상복리 김종림(사형), 김근수(10년형), 김종우(17년형), 김학배(10년형), 김성훈(10년형),
김성룡(5년형), 조만순(7년형), 김성태(7년형), 김종모(17년형), 김종학(17년형), 양영길(10년형),
김우배(10년형), 김옥배(7년형), 김종탁(7년형), 이몽순(10년형), 이몽춘(7년형), 김종찬(7년형),
김종호(3년형), 최동수(3년형), 박용준(13년형), 박용선(13년형), 권오룡(13년형), 추병식(13년형),
최서구(13년형), 김환기(8년형).- 김종학은 18세 소년으로 정보연락의 책임을 졌다.

⑥ 호림부대의 전과

생존자 : 김종익(현 강릉시 거주), 이종억(현 속초시), 김하섭(현 고성군), 김재수(현 서면),
            이상은(현 속초시), 김종성(현 속초시)
전사자 : 김남홍(금풍리), 박춘근(남문리), 이계화(서문리), 최복길(속초시 영랑동), 박용학(용추리),
             김명종(도리), 윤정병(영덕리), 이상옥(영덕리), 이상만(상복리), 이효충(영덕리),
             이광우(속초시 중앙동), 김사열(영덕리), 김정수(영덕리), 김혁배(상복리)

⑦ 후문

김환기 노인은 원산 형무소에서 폐럼 중태 시에 이상권에게 호림부대의 양양공격 시 실패는 위조군표 사실이 탄로되고 연락이 제대로되지 않은 탓이라고 지적하였다.

6․25 직후 귀순한 당시 인민군 보위부 중좌였던 강동호의 증언에 의하면 1949년 7월경 호림부대 2개 대대 병력이 중부지구에 침투하므로 일대소동을 일으켜 공산당의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고 한다.

1949년 7월 일자 미상 호림부대 포로 40여 명을 귀순용사라는 명목으로 자동차에 현수막을 달고 포로를 탑승시키고 각 주요도시 및 각군 부대를 순회 선전하였다.

40여 명의 호림부대원은 평양, 함흥, 원산 등지에 5-6명씩 분산 수용되었고 중상자를 치료한 한편 세뇌공작을 시작했다.

1949년 9월 일자 미상 호림부대 40여 명에 대한 심판을 평양최고재판소에서 개정하고 최고간부급 및 각처 지도계층 언론계 등을 동시참여케 하였다. 이때 재판정에는 호림부대 강모 중위의 고함과 욕설로일대혼란이 일어났다.

그 후 강중위를 비롯해 6명의 호림부대의 간부급을 모란봉에서 김일성이 참관하는 가운데 총살형으로 집행하였다고 한다.

1949년 6월 호림부대 침투 직후 비상령을 선포하고 10월말경 해제한 것이며 호림부대 토벌작전에 동원된 병력은 3개 사단병력이 넘는것으로 안다고 한다.

- 이계화는 서문리 이문화의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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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9)『양주지』, 양주지 편찬위원회, 1990, 136-1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