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반공포로 석방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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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510회 작성일 2010-04-07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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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공포로 석방사건(주59)

1951년 7월10일 드디어 휴전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한국에게는 유엔군측으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한국대표로 임명된 백선엽장군도 한국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회담 내용에 대해서도 한국정부에 알려주지 않도록 지시를 받고 있었다. 한국대표는 이형근, 유재흥, 이한림, 최덕신 등 당대 일류의 장군들이 순서대로 역임하였으나 모두 이대통령과 유엔군 측의 사이에 끼여서 쓰라린 맛을 보았다.

휴전회담이 결렬된 지 6개월 만인 1953년 4월 26일 양측 대표단이 판문점 회담장에서 다시 만났다. 그동안 소련수상 스탈린이 사망하였고,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가 새로운 대통령이 되어 있었다. 자유․공산 양진영의 지도자가 바뀐 사실과 함께 회담장은 상당히 융통성 있는 분위기를 띠었다.

이대통령은 6월 10일 손원일 국방부장관과 백선엽 육군총참모장을 비롯하여 육본 참모진과 군 주요지휘관을 경무대로 불러 훈시를 하였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지만, 수일 후의 반공포로 석방사건을 일으키기 위한 사전포석이었다고 보여졌다. 이대통령이 육군 지휘관들을 모두 부른 것은 미군들 모르게 진행시키고 있는 극비작전에서 과거 부산정치파동 때와 같이 군이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드디어 6월 18일 새벽 이대통령은 유엔군이 관리하고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들을 석방하였다. 포로수용소는 미군의 후방지원사령관의 관할이었으나, 그 경비는 미군지휘를 받는 국군경비부대 및 헌병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원용덕 장군 휘하의 국군헌병총사령부는 수용소 경비를 장악, 사전에 계획한 대로 수용소 울타리의 철조망을끊고, 전선을 잘라서 전깃불이 커지지 않게 함으로써 포로들의 탈출을 적극 도와주었다. 수적으로 열세인 미군관리요원들로서는 그것을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한꺼번에 2만5천 명의 포로가 심야에 탈출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밤 동안에 2천여 명이 더 탈출함으로써 2만7천 명의 반공포로가 극적인 탈출에 성공하였다. 포로들은 한국당국의 도움을 받아 현지주민들에게 흡수되었으므로, 이미 탈출한 포로를 다시 포획하기란 대단히 어려웠다. 그리하여 6월말에는 8600명의 송환불원 북한포로만이 유엔군이 관리하는 수용소에 남게 되었다.

이대통령은 한국의 국토를 양단하는 휴전협정에 서명할 수는 없으나, 그 협정을 지지할 수는 있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휴전협정의 성공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성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개략적으로 작성된 명단에 의하면 유엔군측에서도 크게 놀랄 정도로 13만2천 명 중 불과 7만 명만이 송환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포로로부터 재분류한 민간인 억류자 3만7천 명, 이승만 대통령이 석방한 반공포로 2만7천 명, 본국송환 거부포로 2만2천 명, 등 총 8만6천 명의 포로를 자유진영에 끌여들임으로써 이념전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었다.

다음은 각 포로수용소별 반공포로 석방 현황이다. 석방과정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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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9) 김행복,『한국전쟁의 전쟁지도』, 국방군사연구소, 1999, 475-515쪽 요약.

(주60)『한국전쟁(하)』, 국방군사연구소, 1997, 2쪽, 4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