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양양 진격작전(195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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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787회 작성일 2010-04-07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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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 진격작전(1951년 3월)(주54)

제1군단장은 양양을 공격하기 위하여 수도사단에 3월 18일부터 연곡천 북쪽지역에 대한 강력한 수색정찰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때 군단 정면의 인민군 제69여단도 북으로 철수한 제10사단의 일부를 증원받아 양양을 방어하기 위하여 산악으로 연결된 하월천리-만월산-명지리 축선에 축차적인 거점을 확보하고 사단의 진격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위력수색에 나선 제1연대는 동해안에 배치된 미 함정의 화력 엄호하에 적의 축차진지를 격파하고 양양 남쪽의 어성전리-명지리 선으로 진출하였다.

적은 연대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하여 극력 저항하였으나 미 함정의 집중적인 함포사격에 의한 병력손실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연대의 진출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상황이 급진전되자 수도사단장은 제26연대가 방어중인 경강국도 변의 유천리-차항리 진지를 제9사단에 인계하고 연대를 주문진을 경유 양양 남쪽의 인구리로, 사단예비인 제1기갑연대로 강릉에서 주문진으로 이동시켰다.

제1군단과 좌인첩의 제3군단이 위력수색에 주력하고 있을 무렵인 3월 25일 8시에 제8군사령관으로부터 동부 전선의 국군으로 하여금 신속히 카이로선으로 진출하게 하자는 요청을 받은 육군본부는 작전지시 제10호로 제1군단 및 제3군단은 3월 25일~26일 양일 간에 공격을 실시하여 책임지역 내 카이로선을 점령․확보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제1군단장은 수도사단으로 하여금 카이로선의 양양을 점령하고 제9사단은 수도사단의 좌측방을 엄호하면서 축차적으로 진출하도록 조치하였다.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은 3월 26일 좌전방에 제1연대, 우전방에 제26연대로 공격제대를 편성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은 양양을 고수하기 위하여 남대천 남쪽의 우암리-노고봉 선에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고 배수의 진을 치고 사단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사단은 전 화력을 집중한 후 돌격으로 적의 최후방어선을 돌파하였다.

적은 방어선이 돌파되자 남대천을 도하 양양 북쪽의 고지군과 한계리-인제로 통하는 설악산 입구로 철수하였고, 사단은 27일 남대천을 도하 양양으로 진출하여 양양-인제, 양양-서림리 간의 차단진지를 점령하였다. 당시 양양-속초 간의 적은 동해안에서 지원되는 함포사격에 방어진지 편성은 물론 철수도 불가능하게 되자 인제-설악산 간의 내륙지역으로 통하는 도로변에 거점을 확보하고 저항하였다.

이 무렵 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수도사단의 좌인접에서 사단의 공격을 엄호 중인 제9사단의 전선을 시찰하고 L-5기로 14:40분 하진부리를 출발 강릉의 군단지휘소로 복귀하던 중이었는데, 수시간이 지난후에도 강릉에 도착하지 않았다. 이에 군단사령부에서는 난기류로 인하여 조난을 우려하고 제9사단에 대관령 일대와 경강국도변을 수색하도록 하였으나 그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에 부군단장 이준식 준장이 임시로 군단을 지휘하게 하였다.

양양에서 철수한 적은 설악산 입구의 387고지에 강력한 거점을 구축하였다. 이 고지는 적 제2군단의 철수로인 양양-한계령-원통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중요지형이므로 일전을 준비하는 듯하였다. 사단이 387고지에 집중사격을 실시한 후 제1연대가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적의 저항이 완강하여 공격에 실패하였다. 사단이 포격으로 적을 제압하는 동안 제1연대는 전열을 재정비하여 30일 공격을 재개했다. 사단의 화력이 387고지 후방으로 연신되자 적은 1개 중대 규모의 잔류부대만 두고 주력은 오색리를 경유하여 설악산으로 퇴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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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4)『한국전쟁(중)』, 국방군사연구소, 1996, 452-454쪽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