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양양-서림지구 전투(195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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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222회 작성일 2010-04-0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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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서림지구 전투(1950년 12월)(주52)

① 양양-서림지구 전투의 개요
아군 및 우군은 중공의 침략으로 전 전선에서 축차적인 철수를 단행하여 38도 분계선 부근인 임진강-연천-춘천 북방-양양을 연하는 선에서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이에 동부전선에서도 춘천 북방-양양을 잇는 전선이 형성되었는데, 양양-서림지구 전투는 이 지역의 전선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한 아군 1군단이 남침하는 적과 오대산 등지에 은거하며 출몰하는 유격부대를 격멸한 전투로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이후 전 전선의 상황에 따라 전선 정리를 위한 준비에 임하게 되었다.

② 양양-서림지구 전투의 주요 지휘관
• 아군 : 제1군단장 소장 김백일, 수도사단장 준장 송요찬, 제1연대장 대령 한신, 제1기갑연대장 대령 김동수, 제26연대장 대령 서정철
• 적군 : 북한군 제2군단 소속 제 2전선부대, 제10사단, 제12사단, 제69여단, 길원팔유격부대

③ 양양-서림지구 전투의 진행과정
제 1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예하 각 부대를 12월 10일~18일 사이에 흥남에서 부산 및 묵호 등지를 목표로 각각 해상전진케 한 다음 강릉에 개설된 군단지휘소에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전황추이의 검토와 이에 대한 작전계획의 수립에 대하여 작전참모를 위시한 여러 참모들과 함께 논의하고 있었다.

즉 전진작전을 끝마친 다음 군단 임무는 욱본작명 제251호의 수정명령인 훈령 제5호의 요지와 같이 동부 38도 분계선 부근의 공세방어 진지의 점령과 이에 따른 적 제2전선의 유격부대를 격멸하고 이어 중공군을 포함한 적 주력부대의 남침을 현 진지에서 격퇴하는 임무가그 주제이었다.

• 12월 21일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은 이 날 강릉에 있는 사단지휘소를 주문진으로 약진개설하고 이미 전날 하달된 사단 작명 제116호에 의하여 예하 제1연대(연대장 대령 한신)를 주진지 점령부대로, 제1기갑연대(연대장 대령 김동수)를 주진지의 예비진지 점령부대로, 그리고 제26연대(연대장 대령 서정철)를 사단 예비대로 각 담당진지를 점령케 하였다.

• 12월 22일
사단 전면의 적은 산악지대에서 유격전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고지중복 및 산간암석지대 등 천연장애물을 이용하여 잠복하고 있다가 보급로 주변에 출몰하여 아군의 보급운송을 방해하려고 꾀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사단장은 사단 북쪽 전선에 진출하여 있는 제1연대가 장차 예상되는 적 주력부대의 남침에 계속 대응토록 하고 나머지 제1기갑연대 및 제26연대는 군단의 후측방 지대인 하진부리~대화 부근을 경비하는 동시에 주로 사단 서측방 작전지역인 오대산 부근의 적 유격거점에 대하여 위력수색전을 펴게 하였다.

• 12월 23일
제1연대장 한신 대령은 양양 북쪽 일대에서 수색정찰대가 적정 정찰 결과 어떠한 정보도 입수하지 못하였다는 제보를 연대 작전주임으로부터 받은 결과, 연대 주력을 양양 북쪽 진지로 진출시켜 더욱 유리한 주진지를 점령코자 기도하였다.

• 12월 24일
양양 서쪽 4~5㎞ 일대까지 전술적 전개를 완료한 제1연대는 그 주동을 멈추지 않았고 연대 예비대인 제3대대는 양양 남쪽 2㎞지점인 하왕도리 부근에서 약 2㎞ 서진하여 우암리 부근으로 진지를 이전점령한 다음, 연대 후측방 경계임무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제1기갑연대도 전날의 진지에서 점차 서쪽으로 진지를 확대시켜 나갔는데 즉 연대 주력이 상광정리에서 3㎞ 서쪽인 326고지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제26연대는 주문진-송천선에서 對유격활동을 펴고 있었다.
이와 같이 사단 예하 3개 연대는 각각 더욱 유리한 주진지 및 예비진지를 점령함과 아울러 진지를 견고하게 구축하면서 수색활동도 계속하고 있었는데, 이 날도 사단 주저항선 일대인 양양 북쪽 수여리-금풍리선에서는 적에 대한 첩보가 입수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단 우인접 제9사단 29연대 지대였던 서림리 부근에서는 이 날 일몰을 기하여 적의 야습이 있었는 바 이는 수도사단과 제9사단이 진지를 교대할 때에 일시로 생긴 부대간의 공백을 틈타 적 유격대가 오대산 일대로 잠입하려는 계책의 하나였는데 이때 제29연대는 일시 형세가 좋지 못하여 창촌으로 후퇴하고 있었던 때였다.

• 12월 25일
적 제2군단 소속으로 보여지는 수 미상의 제2전선부대가 이 날부터 급격히 침투공격을 기도하자 사단 인접 제9사단(사단장 준장 오덕준)은 38도 분계선 부근에서 이 적을 격퇴하기 위하여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즉 제28연대(연대장 대령 이창정)가 현리 남쪽을, 제29연대(연대장 고백규)가 현리-서림 부근을 각각 공격하게 되었는데 특히 전날 제28연대의 제2대대의 현리 철수에 따른 적의 침투를 동 연대의 제1대대가 막기 위하여 고사리에서 원대리로 진격하고 제3대대는 진목정에서 하남리로 진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현리-서림 부근의 전황이 좋지 못하자 수도사단장은 예하 전 부대에게 진지를 더욱 강화토록 하는 반면 군단장의 지시에 따라 제1기갑연대(연대장 대령 김동수)로 하여금 방어력이 결여된 서림지구를 담당 공격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연대장 김동수 대령은 제2대대(대대장 소령 박익균)를 서림에 진출토록 하고 제3대대(대대장 소령 임권묵)를 서림리 북동쪽 정족산 일대로 진출토록 조치하였다.

• 12월 26일
군단 전면의 적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자 사단 예비진지를 구축하고있던 제 1기갑연대가 서림지구로 급거 진출하게 되었는데 동 연대 제2대대가 이 날 먼저 약진하여 하서림리-조침령-상황피 일대에 진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제3대대도 전날의 진지를 출발하여 서림동쪽인 면옥치-정족산(943, 933고지) 일대의 진지를 점령하고 사주경계배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동 연대 제1대대(대대장 소령 박경호)는 상광정리 부근 진지에서 다시 서진하여 어성전리로 이동하고 장차 서림지구로 진출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제1연대(연대장 대령 한신)는 제1기갑연대의 서림리 진출과 때를 같이하여 양양 북쪽 금풍리-장승리선에서 서측 제1기갑연대의 진지와 연결하기 위한 전선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즉 제1대대(대대장 대위 함용익)가 장승리 진지에서 서림방향의 중간인 영덕리 부근으로 진지를 전환시켰다. 그리고 제2대대(대대장 소령 신언국)도 금풍리 진지에서 양양 남쪽의 하왕도리로 이동하고 남대천 남안에서 서족 우암리의 제3대대(대대장 대위 이성봉)와 평행을 이룬 진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전날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시도한 적 제2군단 소속 약 3,000명 규모의 병력은 현리 부근에서 상남리를 향해 피상적인 공격을 시도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제9사단 28연대의 전황이 좋지 못하였다. 당시 제9사단은 창촌-청원리선을 확보하면서 제30연대는 다시 상남리 동측으로 우회하는 적을 공격하였고 제28연대도 현리 동쪽 1㎞지점인 321고지 부근에서 무명천을 사이에 두고 적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수도 사단은 제9사단 우익을 연결하는 서림리 부근에서부터 양양까지를 점령하고 진지를 강화하였는데 수도사단이 제9사단 정면의 일부를 담당함으로써 그간 허점을 보여왔던 공간지대에 대한 병역배치를 완료한 셈이 되었다.

• 12월 27일
현리 부근에서 적 제2군단 소속 제12사단의 공세가 계속적으로 강화되자 이에 대응하고 있던 군단 좌익의 제9사단은 일시 불리한 전황을 극복하면서 재공격을 수행하였다. 즉 동 사단 제28연대장 이창정 대령은 현리에서 일시 분산된 제2대대를 취합하여 1091고지에 진격시켜 군단 좌측방을 방어키로 하면서 연대 주력으로서는 현리를 직접 압박하였다. 그리고 제29연대장 고백규 대령도 하치전 북쪽에서 대치중인 적을 반격하여 847고지 부근으로 격퇴하고 귀둔리 북쪽으로 주공을 지향하면서 추격전으로 이행하게 되었다. 이 현리 부근의 적은 오대선 부근의 적과 서로 연결하려는 저의로 보였는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군단의 중앙전선이 돌파될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황 아래 현리-오대산의 중간지점인 서림리 부근에서 차단 진지를 점령하고 있던 제1기갑연대는 연대 주력을 서림리 부근으로 급히 집결시키고 진지를 강화하는 한편 적의 기도를 조기에 저지한다음 즉시 격퇴하기 위한 활동을 부가하였다. 그리고 제1연대는 양양 남쪽 하왕도리-우암리선에서, 제26연대는 주문진과 송천동 부근에서 각각 전날과 다름없이 진지보강 및 수색전을 계속 펴고 있었다.

• 12월 28일
사단 좌인접인 제9사단이 현리 부근에서의 전황의 악화로 말미암아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에게 예하 일개 연대를 현리 동쪽인 하치전 부근을 공격토록 명령한 바 있었는데 이에 따라 수도사단장은 서림리 부근에 진출하여 있는 제1기갑연대장에게 다음날 04:00부터 하치전 공격임무를 부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명령을 받은 제1기갑연대장 김동수 대령은 이미 서림리 부근과 정족산 일대에 진출하여 진지를 점령하고 있는 제2대대 및 제3대대 외에 연대후방 대대로서 어성리 북쪽 당산리 일대에 집결하고있는 제1대대마저도 서림리 부근으로 급히 진출케 하여 연대 주력과 합세토록 하고 다음날의 공격을 위한 모든 대책을 미리 강구하였다. 한편 사단 우일선전방에 진지를 점령하고 있던 제1연대는 이 날 연대지휘소를 상운리에서 인구리로 옮기는 동시에 연대 주력은 전날과 다름없이 진지공사에 전념하였고 제26연대도 현 임무를 계속 수행하였다.

• 12월 29일
제1기갑연대(연대장 대령 김동수)는 이 날 04:00부터 현리 동쪽 도채동 부근의 계곡에서 오대산으로 지향하려는 적의 주력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는데 제1대대가 서림리-진흑리-용덕리를 차례로 진격하고 제3대대는 하서림리에서 출발한 다음 제1대대 진지를 초월하여 제1대대 서측을 연결한 진흑리-도채동에 진출하는 즉시로 진지를 점령하고 북쪽 및 서쪽을 경계하면서 위력수색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편 오대산 부근에서 對유격전을 펴고 있는 제26연대 3대대는 그간 송천동 일대에서 수색전을 전개하다가 이 날 06:00에 인접 제9사단 30연대의 작전지역인 창촌-광원리를 연하는 선과 연결하기 위하여 갈전곡 남쪽을 목표로 진격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날 적 증원부대는 제1군단과 제2군단의 전투지경선 전면인 한계리(원통 동쪽 적 예상퇴거지)에서 원통리-인제를 경유하여 그 길로 남하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 12월 30일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군단 좌익의 제9사단의 전황을 감안하여 강릉 부근에서 군단지휘소를 경계하고 있던 제1경비대대를 오대산 서쪽 기슭에 있는 제30연대의 작전 지역으로 증원시키고 지난 28일 이래 현리-하치전 부근에 출몰하던 적이 제9사단과 수도사단의 접촉점에 생긴 간격을 뚫고 오대산에 잠입한 것을 격멸키로 하였다. 이러한 현리-오대산 사이에 생긴 적의 침습로를 중간에서 차단하면서 적을 분단하여 고립시켜 이를 각개로 격파하기 위한 전투가 제1기 갑연대에 의하여 서림-현리 부근에서 전개되었는데 동 연대 제1대대는 이 날 진흑리-대동리간 및 점봉산 남쪽 기슭인 연덕리 부근에 진지를 점령하였고, 제2대대(대대장 소령 박익균)는 광원리에서 서림으로 다시 진출하였으며, 제3대대는 연대 최선두 서측방 진격부대로서 현리 동쪽 5㎞지점인 도채동-방동리까지 진격하여 진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특히 제3대대 9중대(중대장 대위 이원훈)가 도채동에서 방동리로 진격하다가 현리 부근에서 동향하려는 적 유격부대 50여 명을 발견하자 우선 기도를 비익하면서 산개하는 동시에 적을 유효 사정거리 내로 유도하고 난 다음 기선을 제압한 연속사격으로 이 적을 거의 격멸시키고 말았다.
이와 같은 불시의 공격을 받게 된 적은 다수의 사체를 유기한 채로 그 잔여병력이 분산하여 도주하였는데 약 40분 뒤에 확인된 전과는 적 사살 18명을 비롯하여 소련식 소총 12정, 구구식 소총 5정 등을 노획하였고 이 근접전투에서 아군도 1명의 전사자와 2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한편 제1연대는 양양 남쪽에서 별다른 접적 없이 진지를 보강하고 있었으며, 송천동에서 서진 중인 제26연대 3대대(대대장 소령 구태익)는 이 날 20:00에 대사리에서 적 유격대 1,000여 명을 발견하는 즉시로 이를 뒤따라 치게 되자 적은 오대산 깊숙한 곳과 그 남쪽 평창 방면의 구릉지대를 향하여 도주에 도주를 거듭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 12월 31일
사단 좌일선 최전방에 진출하여 있던 제1기갑연대의 3대대는 전날에 이어 도채동에서 현리에 이르는 계곡을 수색 전진하다가 전날 흩어진 적의 재편성 부대로 추측되는 약 80여 명을 발견하고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선제공격을 가하였는데 이때 적은 그 공격을 늦추지 않고 저항하므로 이에 대대에서도 급속사격의 집중발휘로서 적의 기세를 꺽어버린 다음 돌진으로서 적을 분산시켰다. 이때 적은 전날에이어 두 번째의 공격에 실패하자 8구의 시체를 버려 둔 채 황망하게 퇴거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아군도 1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이와 같이 현리-동측에서 제1기갑연대가 적과 대전하고 있는 동안 사단 우일선의 제1연대는 양양 부근에서 특별한 적정이 없는 가운데 계속 대기하고 있었으며 제26연대는 주문진 부근에서 사단 예비대 임무를 대행함과 아울러 동 연대 제3대대로서 오대산 남쪽 기슭에서 계속 정찰 및 수색활동을 강화하고 있었다.
수도사단의 전방 진출선은 동으로부터 금강리-영덕리-하서림리-진흑리-도채동을 연하는 선이었으며 제9사단은 창촌리-상남리-현리 부근에서 종심 깊은 진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④ 양양-서림지구 전투의 결과
아군 및 우군은 중공의 침략으로 전 전선에서 축차적인 철수를 단행하여 38도 분계선 부근인 임진강-연천-춘천 북방-양양을 연하는 선에서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였는데 이 무렵 UN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미 합동참모본부로부터 한국전쟁의 국지화와 중공군 격퇴에 대한 전권을 부여받고 12월 30일에 미 제8군사령관 릿지웨이(Ridgway)중장에게 명령하기를 “우군은 최소한의 손실로써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가하면서 현 진지를 방어하라”고 강조한 바 있었다.

이와 같은 작전개념은 한국군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동부전선을 단독으로 담당하고 있던 제1 및 3군단은 춘천 동쪽에 있는 미 제10군단 우측으로부터 동해와 접한 양양 부근까지 38도 분계선을 중심으로 한일대에서 진지를 점령하고 다음 작전에 대비하게 되었다. 특히 제1군단은 군단지휘소를 강릉에 개설하였고 예하 수도사단이 군단 우익으로 양양-서림-도채동을 이은 선에서 진지를 강화하면서 적 제2군단 주력의 남침에 대비하는 한편으로 오대산 부근의 적 제2전선의 유격대를 격멸하여 그들의 남북연결을 차단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춘천과 홍천 동북쪽에서 제12, 2, 10사단의 주력이 계속적으로 남침하고 현리 부근의 전황이 악화되자 육본작명 제257호에 따라 동부전선 일대를 점령 방어하기 위하여 수도사단도 전선 정리를 위한 준비에 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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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2) 인터넷 자료. 전쟁기념관 홈페이지(www.warmemo.co.kr)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