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양양-간성 진격전(195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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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167회 작성일 2010-04-07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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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간성 진격전(1950년 10월)(주49)

① 양양-간성 진격전의 개요
양양-간성 진격전에 있어서 아군 제 3사단(사단장 준장 이종찬)은 적의 강력한 저항을 물리치고 38도 분계선을 넘어 양양으로 돌입, 후방에서 교란전을 펼치는 적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면서 간성으로 진격하였다. 38도 분계선을 넘어 북진한 아군은 전방으로부터의 저항과 설악산 등지로 은거한 적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원산을 향해 계속적으로 진격하였다.

② 양양-간성 진격전의 주요 지휘관
• 아군 : 제1군단장 소장 김백일, 제3사단장 준장 이종찬, 제22연대장 중령 김응조, 제23연대장 대령 김종순, 제26연대장 대령 이치업
• 적군 : 제2군단장 중장 김무정, 제5사단장 소장 마상철

③ 작전계획
본 양양-간성 진격전의 작전 계획은 1군단 작명 제109호에 의거 수립되었다.

〈1군단 작명 제109호〉
1. 군단은 차기 작전을 용이케 하기 위하여 일부 병력으로써 북진하려한다.
2. 수도사단장은 즉시 예하부대 병력을 집결시켜 평창-광원리-서림가도를 전진하여 차기 작전을 준비하라.
3. 제 3사단은 현재의 추격을 계속하여 양양을 점령, 확보하는 동시에 수도사단의 38도 분계선 이북 진출을 용이케 하라.
   진출 후 양양-인북천의 도로망을 급속히 조사, 보고하라.

이에 따라 제 3사단장은 적을 급속히 추격하여 38도 분계선 개설진지에서 지연됨이 없이 일거 양양을 점령하고 적이 최종적인 결전을 기도하리라고 판단되는 원산을 목표로 북진할 결심을 하였다.

④ 양양-간성의 진격전(1950년 10월)

• 10월 1일
이 날은 일요일이자 쾌청한 날씨였다. 사단 작명에 따라 사단 선견연대인 제23연대(연대장 대령 김종순)는 제3대대(대대장 소령 허형정)를 선두로 05:00에 양양을 목표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10:00에 제3대대의 선두가 상구면 영고리(주50) 에 이르렀을 때, 우측방의 적으로부터불의의 사격을 받게 되었다. 이곳에서 대대는 1시간여에 걸친 치열한교전을 전개하여 적 25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한 외에 기관포 3문, 수냉식 기관총 2정, 체코식 경기관총 2정, 장총 12정, 및 다발총 2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둔 다음 양양에 육박하고 있었다.

• 10월 2일
이 날도 쾌청한 날씨였다. 공격 제대인 제23연대의 주력 부대는 10:30에 숙영지를 출발하여 14:00에 목표인 양양에 저항 없이 돌입하였으나, 그 곳 뒷산으로부터 적의 경미한 반격이 있었다. 그런데 이무렵에는 서림-양양 가도를 진격하는 수도사단 제18연대(연대장 대령임충식)도 양양의 서측으로 돌입하였다.
이와 같이 양양을 탈환한 연대의 주력부대는 북으로 진군을 계속하여 17:00에는 강선리에 진출하였고, 춘양 방면으로 출동하였던 제1대대(대대장 소령 김심영)는 9월 29일 양양으로 이동해 왔으며, 연대 본부는 전날 20:00 묵호항을 출항하여 이 날 미명, 주문진에 도착하였다.
제26연대(연대장 대령 이치업)는 전날 밤 23:00, 주문진을 출발하여 이 날 18:30에 38도 분계선을 넘어 양양에 돌입한 다음, 제23연대와 함께 17:00에 강선리로 진출하였다.
제22연대는 강릉 경비의 임무를 끝내고 전진 부대의 뒤를 이어 양양에 이동, 집결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강릉에 주류하였던 사단 공병대대도 양양으로 이동하였다. 이리하여 양양 선에서 저항을 기도하였던 적의 주력 부대는 간성으로 퇴각하였고, 그 일부는 양양 서북쪽에 솟아 있는 설악산으로 진입하였다.

• 10월 3일
사단은 전방 지휘소를 양양으로 이동시켰고, 주력 부대는 계속 원산을 지향, 북진을 감행하였다.
전날 제23연대의 후속 부대로 전진한 제26연대는 이 날 강선리에서 제23연대를 초월, 공격하여 12:50 무난히 간성을 탈환하였다. 그리고 제23연대는 제26연대의 뒤를 이어 진격하였는데, 간성에서 동 연대를 초월한 다음, 패퇴하는 적을 추격한 끝에 12명을 사살하고 10명을 포로로 하였고, 소련식 장총 3정, 수냉식 경기관총 14정, 체코식 경기관총 11정 등을 노획하였으며, 18:00 거진리(간성 북쪽 10㎞)에 집결하였다. 이와 더불어 연대 본부도 이 날 06:00에 주문진을 해로로 출항하여 속초항에 상륙하였다.
사단의 공병대대는 이 날 양양을 출발하여 간성으로 이동하였으며, 포병대대는 변동 없이 각 연대를 지원하면서 일면 약진과 일면 포진을 반복하였다. 특히 이 날 양양의 사단 사령부는 03:00에 일반 명령 제3호에 의거하여 사단 수송중대를 편성하였고, 그 초대 중대장에는 홍두호 소령을 임명하여 명실 공히 수송 임무의 수행을 위한 조직 체계를 확고히 하였다.
그리고 군단 사령부에서도 아군의 급속한 진격으로 산악지대에 잠입하였던 적병들이 수시로 아군의 후방에 출몰하여 군용차량을 비롯하여 지서와 주요시설 등을 습격하였기 때문에 이를 섬멸할 목적으로 제3, 제5유격대를 편성하여 군단 직할로 두었으며, 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이 날 군단 사령부를 방문한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 제5공군 사령관 패트리지 소장 등과 비밀회의를 개최하고 작전 전반에 관한토의를 했다.

⑤ 양양-간성 진격전의 결과
10월 1일 38도 분계선상에서 북진을 개시한 사단은 1일 평균 24㎞의 진격속도로 총 연장 168㎞에 달하는 고저선에까지 진출하였다.

기간 중 사단은 후방에서 보급로를 차단하는 적을 정면으로 충격하지 않고 그대로 분단하면서 상호간의 연락이 중절되는 가운데 주야로 도보, 또는 차량에 의해 북진을 계속하였거니와 그 중 대다수의 병력이 군화마저 제대로 신지 못한 채 피가 흐르는 맨발로 강행군을 단행하기도 하였으나, 실지 회복으로 사단의 사기는 날이 갈수록 앙양되기만 하였다. 사단의 정면에서 패퇴한 적 제5사단은 2400명 규모의 병력으로 박격포와 76㎜직사포로 계속 저항하였고, 도로에는 많은 지뢰가 매설되어 있었으므로 선두 차량은 심한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또한 적은 상호 연결된 참호나 동굴, 또는 벙커에 의지하여 사단의 진격을 저지, 또는 방해하려고 끝까지 완강한 저항을 되풀이하였으나, 사단의 돌풍 같은 북진 위세를 능히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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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9) 인터넷 자료. 전쟁기념관 홈페이지(www.warmemo.co.kr)에서 전재.

(주50) 오늘날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오타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