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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38선 돌파결정(1950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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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333회 작성일 2010-04-07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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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군의 38선 돌파결정(1950년 10월 1일)(주48)

유엔군측은 9월말 9․27훈령에 따라 은밀하게 38도선 돌파작전계획을 준비하는 한편 공개적으로 결의안을 추진중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 정부는 928훈령에 관한 통보를 받지 못하고 북진명령이 하달되지 않자 대단히 초조하였다. 맥아더 장군과 무초 대사는 중공과 소련을 자극시키지 않기 위하여 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미리 알리지 않고 38도선 돌파를 조용히 수행할 예정이었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9월 29일 오전 중앙청에서 거행된 환도식이 끝난 다음 맥아더 장군과의 대화에서 심각한 얼굴로 “지체 없이 북진을 해야 합니다”라고 한 자신의 주장에 맥아더 장군이 “유엔이 38선 돌파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대의사를 표명하자 “유엔이 이 문제를 결정할 때까지 장군은 휘하부대를 데리고 기다릴 수 있지만 국군이 밀고 올라가는 것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 아니오? 여기는 그들 국군의 나라요. 내가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우리 국군은 북진할 것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하였다.

그런데 이 날 워커장군이 “제8군은 재편성을 위하여, 그리고 돌파명령을 대기하기 위하여 38선에서 정지할 예정이다”라고 기자들에게 통지하였다는 보도가 나돌았다. 이는 이대통령의 분노를 자아내었고 국민과 국군의 사기를 상하게 하고도 남았다.

이와 같이 38선 돌파사안을 두고 피아간의 대립은 물론 한미간에도 정략상의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을 때 전선에서는 국군의 추격전이 맹렬하게 전개되어 9월 29일에 국군제3사단이 강릉으로 치닫고 수도 사단이 대화까지 진출하는가 하면 제6사단과 제8사단이 충주와 단양을 점령하여 38선을 하루 진격거리에 두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이 지체 없이 북진을 하려면 더 이상 이 문제로 시간을 끌 수 없다고 단안을 내리고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국군통수권자로서 독자적인 주권과 통수권을 행사하겠다는 결심 하에 이 날 오후 2시 대구에 있는 육본에 들러 육군 수뇌부를 긴급소집 하였다.

대통령 앞에 정일권 육해공 총사령관을 비롯한 참모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국군의 통수자는 맥아더 원수냐? 그렇지 않으면 이 나라의 대통령이냐?”고 질문한 다음, “유엔은 우리가 38선을 넘어가서 국토를 통일시킬 우리의 권리를 막을 권한이 없다. 따라서 나는 우리 국군에게 북진을 시킬 생각인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하면서 의견을 물었다.

이에 대하여 정일권 총사령관은 “이 문제는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은 이미 대통령께서 서명하신 문서에 의해 유엔군총사령관에게 이양되어 있으므로 지금 또 다시 이중으로 명령을 하시게 되면 혼란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고 북진에 관해서는 유엔에서도 조만간 결정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오니 좀더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소관의 의견은 단지 군사지휘계통과 관련시켜 말씀드리는 것이고 대통령께서 정치적으로나 또는 국가의 대계로 보나 꼭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명령을 내리신다면 저희들은 오직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참모들도 총사령관의 의견에 동의하자 대통령은 품안에서 명령서를 꺼내어 정일권 총사령관에게 주면서 “북진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명령에는 ‘내가 이 나라의 최고통수권자이니 나의 명령에 따라 북진하라’고 쓰여 있고 끝에는 ‘晩’자의 서명이 있었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정일권 총사령관은 단독으로 북진하기를 결심하고 우선 제8군사령관을 만나 일단 협의를 하기로 하였다. 38선돌파를 요청하기 위해서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만 했다. 그는 이미 강릉에 전진하고 있는 국군 제1사단 김백일 준장에게 연락하여 “38선 북쪽에 어느 고지를 점령하지 않으면 아군이 진격하는데 큰 손실을 입게 될 만한 고지가 없겠느냐?”고 물었다. 얼마 후 제3사단 정면 38선 북쪽(하조대)에 그런 곳이 있다고 회전이 왔다.

이 보고를 받고 정일권 총사령관은 즉각 제8군사령관을 방문하여 “제3사단이 38선 바로 북방에서 적의 치열한 사격으로 큰 손실을 입고 있으니 부득이 이 고지를 점령하여야겠다”고 말한 다음, “이 고지를 점령하였다고 해서 38선에 기하학적으로 뚜렷한 선이나 어떤 장벽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를 공격하게 하여 달라”고 역설하자 워커장군도 쾌히 승낙하였다.

이리하여 9월 30일 정일권 총사령관은 강릉의 제1군단 사령부를 방문하고 38선에 도달한 제3사단 제23연대의 진지에 나가 전선을 둘러본 뒤 38선 돌파를 군단장에게 구두로 명령하였다. 북진명령은 최초구두명령에서 성문화된 작명으로 작성되어 제1군단 작명 제103호와 제3사단 작명 제44호로 하달되었다. 이에 따라 국군은 1950년 10월 1일을 기하여 역사적인 38선 돌파작전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10월 1일의 38선 돌파결정은 이대통령의 결단과 북진명령, 정일권 총사령관의 적절한 조치에 의해 한미간에 큰 마찰 없이 잘이루어졌으며 이로써 38선 돌파의 선봉을 국군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다음날 하달된 유엔군사령부의 작전명령 제2호에 의해 뒷받침이 이루어졌고 유엔군은 10․7유엔결의 후 북진작전에 돌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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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8)『한국전쟁(상)』, 국방군사연구소, 1995, 493-4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