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남한의 창군과정

페이지 정보

조회 4,501회 작성일 2010-04-07 17:12

본문

 남한의 창군과정(주34)

해방 직후에 사설 무력단체가 난립했다.

1945년말 조병옥 경무부장이 국방부의 설치를 건의했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중장은 그러면 창군계획서를 제출하라고 하였다.

1945년 11월 13일 공포된 군정법령제호에 따라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예하에 군무국과 경무국을 두고 28 군무국에 육군부와 해군부를 설치하였다.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하였다. 약 4개월 간 축차적으로 110명을 임관시킨 후 폐교하였다. 최초 미군정은 학생의 정원을 60명으로 하여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출신들에게 각각 20명씩으로하고 입교자격을 소장경력자들에게 한정함으로써 파벌이 조성되는 것을 방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광복군 출신자들의 대부분은 장차 국군이 광복군의 법통을 계승해야 한다는 명분론을 내세우며 응모를 기피하여 소수만이 입교하였고, 좌익계는 처음부터 외면하였으므로 입교한 학생의 대다수를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자들이 차지하였다.(임관 110명 중 광복군 출신이 2명,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이 108명이었다.)

1946년 5월 1일 남조선 국방경비사관학교를 새로이 창설하고 군사영어학교에서 졸업치 못한 인원들을 입교시켰다. 후에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칭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정치적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군 창설에 관한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으며, 그 대신 점령군의 경비부담을 덜기 위해 경찰을 미군무기로 장비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경찰예비대 창설안(뱀부 계획)은 1개 도에 1개 연대 총 2만5천 명 규모의 8개 연대를 편성토록 되어 있으며 이를 뱀부계획이라고 불렀다. 이후 조선경찰예비대 또는 조선국방경비대라는 명칭으로 군 창설이 이루어지게 되자, 대부분의 사설군사단체는 해체하였고, 그 요원들은 경비대로 흡수되었다. 조선국방경비대는 군정법령(46.1.14)에 기초하여 경찰예비대 2만5천 명과 해안경비대를 설치하게 되었다.

창설 시 간부는 주로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을 배치하였다. ‘불편부당’이란 구호를 내걸고 사상문제를 거론치 않음으로써 좌익사상을 지닌 이도 다수 입대하였다.

1947년 3월 도로 승격된 제주도의 제9연대를 포함하여 9개 연대를완전 편성하였으나 대구의 제6연대는 구성원 중 좌익세력이 물의를 일으켜 편성이 늦어졌다. 이때 연대 편제는 3개 대대, 대대는 3개 중대의 편성이었다. 일본군의 38식 및 99식 소총으로 장비하였다. 1946년 9월 이후 점차 미제 병기와 미국식 피복으로 전환해갔다.

1946년 3월 29일 군정청의 각국이 부로 승격되자, 국방사령부를 국방부로 승격, 이를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대표가 문제삼자, 다시 국내경비부로 개칭하였다. 이를 한국 측에서는 통위부(統衛部)로 호칭하였다. 군의 정통성을 유지하고 독립의 의미를 되새긴다는 의도에서 통위부장을 광복군계 인사로 천거하여 9월 12일에는 한국인으로서 초대 통위부장에는 유동렬 장군이 취임하였다. 통위부장의 취임을 계기로 사실상 군의 지휘권이 한국인에게 이양되고 미군은 고문관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경비대 총사령부를 비롯한 각 연대의 지휘권도 한국인이 행사하였다.

1947년 10월 미소공동위에서 점령군 철수문제가 제기되자, 미군 측에서 경비대를 5만 명으로 증원하되 필요시 포병화기 및 장갑차량을 제공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한국의 국내치안 유지능력의 개선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미군 철수에 대비키 위한 것이었다. 통위부에서는 장차 정부 수립 후의 국방을 고려하여 1947년 12월 1일부로 기존의 9개 연대를 3개 연대씩 묶어 3개 여단을 편성하였다. 이와 함께 모병에 박차를 가하여 1948년 4월~5월에 추가로 연대와 여단을 증편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남한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조선경비대는 국군이 되었다. 정부조직법에 따라 국방부가 육․해․공군을 담당하였다.

국군조직법에 따라 군은 기능에 따라 육군과 해군으로 조직하되 통수권을 대통령이 장악하고 역종에 따라 정규군과 호국군(예비군)으로구분하였다.

 미국의 대한정책 상 지원불가 원칙에 따라 공군은 창설되지 못하고 육군에 항공부대로 두었다가 독립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육군은 5개 여단에 15개 연대를 보유하였다. 2개월 후에는 1949년 1월까지 6개 여단 20개 연대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이때 주한미군으로부터 38선 경비임무를 인수함으로써 비로소 국군으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당시 한미잠정행정협정에 의거 철수하는 미군으로부터 5600만 달러에 해당하는 5만 명분의 소총과 탄환, 2천 문의 로켓포, 각종차량 4만대, 다수의 경포와 박격포, 포탄 70만 발 등 무기와 장비를 인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수한 장비들은 대부분 낡고 성능이 좋지 못한 것들이었다.

1949년 5월 12일에 6개 여단을 사단으로 개편하였다. 6월 10일에 다시 8사단과 수도경비사령부를 창설함으로써 총 8개 사단을 확보하였다.

다음 표와 같이 최초의 사단은 3개 연대를 주축으로 본부 및 본부중대, 포병대대, 공병중대, 통신중대, 병기중대, 병참중대, 의무연대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당시 4개 사단만이 3개 연대를 갖추고 나머지는 2개 연대로써 편성되었다. 이중 1,7,6,8사단과 17연대가 38선 경비를 담당하였고, 그밖에 사단은 후방지역 방어, 특히 빨치산 토벌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밖에 육군은 북한에서 탈출한 청년들과 귀순장병들로 수색학교(독립제1대대), 호림부대(영등포학원), 보국대대(제803독립대대) 등 특수부대도 창설하여 남파시킨 유격대와 빨치산의 소탕작전에 동원하는 한편 일부는 대북공작에 참여시켰다.

62.jpg



----------------------------------------------------------------------------------------------------------------------------------------------

(주34) 양영조,『남북한 군사정책과 한국전쟁 1945-1950』, 한국학술정보, 2007, 350-355쪽, 130- 141쪽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