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북파 호림유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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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290회 작성일 2010-04-07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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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파 호림유격대(주29)

한국전사에 잊혀진 전설이 있다. 한국 최초의 북파유격대인 호림부대.

예비역 대령으로 육군 정보국 출신의 김근화(80․육사5기) 씨 역시호림부대의 존재를 확인해 주었다.

“대한민국 군사상 가장 환상적인 부대였습니다. 저는 1948년 12월 국방부 제4국 창설에 참여, 군사교관으로 임명됐어요. 제4국에는 강원도 주문진에 거점을 둔 동해특별대(대장 백의곤)와 태백산에서 활동하던 오대산 유격부대(대장 김현주)가 소속돼 대북첩보공작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국방부 제4국 소속이던 호림부대는 1949년 육군정보국 직속 특수부대로 개편, 육군 호림부대로 명명됐다. 작전을 하달하는 주체가 국방부에서 육군으로 바뀐 셈이다. 그러나 대내외적 국가기밀을 유지하기위해 현역장병이 아니라 민간인 신분으로 부대를 편성했다.이승만 정권 당시 교통부 장관을 역임한 문봉제(1915-2004) 씨의 생전회고다. 그는 호림부대 창설 당시 국방부 고문으로 위촉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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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림유격전적비(사진제공 : 전쟁기념관)



“저는 육군 수색학교에 서북청년단원 300여 명을 입교시켰습니다. 이는 정책적 차원이었으며 조만식 선생 비서를 거쳐 먼저 월남한 백선엽을 정보담당으로 하는 육군본부 정보국장 취임도 건의했어요. 부대명은 맹호출림(猛虎出林)이라는 평안도 기상의 표어에서 虎자와 林자를 따서 호림부대로 칭하게 됐습니다.”

군번 없는 군인들의 전사는 이후 호림유격전우회가 결성되면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2,3대대 대원들이 중심이 돼, 흩어졌던 5,6대대 대원들을 불러모았다. 십시일반 돈을 모으고 정부지원을 받아 1986년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통일안보 공원 내 호림유격전적비(주30)가 세워졌다.

전적비를 세울 당시 외무부는 6․25북침자료로 악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건립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반대했고, 내무부와 국방부역시 북괴가 악용할 수 있으니 신중하게 처리하라고 건립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안기부가 북괴 악용의 실보다 안보의식 고취 효과가 클것으로 판단된다고 주장해 그 뜻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전사자들이 국립묘지에 묻히기까지는 다시 7년의 세월이 흘렀다. 2003년 지난한 병적 확인 작업을 거쳐 전사자 174명(장교 2명,사병 172명)이 국립 현충원에 봉안된 것이다. 숨진 지 54년 만에 겨우 신원을 회복한 셈이다.

하지만 몇 해 전 결성된 호림유격전우회(회장 황휘성)가 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육군첩보부대(HID) 창설 이전에 구성돼 유격전 등에 종사한 경우는 보상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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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9) 김태완,「북파 호림유격대」,『월간조선』2006년 7월호, 386-401쪽 발췌요약. 호림부대에 관한 인용은 앞에서 몇 편을 하였으므로 앞의 몇 편에서 빠진 내용들만 발췌게재함.

(주30) 사진제공 : 전쟁기념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