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호림부대의 대북침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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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7,052회 작성일 2010-04-07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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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림부대의 대북침투(주28)

한국군이 38선의 서쪽끝인 옹진반도에서 은파산을 점령하고 까치산을 탈환한 시점에 38선의 동쪽 끝에서는 주목할 만한 사건 두 가지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하나는 호림부대라는 남한특수유격부대의 북한 침투였고, 다른 하나는 정규군의 양양공격, 즉 제2차 고산봉 전투의 발발이었다. 38선의 양극단인 옹진과 양양은 남북한 모두에 의해 그 중요성이 강조된 지역이었고, 서로 정규군과 유격부대로 상대방을 공격했던 지점이었다.

1949년 6월 28일 북한에 침투한 호림부대는 지금까지 그 실상이 감추어져 있다. 사사키는 북한으로 침투한 호림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썼지만, 비운의 이 부대는 실재했다. 개정판 한국전쟁사 는 이들이 북한에 침투했다는 사실을 제외한 채 1949년 2월 25일 이북출신 367명을 기간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으로 창설되었고, 특무과장 한왕룡 소령이 부대장을 맡았다고 기록했다.

이들은 남한의 특수부대 양성소인 경기도 수원 수색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훈련종료 후 1949년 2월 26일부터 부대장 한왕룡의 지휘 하에 거제도와 경상북도에서 반군토벌에 참가해 대원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하는 등의 실전훈련을 쌓았다. 5월 25일 이들은 서울로 귀환해 이범석 국무총리와 사회․법무․농림부 장관 등이 임석한 가운데 국무총리의 사열을 받았다. 이범석은 호림부대를 찬양했으며, 신문은 이들이 국방부 제2국 소속 호림부대이며 단원은 557명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채병덕 - 정보국장 백선엽 - 정보국 5과장 한왕룡으로 이어지는 지휘계통에 놓여 있었다.

미군사고문단과 미대사관 역시 호림부대의 존재 및 활동을 알고 있었다. 이들 역시 정기적으로 호림부대에 대한 보고를 받았으며, 호림부대가 원산까지 침투했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호림부대가 설립된 가장 큰 목적은 적의 일선배치 병력을 분산케하기 위하여 아측도 무장유격대를 적의 후방 깊숙이 침투시켜 적의 병력을 분산․배치시키는 길이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1949년 1월 19일 해주의거가 소수의 특수공작원을 동원한 공작계획이었다고 한다면, 6월의 호림부대는 당시 북한이 남파하던 게릴라들과 유사한 형태의 대규모 게릴라였다. 또한 보급장비 면에서 정규군에 버금갔다.

북한이 강동학원 등 빨치산 양성소를 세워놓고 지속적이고 대규모로 유격대를 남파한 사실에 비춰본다면 한국정부 역시 그에 상응하는 맞대응을 한 것이다.

이들은 정규군이 아니었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정규군 투입에 대한 미군사고문단의 반대와, 지원병제에 따른 국군의 한계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민간반공단체로 특수공작을 하던 계림공작대와 다른 반공 단체를 중심으로 호림부대가 편성되었다.

호림부대는 1949년 6월 20일부터 강원도 횡성에서 대대 편성을 해, 백의곤과 김현주를 각기 5대대장, 6대대장으로 하는 총원 150명의 2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6대대는 현역군인 여럿과 여순사건, 제주사건에 참전했던 경찰관출신 20여 명이 핵심을 이루었다.

부대 대호가 5대대, 6대대로 명명된 것은 북한군에게 대규모 부대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대원들에게는 일본제99식장총, 탄환120발, 미제수류탄3개씩이 지급되었고 북한 보안대 복장으로 위장하게 했다. 이외에 경기관총, 지뢰폭탄 수십 개, 다이너마이트, 독약, 전선절단기, 북조선은행권 50만 원, 사진기 등의 장비가 보급되었다.

이들은 1949년 6월 28일 강원도 양양군 서면 진동리 오색리지구로침투했다. 5대대는 양양군 강현면과 속초면으로, 6대대는 인제군 북면 서화면으로 침입했다. 북한측 기소장에 따르면 이들은 중요공장․기업 소․교통선의 파괴, 정권기관․정당․사회단체 중요간부 암살, 방화, 살인, 산독(散毒), 민심 교란, 군사비밀 탐지 등의 임무를 띠고 있었다. 특히 재판 과정에서 북한은 호림부대의 활동이 “마치 공화국 인민군대 내부에서 군인들이 공화국을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킨 듯이 대내외적으로 허위선전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호림부대 관련자인 이흥렬이 밝힌 호림부대의 목적 역시 이와 같았다.

1. 설악산을 거점으로 하고 동부산악지대를 북상하여 인근 소읍부락을 기습하고 내무서 습격,
   교량 및 교통도로 절단, 보급창고 등의 파괴를 감행한다.

2. 적 부대와는 가급적 전투를 피하고 각처에 출몰함으로써 적의 치안상태를 극도로 마비할 것

3. 적 대부대를 산악으로 유인하여 적의 주력을 마비시켜 전투력을 상실케 하고 我부대는 적의 포위망을 돌파,
   적의 방어가 약한 소읍면을 기습한다.

4. 현지 반공애국청년을 가급적 포섭하여 부대원으로 편입시킨다.

5. 투항한 북괴군 및 내무서원 및 악질적인 당원은 포로로 하고 보급품을 운반케 한다. 본 유격대가 철수 시 같이 철수 후송한다.

6. 무기 및 식량 기타 필수품은 현지조달하고 주민의 물품에 대하여서는 대금을 지급한다.

아마도 북한은 한국군 특수부대의 월북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6월 14일 북한 내무상의 지시로 각 시군 내무서장에게 보내진 긴급지시는 “이남 춘천주둔 괴뢰국방군 192부대에서 파견하는 특별공작대 130명”이 북한에 침입해 폭탄, 독약 등으로 파괴, 암살, 인명살해를 목적하며 복장은 사복으로 가장한다는 ‘이남정보’를 이첩하며 이에 대한 대비책을 경고한 바 있다. 호림부대의 침투에 따라 1949년 7월 북한지역 강원도 인제군은 당․정․군 모두 초비상상태였다. 북한 내부문서에 따르면, 해당지역 북한 당․정권기관들은 전투, 자위, 반간첩사업, 전투사업협조 등 완전한 전시상태에 돌입했다.

북한 조선노동당 인제군당은 38선 경비를 위해 밤낮으로 주민들을 500m거리로 경비를 서게 할 정도였다. 북한 내무성은 7월 29일 호림부대를 완전히 소탕했다고 보도했지만, 실제로는 9월에 가서야 이들의 자취가 사라졌다.

북한측 집계에 따르면 피해상황은 38선 연변 전답1만1859평 토지에 파종을 못했으며, 4800평이 未제초, 주민11명 납치, 피살29명, 가옥11채 소각 및 파괴, 축우15두 손실 등이었다.

북한측 자료에 따르면, 호림부대원 106명이 사살되었고, 44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들에 대한 공판은 8월 28일 열렸고, 9월 11일 전월성 ․ 이한기 ․ 조석풍 등에 대한 공판은 모란봉극장에서 공개재판으로 열렸는데, 이들 모두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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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8) 정병준,『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돌베게, 2006, 370-375쪽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