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호림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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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642회 작성일 2010-04-07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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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림부대(주26)

호림부대는 반공청년단체, 특히 서북청년회의 반공활동의 산물이다.

이미 서북청년회에서는 이범석 국방부장관에게 국군도 북한의 게릴라 남파에 대응하여 강동정치학원과 맞먹는 비밀유격대를 창설할 것을 수차 건의했다. 1947년 7월 서북청년회 강원도 횡성지부 위원장 박만하와 기린지부 위원장 박동학이 힘을 합해 영동지부에 계림공작대를 조직했다.

대원들은 백의곤의 지휘아래 대북첩보수집활동, 북한내 지하조직 구축 등을 수행했다. 정부수립 후, 계림공작대는 국방부 제4국과 연계된 동해특별유격대로서 동부지역에서 대북첩보활동을 전개했다. 1949년 2월 25일 국방부 제4국이 해체된 후, 육본정보국의 지원을 받아 호림부대로 확대개편되었다.

대원의 규모는 불분명하다. 2월 26일 거제도와 경북 일대로 좌익빨치산을 토벌하러 나갈 때는 557명이라는 보도가 있었으나, 367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총지휘관은 정보국 특무과장 육군소령 한왕룡이었고, 부대장은 강종철이었다. 제5대장에 백의곤 대위, 제6대장에 김현주 대위가 임명되었다. 당시 제5대대와 6대대로 칭한 것은 북한군에게 대부대로 오인시키기 위해 위장한 것이었다. 대대는 본부와 3개 중대로, 중대는 3개 소대로, 1개 소대는 12명 등으로 편성되었다. 제5대대와 제6대대의 병력은 각각 120명씩 편성되었다.

전쟁 전 대북작전은 일시적인 반격작전을 제외하고 호림부대의 작전이 처음이었다. 1949년 5월 국군 제8연대 예하 제1대대(표무원 소령)와 제2대대(강태무 소령)의 집단월북사건 이후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제6사단 제1연대가 사단장에게 알리지도 않고 1개 소대 병력을 동원해 북한군 후방까지 침투하여 북한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나 아군 3명도 전사하는 사건이 있었다.

7월 4일에도 제6사단 10연대 연대장 송요찬 중령이 육군본부나 美고문관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북한의 게릴라 남파를 봉쇄하기 위해 제1대대(대대장 소령 고백규)를 출동시켜 양양에 있는 인민유격대 재훈련소와 기타시설을 파괴한 양양돌입사건이 있었다.

호림부대원들은 거제도 좌익빨치산 토벌에 참가하여 경험을 쌓은 후 1949년 6월 23일 수색학교를 떠나 북한으로 침투하기 전 채병덕 총창모장의 훈시를 들었다고 한다. 침투목적은 설악산을 거점으로 동부산악지대를 북상하여 적의 경계가 약한 읍․면의 행정기관 기습, 교량 및 주요도로 파괴, 창고 방화, 정당사회단체의 간부 암살에 의한 민심교란, 군사기밀 탐지 등이었다.

제5,6대대는 6월 27일 양양군 서림에 도착한 후 행군으로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로 이동한 후 적정파악을 위해 이틀간 주둔했다. 가랑비가 내리면서 짙은 안개가 내린 6월 29일, 북한군 복장으로 99식 장총과 수류탄, TNT로 무장한 채 이 지역 지리에 밝은 제5대대가 선봉이 되어 38선을 돌파하여 태백산맥의 점봉산을 넘고 박달령을 거쳐 양양지구 오색촌으로 침투했다. 계속 북상하여 설악산 대청봉 1708고지로부터 동북쪽 6㎞지점에 위치한 봉정암에 집결했다.

이곳으로부터 제5대대는 영동지구로 진출하고 제6대대는 영서중부 고원지구로 북상하여 7월말에는 양덕맹산지구에서 합류할 계획이었다. 제5대대는 7월 2일 목적지인 설악산 북쪽 2㎞ 떨어진 화채봉으로 이동하여 최초의 근거지를 확보했다. 그런데 북한 보안대원이 남한에서 국군이 설악산으로 잠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요소마다 경비를 강화하고 있다는 점을 현지첩보원으로부터 제공받았다. 이에 따라 대대장은 화채봉을 떠나 상복리로 이동했다. 상복리에서 대대는 그동안 주민들에게 박해를 가해온 상복리 노동당위원장과 당원 한 명을 처치했다. 7월 8일 새벽에 대대가 상복2구의 피골이란 마을을 통과할 때, 보안대원 6명이 마을에서 잠자고 있다는 정보를 주민들로부터 입수하여 이들을 모두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했다.

10일부터 약 1개 소대 규모의 적으로부터 추격을 받았다. 경계근무를 하고 있던 대원들이 반격하여 6명을 사살하자, 나머지 적들은 퇴각했다. 대대는 적의 재차공격을 예상하고 근거지 이동과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큰령을 향해 이동했다. 이튿날 낮 대대 주력이 큰령 마루턱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보안대원 3명을 생포하고 마을을 기습하여 식량을 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적 소대병력이 후속하고 있어서, 대대는 산 위의 유리한 지형으로부터 사격을 가해 적을 물리쳤다. 대원들은 마을로 진입하여 식량을 구한 후 마산(馬山)(주27)으로 이동했다.7월 12일 마산 근처의 산에서 숙영을 하고 있을 때, 적 1개 소대 규모의 병력이 추격해왔다. 대대는 유리한 지형에 위치했기 때문에 방어에 유리했다. 2시간의 교전 끝에 8명을 사살하고 소련제 장총 6정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대대장은 퇴각한 적이 재차 공격을 위해 많은 인원을 동원할 것으로 판단하고 적중에 고립될 것을 우려하여 즉각 향로봉으로이동했다. 행군 도중 대대는 인제에서 간성에 이르는 도로상에 교량 2개소를 폭파하고 7~8명의 병력을 태운 목탄트럭을 기습하여 차량을 파괴하고 병력을 모두 사살하기도 했다. 대대는 향로봉을 거쳐 7월 15일 삼치령으로 진출했다.

이때 적은 유격대가 향로봉-금강산 선으로 침투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남강-삼치령-노루메기-대방골을 연하는 선을 봉쇄하고 있었다. 대대는 삼치령 마루터 약100미터 지점에서 적의 봉쇄로 진퇴양난에 빠졌다. 백의곤 대대장은 이를 타개하기 위한 작전을 간부들과 숙의하고 있을 때 계곡에 짙은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 대대장은 이때를 이용하여 적의 봉쇄선을 돌파하기로 결심하고 적진 30미터 지점까지 접근시킨 다음 일제사격을 가하며 적진으로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대대는 적 48명을 사살하고 소련재 장총38정, 다발총6정, 경기관총2정, 수십 발의 수류탄과 수천 발의 실탄, 식량 등을 노획했으나, 임석순, 김정덕이 전사하고 수명이 부상을 입었다.

적의 봉쇄선을 돌파한 대대는 금강산을 따라 북상하여 7월 16일 내금강의 국사봉에 도달하여 삼각고지를 점령한 후 병력을 배치했다.

이 날 19시 30분경 대대를 추격해온 북한군이 삼각고지를 동남북으로 포위하여 공격해왔다. 국사봉 부근에서 적에게 포위를 당해 대대장 이하 많은 대원들이 희생되었다. 탈출에 성공한 대원들은 각자 분산된 상태에서 남쪽을 향해서 남하했다. 이들 중 많은 대원들이 적의 차단선에서 체포당하고 일부는 화전민들의 도움을 받아 적의 경계선을 뚫고 원대로 복귀했으나 생환대원의 수는 23명에 불과했다.

이 작전에서 김종호, 추병한 등 현지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현지주민을 통해서 지형의 안내는 물론 인민위원회의 동태까지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식량을 조달받았다. 이러한 협조를 했던 상복리 주민 가운데 김영옥, 김몽수 등은 남한으로 탈출했으나, 김종우, 조만순, 양영길 등은 강현면 내무서원에 의해 체포되어 원산 감옥으로 이관되었다. 그 곳에서 모진 고문과 혹독한 처벌을 받았으며 일부는 처형당했다고 한다.

제5,6대대 귀환대원들과 제2,3대대 대원들은 1949년 7월 12일 육군 호국군에 편입되었다가, 현역으로 편입되기를 원하지 않는 대원은 제대하고 나머지는 같은 해 11월 13일 현역에 편입되었다. 그 후 육군영 등포학원으로 개칭되었다. 부대장 한왕룡 중령 후임으로 홍성준 소령이 부임했다. 부대원들은 삼각지 소재 수도경비사령부 내 병사에 수용되었다. 1949년 9월 15일 공비토벌작전을 위하여 지리산으로 출동했다. 그후 육군 영등포학원은 제3사단으로 배속되어 보현산, 팔공산공비 토벌작전에 참가했다.

전쟁이 일어난 후인 1950년 8월 18일 영등포학원이 해체되자, 대원들은 제3사단에서 팔공산지구, 영덕-강구 방어작전 등에 참가했다. 이때 대대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수도사단으로 전속되고, 대대본부 요원들은 제3사단 수색중대로 배치되었으며 중대원들은 제23연대 제 1,5,9,11중대에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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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6) 조성훈,『한국전쟁의 유격전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3, 71-79쪽 요약.

(주27) 마산은 양양군 서면 오색1리의 마산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의 마산은 간성읍 흘2리의 마산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