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1949년대 38선 충돌사건

페이지 정보

조회 8,421회 작성일 2010-04-07 18:02

본문

 1949년대 38선 충돌사건(주24)

1949년 1월초 일부지역의 한국군경이 월경함으로써 총격전이 수행되었다고 하였다. 주북한 소련대사 스타코프 보고는 38선 부근에 남한군경이 근접하여 1월 15일~25일 사이 월경사건이 증가되고 있으며, 그 규모는 경찰소대병력 정도라고 하였다. 특히 2월 4일 동부지역 기사문리 침입의 경우 북한이 보병부대까지 투입하여 반격전을 수행할 정도로 심각해지고 있었다. 38선 접경지의 북한주민들이 부분적으로 동요하여 후방으로 이동하는가 하면 부락단위별로 자위대를 강화하고 있었던 사실에서도 이러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쌍방의 자료에 의하면 이 시기의 충돌은 서로에게 발화의 책임이 있다고 전가시키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충돌원인은 남한군경이 전술상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38선 너머의 고지 일부를 장악하려 했기 때문에 발화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때의 대체적인 충돌양상은 남한 군경이 주요고지를 점령할 경우 북한이 경비대와 인민군을 투입하여 이를 격퇴하거나 월남하여 보복전을 수행하는 양상을 띠는 것이었다.

전투가 크게 확대되지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남․북한군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가 빈약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북한군의 경우 38선에 2개 경비여단에 배치되어 있었지만 주로 소총으로 무장되었으며 그나마 개인당 3발~10발의 탄환이 지급되는 정도였다. 한국군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전투의 최초 발화는 1949년 5월 4일 한국군 제11연대 2개 중대가 개성북방 292고지를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개성전투는 5월 4~5일 이루어진 한국군 제8연대 강태무/표무원 대대의 집단월북과도 일정한 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이들은 숙군의 위기상황에서 훈련을 위장하여 38선으로 접근한 뒤 부대를 이끌고 월북한 것이었다.

이 무렵 38선 접경지역은 미군 철수 직후 전선에 배치된 한국군이 진지를 보강하고 있었으나 양양 공수전리 사건 등 몇몇 사소한 충돌 외에는 비교적 조용한 편이었다.

----------------------------------------------------------------------------------------------------------------------------------------------

(주24) 양영조,『남북한 군사정책과 한국전쟁 1945-1950』, 한국학술정보, 2007, 178-1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