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김석원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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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3,925회 작성일 2010-04-0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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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석원 장군(주23)

김일성 역시 김석원이 간삼봉 전투 시 자신들을 토벌하러 출동했던 함흥연대장이라고 믿고서, 일제의 앞잡이가 이제는 미국의 앞잡이가되어 38분계선 이남에서 공화국 북반부를 반대하는 불장난을 하고 있다고 격앙되어 있었다. ‘지난날 백두밀림에서 그 놈과 싸우던 우리 동무들이 오늘은 38분계선에서 또 그 놈과 맞서 싸우고 있다’는 김일성의 발언은 당시 남한군 지휘부를 바라보는 북한측의 시각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북한의 최고지도부를 형성한 빨치산 출신의 임춘추, 최현, 김일성등은 모두 김석원이 1937년 6월 (함흥) 간삼봉 전투에서 자신들을 토벌하러 온 김소좌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간삼봉 전투에 출전했던 것은 김석원이 아니라 김석원과 일본육사 27기 동기생인 김인욱이었다.

김소좌를 김석원으로 지목한 것은 1960년대 임춘추였으며, 그 후부터 북한의 공식적인 입장을 반영하는『조선전사』(19권340쪽) 역시 19사단 함흥 제74연대장 김석원이 간삼봉전투에서 토벌군으로 참가했다가 심한 다리부상을 입었다고 썼다. 이미 1974년 이명영이 이를 바로잡았으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북한군 지도부는 친일파 김석원이 이제는 친미파로 변신해 일제시대의 항일유격대 토벌에 이어 대북공격을 시도한다고 생각했다.

일제시기의 원한과 잔인한 기억, 증오는 해방 후 남북한에 만연한 소문의 진원이 되었다. 심지어 일부 인사들은 김일성이 한국전쟁 당일인 6월 25일 ‘김석원, 내가 너를 잡으러 간다. 이제 너는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라디오방송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할 정도였다.

일본육사27기 출신인 김석원은 중일전쟁의 산서성 동원전투에서 일본군 2개중대로 중국군 1개 사단을 격파해 유명해진 인물이다. 중일전 출전 당시 소좌였으며, 화북에 출전한 20사단 예하 40여단의 첨병대대장으로 출전해 북경 남하촌 전투에서 분전하였고 2차대전 말기에는 대좌로 진급하여 평양병사구 사령부 제1과장을 담당했다.

1939년 김석원이 귀국했을 당시 김석원 부대장을 찬양하는 노래가 제작되었고, 이후 그는 1년 동안 전국을 순회하며 무용담을 선전했다.

그에게는 훈3등․공3급․욱3등의 금사훈장이 주어졌다. 김석원은 1940년 대초 일제의 학병 동원에도 적극 관여했을 뿐 아니라 삼부자가 모두 일본군에 복무한 황군가족이었다.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은 개성지구 1여단(곧 1사단으로 승격)장이 된 김석원의 자질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주한미군군사고문단이 비꼬듯이, 그의 유일한 전술은 반자이(萬歲)전술, 즉 ‘돌격 앞으로!’ 였다. 주한미대사 무초는 이렇게 썼다.

국방부장관, 한국의 참모들, 미고문관 등 모두 김석원을 반대했다. 그 들은 그를 훌륭한 군인이 아니라 허풍쟁이로 생각했다. 그들은 그의 구역에 있는 전선에서 북한군을 자극하고 일본식 반자이 공격을 좋아하고 적절한 예비병력을 남겨놓지 않고 아주 위험한 방식으로 전선에 그의 병력을 배치시키는 등의 성향을 지녔다는 점에서 나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들은 특히 그가 사령부를 무시하고 곧장 이대통령에게 달려가는 것에 반대하였다.

제임스 하우스만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이 채병덕을 참모총장에서 해임하고 김석원을 임명하려는 것을 자신이 직접 나서 로버츠군사고문단장, 무초 대사를 통해 무산시켰다고 증언했다. 무초 역시 김석원을 총장에 임명하면 한국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것이다. 김석원이 1사단을 임진강 서쪽으로 너무 많이 팽창시킨 탓에 북한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대를 위험한 위치에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49년 5월 월북한 강태무․표무원 부대원들은 김석원을 일제에 충실한 가네야마 대좌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심지어 1949년 10월 그가 현역에서 면직되었을 때 주한미군사고문단은 그의 해임이 한국군에게 이로운 조치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한국군 장성들의 김석원 평가도 엇갈리는데, 채명신은 김석원을 구식이지만 자상한 지휘관으로 평가한 반면, 유원식은 직접 제거를 생각했을 정도로 부하들에게 잔인했던 지휘관으로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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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3) 정병준,『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2006, 249-255쪽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