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서북청년회

페이지 정보

조회 9,562회 작성일 2010-04-07 18:31

본문

 서북청년회(주12)

1948년 8월부터 38이북에서 남하한 이북 각도별 단체들은 통합의 필요를 느끼고 이를 추진해가고 있었다. 출신은 비록 각도별로 다르지만, 이들은 서울에 같이 모여 있고, 더구나 보다 효율적인 대공투쟁을 위해서는 우선 크게 뭉치는 일이 절실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렇게 해서 대한혁신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청년회, 북조청년회, 양호단, 평안청년회 등 각 대표간에 통합에 관한 협의가 진행되면서 통합작업이 급속화 되었다. 가칭 서북청년결성준비위원회의 형태로 진행된 통합작업은 명칭에 관해서는 서북청년회에 별다른 이의가 없었으나 간부진의 구성에 있어 다소 논란이 있었다. 결국 모든 준비가완료되어 1946년 11월 30일 서울 YMCA대강당에서 결성대회를 갖고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강령을 정했다.

〈강령〉
―. 조국의 완전자주독립 전취(戰取)
―. 균등사회의 건설
―. 세계평화에 공헌

선우기설을 위원장으로 뽑은 서북청년회가 그 이름을 세인에게 알린 것은 이른바 1947년 3․1절 시위사건으로 인해서이다. 이 날의 경축행사는 민족진영이 서울운동장에서, 공산진영은 남산공원에서 각각 개최했는데, 이 날 경축식을 끝내고 민족진영의 각 단체와 시민들이 서울운동장을 출발, 종로를 거쳐 남대문에 이르렀을 때 좌익들이 좌우의 건물에서 돌연 사격을 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20만에 이르는 행렬이 산산이 흩어졌는데 500여 명의 서북청년회원들만은 행진을 계속했다. 이 사건은 훗날 다음과 같이 평가를 받는데, 그것은 해방 후 불가피한 좌우의 대립이 신탁통치안을 계기로 절정에 달한 때이니 만큼 이 날 벌어진 좌우의 충돌이야말로 양진영의 승패를 가르는 의미를 지녔다는 것이다.

당시 만행을 일삼던 공산당의 행동세력도 서북청년의 세력 앞에서는 움찔했고 ‘서청’ 하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유행어가 나올정도였다.

----------------------------------------------------------------------------------------------------------------------------------------------

(주12) 심재기,『6․25와 민간항쟁』,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기념사업회, 1993, 159-161쪽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