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1) 1945년-1954년간의 양양군 관련 전쟁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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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1,953회 작성일 2010-04-0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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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5년-1954년간의 양양군 관련 전쟁기록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양양군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이북이 되었다.

38선이 지나가는 곳이다 보니 이로부터 많은 사건들이 빈번했다. 민간인들의 월경사건부터 시작하여 1948년 남북에 민간정부가 수립된 다음부터는 군경들 간의 총격전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이런 총격전은 1949년에 특히 심했다. 이런 점에서 38선은 북위 몇 도(°)라는 지리적인 표시 이상의 의미를 한국에선 가질 수밖에 없는데, 특히 양양군의 경우 38선이 지나는 곳이기에 그 강도는 더욱 심했다.

이 항목에서는 군사의 운용 측면에서 남북한 간의 무력의 증강, 그리고 충돌과 관련이 있는 사안들을 위주로 문헌에서 찾아낸 자료들로 꾸며보았다. 이 자료들의 대부분은 양양군과 관련이 있는 자료들이거나 혹은 양양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이해하기에 필요한 자료들이다.

수색대에 관한 여러 정보들은 제보자들로부터 숱하게 들었다. 그런데 수색대대와 관련한 지문을 찾을 수 있었다. 정황상, 이 수색대대가 양양의 주민들이 숱하게 언급했던 그 수색대는 아닐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칭의 유사함으로 말미암아 간략하게 기술하였다. 호국군은 38선 이남의 양양에서 관련자를 몇 분 찾은 적이 있다. 호국군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향토예비군이다. 이 호국군에 관한정보도 주민들로부터 획득한 것은 거의 단편적인 것들이었다. 문헌속에서나마 일부 실체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호림부대와 관련한 기록은 여타 자료와 비교하여 사실상 꽤 많은편이지만, 그러나 그 자세한 기록은 잘 알 수 없었다. 필자는 과거에 호림부대에 근무했던 역전의 용사 한 분(1924년생)을 실제 만날 수 있었다. 이분 말로는 당시 제5대대의 생존자는 이제 나 혼자 뿐일 것이라 했다. 그렇지만 고령으로 인한 기억력의 감퇴가 기존의 문헌자료에서 얻을 수 있는 그 이상의 정보를 찾아내기는 힘들게 했다. 그래서 호림부대에 관한 것도 기존의 문헌자료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38선 이북의 양양에서 필자는 이북의 양양에서 가장 유명했던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을 몇 번 던져보았다. 그랬더니 모두들 최용달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최용달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어 갔지만, 주민들로부터는 더 이상의 정보를 얻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문헌자료에서 최용달에 관한 기록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내용을 요약했다. 이북에서 유명했었던 인물을 왜 기록하느냐는 의문이 들을 수도 있다. 최용달은 1945년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양양군의 역사를 재구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 사람도 식민지 조선의 현실이 만들어내었던 비극적 인물일 따름이었다.

최용달이 비극적 인물의 한 전형이라면 김석원 장군은 희극적 인물의 전형처럼 다가왔다. 실제 김석원이 그렇든 그렇지 않든 간에 양양사람들이 생각하는 김석원은 이렇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차라리 역사가 아니라 설화문학에 가까웠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루머의 일종이었겠지만, 그 내용에 스토리가 있으니 문학적 의장을 갖추어 입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여튼 김석원에 관한 자료를 찾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그 사람의 고뇌라기보다는 희극적 웃음이 배어 나옴을 어찌할 수 없었다.

여러 항목들을 정리하는 과정에 필자 나름대로 문헌을 재구할까 아니면 문헌 그대로의 자료를 인용해줄까 하는 고민에 봉착하였다. 결론은 문헌자료를 있는 그대로 제시하기로 하였다. 대부분의 글은 발췌․요약한 것이다. 원문은 각주에 소개했으므로 더 자세한 사안을 알고자 하는 이는 원문을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