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서문

페이지 정보

조회 9,817회 작성일 2010-04-07 20:20

본문

서문

한국전쟁에 관한 필자의 지식은 그리 깊지 않다. 필자 또래의 사람들은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기에 아마도 교과서적인 지식, 그것도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이 대부분일 것이다. 혹 여기에 한두 가지 이야기 거리를 덧붙인다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몇 가지 감정을 자극하는 소재들일 것이다. 예를 들어,〈태극기 휘날리며〉라든지.

이번에 양양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과연 양양지역에서는 한국전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연구할 기회가 생겼다. 그러면서 처음엔 전쟁의 아픔 정도로만 단순하게 생각하고 시작하였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알 수 없는 당혹감에 휩싸여야만 하였다. 우선 양양군의 지정학적인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여야만 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양양군의 대부분은 38선 이북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들은 1945년부터 시작하여 전쟁이 나면서 수복되기 전까지 인공의 정치를 받아야만 하였던 지역이었다. 그런데 이들 지역은 한국전쟁을 통하여 수복은 되었지만, 1954년 11월 완전히 민정으로 이양되기 전까지는 대한민국의 땅이라기보다는 대한민국에 점령당한 점령지로서 간주되었다. 5년여의 인공생활, 다시 전쟁과 점령지로서의 5년여의 생활, 도합 10여 년의 생활은 이 시대의 양양사람들의 의식을 완전히 황폐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양양군의 6개 읍면 중 현남면은 완전히 38선 이남이었고, 현북면이나 서면도 일부는 38선 이남이었다. 그러나 38선 이남이라고 하여도 이들 지역이 충청도나 남부지방처럼 완전히 자유 대한의 땅은 아니었다 이들 지역은 접경지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였다 그 삶이란 . . 것은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 접경지 중의 한두 마을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도 전에 마을주민들이 집단이주를 하면서 아예 없어지는 비운도 겪어야만 하였다. 38선을 사이에 두고 한국전쟁 이전부터 돌발사건들이 빈번했기 때문이었다.

필자를 당혹하게 만드는 것은 전쟁이 휴전된 지 60여 년이 되어가건만, 그래서 당시의 코흘리개 아이들이 어언 70대가 되었건만, 아직도 그들은 전쟁의 망령에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쉽게 자신의 경험담을 말하지 못하였는데, 설령 말을 한다고 하여도 자신이 어떤 말을 하였을 때, 남한의 어떤 곳에서 혹은 북한의 간첩에 의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아니었지만, 적어도 과반수 이상은 실명을 밝히는 것을 어려워하였다.

그래서 이 글 제2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가명을 사용하기로하였다. 역사의 기록을 제대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보자 상당수의 두려움을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문헌에 나오는 자료는 실명을 사용하였다. 이 경우 각주로서 그 출처를 밝혔다.)

한편 또 다른 어려움은 한 마을에 좌익과 우익의 후손들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런 자료수집이 잘못하면 마을의 분열을 조장하지나 않나 하는 것이었다. 필자의 잘못 때문이었지만, 이런 일은 실지로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어떤 마을이었다.할머니들 여러 명이 앉아 놀고 있는 마을회관이었다. 무심코 6․25(한국전쟁)에 대한 사연이 있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한 할머니가 말문을 열기 시작하자, 그와 비슷한 사연을 지닌 몇몇 할머니들이 그와 비슷한 사연들을 토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다른 할머니 몇 분이 빨갱이들 사상이라고 공박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재빨리 수습을 한다고는 하고 마을회관을 나왔지만, 영 꺼림칙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한국전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었다. 문헌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 당혹감을 맛보아야 했다.

1945~1954년 간의 자료 자체가 (반공학생 사건 몇 개를 제외하고는)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50년대 이후는 전쟁의 와중이니까 그렇다고 하여도, 1945~1950년간의 기록마저도 거의 없었거나 아예 기록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예를 들어 그 때 양양에 고급중학교가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고등학교다. 그러나 양양의 그 기간 동안의 역사 속에서 그 실체를 찾을 길이 만무했다.

이런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북한 공산집단의 사회주의 이념은 기피한다 하더라도, 양양사람들의 삶과 관련 있는 제반요소들은 기록해 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기피했던 점들은 양양사람 스스로가 그렇게 기피하여 기록하지 않았던 것으로 느껴졌다. 스스로 조심스러워했던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북지역이라는 멍에를 여전히 벗어 던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글의 전반부는 문헌에 전하고 있는 양양지역과 관련있는 6․25전쟁자료들이다. 양양이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기존의 자료를 통하여 파악할 수 있도록 거의 가감없이 원자료를 발췌하여 전재했다.

이 글의 후반부는 6개 읍․면 약 140여 개 마을(없어지거나 합해진마을들을 모두 포함한 수치)을 대상으로 하여 자료를 수집하면서 각 마을마다 발생했던 사건들 위주로 꾸몄다. 그러나 모든 마을에서 모두 사건이 발생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부 마을에서는 사건 대신 감동 받을 만한 개인의 사연으로 대체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당대의 민속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도록 다양한 소재들로 꾸며보았다. 이 책은 인공시대를 살았던 양양사람들의 전쟁관련 자료집임과 더불어 그 시대 민속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민속지(民俗誌)이었으면 하는 필자의 바람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 자료집이 나올 수 있도록 물심(物心) 양면으로 도움을 준 양양문화원의 양동창 원장님을 비롯하여 김광영 국장님, 최선미 간사님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더불어 아직도 전쟁의 멍에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양양의 사람들에게도 어서 빨리 진정한 자유가 찾아오기를 기원한다.

이 한 길

강원도민속학회 편집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