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강현중 스트라이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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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640회 작성일 2010-04-06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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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현중 스트라이크 사건

인공 때 강현인민학교와 강현중학교가 건물을 반씩 나누어 사용했다. 건물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강현중이 처음 생길 때였다. 1946년 학제 개편 때 1학년과 2학년을 동시에 모집을 했다. 당시 2학년은 40여 명이었고 1학년은 그보다는 상당히 많았다. 처음에 모집은 그렇게 하였지만, 1학년이 상당히 많다 보니 학교로서는 학년 배치를 다시 하려고 했다. 그래서 1학년 중에 나이가 많은 학생들을 2학년으로 올려보냈다. 그러면서 원래 2학년 학생들과 혼합하여 다시 2개 반으로 나누어 편성을 하였다.

원래 2학년인 학생들은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학교당국에 시정을 요구했다. 설령 같이 배운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끼리 한 반을 만들어 달라. 그러나 학생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 것이 이듬해 봄 풀이 올라올 때였다.

학생들은 수업에 불참하고 지금 강선리 비행장이 들어선 곳에 있었던 마을회관에 모이기로 약속을 하였다. 일종의 스트라이크였다. 약속한 날이 되자 학생들은 마을회관에 하나둘 모이는데, 학교에는 학생들이 하나도 오지 않는 것이었다. 큰일이 난 것이었다. 이 일을 정치보위부에서 알게 되면 큰일이었다. 학교장은 부랴부랴 선생들을 재촉하여 상황파악에 들어갔다. 알아보니 학생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수업에 불참을 하는 것이었다.

강현중의 역사 선생은 이북의 체제에 환멸을 느껴 월남을 하려 했으나 실패한 사람이었다. 그 선생이 찾아오더니 학생들을 하나둘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더 이상 스트라이크를 확대할 수는 없었다. 일회성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당시 교육제도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 중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