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졸업생 없는 고급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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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488회 작성일 2010-04-06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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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업생 없는 고급중학교

1946년 9월에 양양중학교(주108)가 개교되었다. 당시 1학년과 2학년을동시에 모집하였다. 왜냐하면 학제 개편이 있었기 때문인데, 인민학교(국민학교에 해당)를 6년제에서 5년제로 개편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졸업반이 5학년과 6학년 등 2개 학년이 생겼다. 그리하여 5학년 졸업반 학생들은 1학년으로, 6학년 졸업반 학생들은 2학년으로 입학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1947년 9월 1일자로 다시 학제가 변경되었다. 초급중학교와 고급중학교가 분리된 것이다. 고급중학교는 오늘날의 고등학교에 해당한다. 1946년에 초급중학교 2학년으로 들어갔던 이들이 1947년 9월에 고급중학교1회가 되었다.

1950년 당시 3학년은 37명이었다. 정상적이라면 이들 37명은 졸업을 하여야 했다. 그러나 고급중학교 학생들은 1명도 졸업을 하지 못하였다. 원칙적으로 제1회 졸업생은 1950년 7월 15일에 배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7월 7일경에 대부분 인민군에 가야만 했다. 6․ 25에 터진 한국전쟁의 전황이 인공에게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6․25가 터지기 전 6월 13일부터 졸업시험이 시작되었다. 졸업시험은 구답시험과 필기시험이 있고 이 둘을 병행을 했다. 정상적이라면 7월 6일에 화학구답시험을 보고, 7월 9일 로어(러시아어)시험을 마지막으로 졸업시험이 끝날 예정이었다. 그런데 로어시험을 6일에 앞당겨 보고 연무장에서 신검을 받고는 이튿날 오전10시에 곧바로 인민군으로 입대했다.

당시 고급중3학년 37명 중 전쟁에서 살아온 사람은 거의 없다.(주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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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08) 인공 때의 양양중학교로서 오늘날의 양양중학교와는 다른 학교이다. 남한에서는 인공시절에 다녔던 학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주109) 현재 필자가 확인한 당시의 생존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동형, 이상우, 이은기,이인형, 이주해, 전광식, 최두한(가나다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