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월리의 탱크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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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099회 작성일 2010-04-06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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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리의 탱크부대

1950년 6월 20일경 양양군 월리에 남침을 위한 탱크가 20여 대가 들어왔다. 당시 월리에는 아카시아 숲이 무성하여 탱크를 숨기기에 아주 적합하였으며, 기갑병은 나뭇가지와 풀잎 등으로 위장을 하였다.

탱크는 이후 22일경에도 20여 대가 들어왔다.

해방이 되면서 양양읍에는 소련군이 진주했었다. 그러나 1948년경에는 소련군이 물러가고 인민군 1개 대대가 들어와 주둔하였고, 이어 1950년대 초에 접어들면서는 인민군도 물러가고 경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날 무렵에는 인민군이 기차를 타고 속속 남하하고 있었다. 양양군 송암리에 양양역이 있었다. 평상시에는 1일 2회 정도 오고갔었는데, 6월에 접어들면서 하루에도 수도 없이 기차가 들락날락 하면서 군수물자와 병력을 실어 날랐다. 그렇게 도착한 병력은 있으되 양양 읍내에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 남으로, 즉 38선 접경지로 이동한 것이었다.

군소[郡牛]라 하여 집집마다 공용의 소를 키우고 있었다. 이 소를 전쟁이 날 무렵 회수하여 함석지붕의 창고에 모아놓았었다. 이 창고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만들어놓은 건물이었다. 기차를 타고 도착한 인민군에게 이 소를 잡아 먹였다.

당시 우차(牛車)는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양양군 관내 우차조합에서 우차를 동원하였는데, 이를 테면 우차부대가 오늘날의 수송부대였다.

양양교(橋)는 양양 읍내를 통하여 남으로 이어지는 주요 통로였다.

이 다리는 나무로 만들었으며 그 위에 흙을 덮어 놓았는데, 트럭도 지나갈 만큼 튼튼했다. 실제로 당시에 디젤트럭도 있었는데, 인민군 1개 대대마다 2대 정도 배치되었던 것으로 이종우(손양면 수여리 거주)는 짐작했다.

양양교를 통하여 남으로 통하는 도로는 2차선이라 하기에는 좁았고 1차선이라 하기에는 넓었다. 625가 터지던 날 인민위원회 소속의 마을 책임자(오늘날의 반장에 해당)가 방송을 하여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남한군이 쳐들어와 인민군이 대응하면서 쫓고 있으니 마을의 젊은이(학생 제외)들은 모두 나와 도로를 보수하라고 하였다. 이 일은 그때 당시 하루 정도만 하였다고 수여리의 이종우는 제보하였으나, 인근 밀양리, 상양혈리 등지에 사는 이들은 거의 매일 동원되어 도로보수를 하였다고 제보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경찰서가 있던 자리에 해방이 되자 내무서가 들어왔다. 전쟁이 날 무렵 이 곳에 직사포 부대가 있었다. 대략 30여 문 정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하는데, 이 직사포를 끄는 것은 포차(砲車)였다고 이종우는 제보했다. 이 직사포 부대가 있던 자리는 오늘날 양양군 의회가 들어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