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감 때문에 생이별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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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183회 작성일 2010-04-0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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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때문에 생이별을 하다

상복리에 사는 평양댁은 참으로 얄궂은 운명 탓에 어머니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평양댁은 1936년 생이었다. 양양읍에서 출생한 그녀는 그 해 병자년 물난리를 겪고 곧바로 평양으로 갔다. 아버지가 평양에서 고무공장을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양양에 온 것은 어머니 고향(용천리)이기도 했지만, 양양에도 고무신 가게를 차려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복리에 사는 이종사촌오빠가 양양의 고무신 가게를 맡아 운영을 하였다.

평양댁은 평북 강계 전천에서 살았는데, 아버지는 아주 우연히 사고로 사망을 하였다. 선망고무공장을 설립한 날이었다. 직원들 회식을 시켜주고 대동강에서 뱃놀이도 시켜주던 날이었다. 직원들은 사장님도 술 한 잔 하시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본시 술을 잘 못하는 평양댁의 아버지는 직원들의 권유에 마지못해 술 몇 잔을 받아먹었는데, 그 길로 집에 돌아와 주무시다가 심근경색으로 사망을 하고 말았다. 못먹는 술이 원수였다. 그게 평양댁이 2살 되던 해였다.

그 후 회사는 사촌오빠들이 운영을 했다. 고무공장은 게다[나막신]공장으로 바뀌었고 그마저도 해방이 되자 팔 수밖에 없었다. 사촌오빠들은 월남을 하였다.

하루는 이종사촌이 평양에 다니러 왔다. 당시 평양에는 감이 귀했는데 평양댁은 감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이종사촌에게 말했다.

“오빠, 지금 가면 나 감 먹을 수 있어?”

그때가 1948년 가을 14살이 되던 해였다. 어머니도 그러라고 하였다. 이제 어머니도 평양의 살림을 정리하고 고향 용천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기 때문에 먼저 가 있으라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양양 상복리에 와 회룡인민학교를 다녔다. 인민학교를 졸업하고 평양댁은 사촌오빠에게 중학교에 보내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촌오빠로서도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식도 중학교에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촌오빠는 말했다.

“그러면 일단 시험이나 쳐보렴.”

평양댁은 강현중 시험에 합격했고, 그리하여 사촌오빠는 자기 자식과 함께 학교에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강현중은 남녀공학이었다. 평양댁은 4살이나 위인 사촌오빠의 아들과 같이 학교에 즐겁게 다녔지만, 그 즐거움은 오래 가지 못했다. 시골 살림살이라는 게 빠듯하여 둘을 중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평양댁에게는 배다른 언니가 한 분 있었다. 평양댁과는 나이 차이가 한참 났었는데 당시 형부가 척산에서 우체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래서 평양댁은 척산으로 옮겨가 중학교 2학기 과정(1950년대초)은 속초여중에서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겨우 1학년뿐이었다. 왜냐하면 6 25가 터졌기 때문이었다 전쟁의 와중에 언니와 형부는 이북의 공무원이었던 관계로 이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평양댁은 다시금 , 사촌오빠가 있는 상복리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와도연락이 끊겨버렸다.

평양댁이 감만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감을 먹으려 상복리로 먼저 오지 않았더라면 평양댁은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