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기리는 피난골

페이지 정보

조회 3,593회 작성일 2010-04-06 18:15

본문

기리는 피난골

기리는 6․25 전쟁의 와중에서도 집 하나 불탄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이곳이 유엔군의 폭격으로부터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양양읍이 공습을 받아 불탄 다음, 양양군 인민위원회를 비롯하여 각종 기관들이 기리로 이동해 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 하나 불탄 곳이 없었던 것은 마을의 지형 때문이었다. 바다 저 멀리서 함포를 쏘아도 포탄은 산 너머로 떨어지거나 마을 중앙의 논밭에 떨어질 뿐이었다.

산을 등지고 지어놓은 집들 중 함포 사격에 불탄 집은 하나도 없었는데, 이런 특성은 비행기 공습에서도 여전했다. 비행기가 아무리 포탄을 퍼부어도 신기하게도 비껴나갔다. 주민들은 한결같이 조상이 돌보아 준 탓이라고 입을 모았다.

마을 주민들도 폭격으로 인하여 다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옥의 티랄까 다친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도 폭격으로 인하여 다친것은 아니었다. 포탄 하나가 어느 집에 떨어진 적이 있었다. 정상적이라면 그 집이 포탄에 불탈 유일한 집으로 기록이 될 찰나였는데, 하필이면 그 폭탄이 불발탄이었다. 그래서 어떤 폭격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집들이 불타지 않았다는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집 아이가 그 불발탄을 가지고 장난을 하다가 그만 그 포탄이 터진 것이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어서 치료를 하고 아이는 살아날 수 있었다. 조상이 돌보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주민들은 생각했다.

아군이 수복을 한 다음 아군 역시도 이 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지형학적으로 이 곳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공군의 공세로 말미암아 아군이 급작스럽게 후퇴를 시작할 때도 이 곳 마을들은 불타지 않았다. 미처 불을 지를 틈이 없었기도 하였지만, 도로에 멀리 떨어져 있기에 불을 지를 까닭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전쟁의 와중에서도 기리만은 주택들 하나 파손되지 않은 채 살아남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