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북암리 마을이 없어진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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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829회 작성일 2010-04-06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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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암리 마을이 없어진 사연

북암리는 양양군 서면의 산골마을이다. 북암리를 가려면 송어리를 거쳐 들어가거나 송천리를 거쳐 들어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뿐이다. 그만큼 외져서 주민들도 그리 많지 않은 산골마을인데, 1945년 해방이 될 무렵만 해도 16호가 살고 있었다.

38선이 그어지자 마을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왜냐하면 마을에서 38선은 겨우 2㎞ 남짓 되었기 때문이다. 남북한간에 수시로 충돌이 있었는데, 그 충돌은 1949년 후반부터 더욱 심해졌다. 주민들 중경제적 형편이 그런 대로 나은 사람들은 논밭을 정리하고 충돌이 없는, 즉 38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마을로 이사를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둘씩 떠나고 난 뒤 1950년 전쟁이 벌어질 무렵에는 겨우 8집만 남게 되었다.

전쟁의 와중에 이 곳에 남아 있던 몇 집 안 되는 주민들은 인민군이 들어올 때면 인민군에게, 아군이 들어오면 아군에게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는 아군이 들어온 다음 백담사 근경으로 정찰을 나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군인보다는 민간인을 활용하면 의심을 받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부탁을 한 것이었지만, 끝내 ○○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 외 4명은 인민군에게 짐꾼으로 끌려갔는데 종래 무소식이었다. 행방불명이 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사라진 주민들도 5명이나 되었다.

전쟁 중 인민군이 내리치고 아군이 올라오고 하는 북새통 속에 외지로 나가 있던 북암리 주민들이 고향 북암리는 산골이니 전쟁에서 비교적 자유롭겠다 생각을 하고 고향 북암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아군이 수복한 다음 다시 찾은 고향 북암리는 인민군 패잔병의 루트였다. 벌꿀 사건(주104)으로 인하여 주민들은 고향 북암리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몇 집 안 남아 있던 주민들마저도 아예 몽땅 이주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전쟁의 와중에 西面북암리는 주민들이 하나도 살지 않는 페허가 되었다.(주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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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04) 이 책 〈벌꿀이 뭐기에〉항목 참조.

(주105) 전쟁이 끝난 후 근래 들어 외지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와 정착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몇 집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