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징(徵)자 달은 군속

페이지 정보

조회 3,898회 작성일 2010-04-06 18:22

본문

 징(徵)자 달은 군속

국군은 군인 외에 보급품 등 제반 사무를 담당하는 군속이 있었는데, 이들 중 ‘징(徵)’자를 달은 군속도 있었다. 이들은 군인들을 따라다니며 온갖 심부름을 다 하였는데, 그렇다고 하여 노임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군대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기에 숙식을 해결할 수는있었다. 전쟁의 와중이라 숙식을 해결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이들은 군속이라기보다는 노무자에 가까웠다. 다만 일반 노무자는 군부대 내에서 온갖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했다면, ‘징’자를 달은 노무자는 부대 내외로 다니면서 일들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래도 ‘징’자를 붙인 노무자가 붙이지 않은 노무자보다는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징’자를 붙이던 붙이지 않던 간에 고달픈 것은 매한가지였다.

동그란 바탕에 파란 글씨로 ‘징’자를 한자로 써서 군복에 붙였다.

‘징’자가 붙은 사람들의 복장은 군복에 군대 모자를 썼는데, 계급장은 붙이지 않았다. 군인이 아니므로 계급장을 붙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징자를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모자는 그냥 아무 것도 붙이지 않았다.

P는 2년간이나 군속 아닌 군속 노릇을 했다. P가 처음 양양 땅을 밟은 것은 50년 말이었다. 그때 군대에 있던 조카의 도움으로 ‘징’자 를 붙인 군속이 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P는 양양 땅을 밟자마자 후퇴를 해야 했다. 이른바 1․4후퇴였던 것이다. 평창 진부, 호산, 양양 월리, 강릉 연곡 등지로 다니며 생사의 고비도 많이 넘겼다.

양양은 군단사령부가 있었던 곳이었다. 결국 P는 양양에서 결혼도 하고 정착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