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아!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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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2,705회 작성일 10-04-06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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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어머니

인민재판이란 것은 다른 게 아니다. 정식으로 법정에 선 것이 아니고, 마을 동사에서 주민들이 모인 다음, 누구의 잘못을 고하게 하고 이에 대하여 주민들이 처벌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잘못을 시인하고 끝날 수도 있지만, 대개는 인민재판이란 이름이 주는 억압감처럼 보통 몽둥이찜질이 있게 마련이다.

1950년이었다. 최씨가 둔전리에 개인 절을 갖고 있었다. 이 절을 헐어 내고 인민동사를 짓는데, 반대했던 사람들이 인민재판에 회부되었다. 당시 인민재판에 섰던 사람들은 C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회룡리의 C의 어머니(이하 ‘회룡리 아주머니’로 표기), D의 어머니 등이 그 대상이었다. 각본대로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들의 죄목을 열거하면서 반동분자라서 제거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분주소(경찰 지서에 해당)에서 나온 사람이 말을 했다. 그러자 동네사람들은 박수를 치면서 그래야 한다고 동조했다. 그 다음에는 물푸레나무로 몽둥이찜질이 이어졌다.

다음에 포승줄로 묶어서 용호리의 장모씨 집으로 끌고 갔다. 당시 양양의 내무서(오늘날의 경찰서)가 폭격에 맞아 불타자 용호리의 개인 기와집에 임시로 내무서를 설치하였을 때였다. 그 집 뒤에 방공호가 있었는데, 이 방공호가 임시 감옥이었다. C의 외조모가 C에게 찾아와 하는 말이

“느이 어머니가 용호리의 누구네 집 감옥에 갇혔다. 그러니 밥을 좀 갖다 주라.”

그러는 것이었다. 인민군의 행거(주101)는 남한군의 행거와는 달리 동그란 것이었다. 거기에 밥을 담아 C는 용호리로 갔다. 가는 와중에도 비행기의 폭격은 계속되었다. 비행기가 나타나면 C는 수풀에 숨고, 비행기가 지나간 자리를 찾아 탄피도 주머니 가득 주워담았다. 탄피는 그 시절 상당히 비싼 값에 팔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공호의 문은 사림문이었다. 열고 들어서니 3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밥을 전해 준 지 3일째였다. C가 찾아갔을 때 인민군이 화상을 입어 온 몸을 붕대로 싸매 놓은 것을 보았다. 국군이 월리까지 진격했다는 것이다. C는 생각했다. 잘못하다가는 어머니를 잃을 것만 같았다. 필경 국군이 진격해 들어오면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방공호에 있는 사람들을 가만 둘 것 같지가 않았다. 분명히 총살을 시킬 것 같았다. 그래서 C는 어머니와 다른 분들에게 말했다.

“나오세요 도망치지 않으면 죽습니다.”

어머니와 다른 여인들도 C를 따라 도망쳤다. 영광정에 도착했을 때였다. 회룡리 아주머니가 집으로 가야한다고 헤어지자고 했다. C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마을로 들어가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마을로 가시지 말고 저를 따라 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회룡리 아주머니는 말을 듣지 않았다. 후일에 전해들은 말이지만, 내무서원에게 다시 체포되어 어디론가 갔는데 행방을 알 수가 없다고 한다.C는 어머니를 산 뒤 고양이바위 아래에 숨겨두었다. 또 다음날은 다른 곳에 숨겨두고 이렇게 7일을 옮겨다녔더니 드디어 국군이 마을로 들어왔다. C의 어머니는 전쟁의 와중에 무사히 연명할 수는 있었지만, 당시 두들겨 맞은 탓에 몸에 의혈이 생겨 1961년 42세 꽃다운나이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지금도 C는 그 당시를 생각하면 마을주민들이 야속하기 짝이 없었다. 같은 일가 성씨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몽둥이찜질을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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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01) 행거는 밥통을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