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호림부대의 출동과 활약

페이지 정보

조회 4,131회 작성일 2010-04-06 19:16

본문

호림부대의 출동과 활약

어느 날 훈련을 마친 호림부대 대원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드디어 출동명령이 내린 것이다. 대원들을 옷을 갈아입고 차를 탔더니 밤새도록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이었다. 아침에 도착하여 보니 국방부였다.

거기서 다시 호림부대 대원들은 인민군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위장전술인 것이다. 인민군 장총과 기관총 등 무기도 북한 것으로 지급받았다. 남한 것으로 지급 받으면 보급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북지역으로 남한 총의 실탄을 공급해 줄 수도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실탄 등과 같은 것은 북한 현지에서 스스로 조달하여야 했기에 인민군 총으로 무장한 것이었다.

무장을 마치고 대원들은 강릉군 신서면 서림리(오늘날의 양양군 서면 서림리)로 향했다(6월 27일). 거기에서 이북으로 들어갈 기회를 노리고 며칠 머물고 있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김구 선생의 암살(6월 29일)소식이 들려왔다. 또한 38접경지에 인민군의 경비가 더욱 촘촘해졌다는 정보도 들려왔다. 이북도 비상이 걸린 것이 분명했다. 대원들은 성동격서의 전법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대원들이 뚫고 들어갈반대쪽으로 소대 병력을 보내 총질을 시작하였다. 인민군의 주력이 그리로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그 틈을 타 호림부대 5-6대대는 오색 쪽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드디어 호림부대의 장도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대원들이 오색에 도착했는데, 날씨가 너무 궂어 더 이상 행군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인근 아무 민가에 들어가 몸을 녹일 수밖에 없었다. K의 부대는 5대대였다. 5대대는 대청봉을 넘고 장안사로 들어가야 했다. 당시 5대대장은 백의곤이었다. 산하에 3개 중대가 있었다.

5대대는 드디어 대청봉 정상에 도착하였다. 막상 도착하여 보니 앞일이 걱정스럽기 한이 없었다. 일행은 비장한 마음으로 손톱발톱을 깎아 담배종이에 말아 산정에 묻어놓기 시작하였다. 오늘 일이 생사를 알 수 없는 일이라, 대원들 중 혹여 살아가는 이가 있다면 나중에 여기에 와 손톱발톱이라도 찾아내어 영혼이나마 위로해 달라는 뜻에서 묻어놓은 것이었다. 후일담이지만, 생존자들이 한국전쟁이 휴전된 후 이 곳에 찾아왔지만, 그 담배종이는 찾을 수가 없었다. 전란의 와중에 대청봉의 지형이 포격을 맞아 바뀌어도 수천 번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김남홍은 금풍리 사람이었고 이계화는 서문리 사람이었다. 이 둘을 금풍리로 정보수집을 보냈는데, 발각이 되었다. 그리하여 수색해오는 인민군을 피해 금풍리 김남홍의 집에 숨어 있다가 그만 사살되었다.(이 두 사람에 관한 것은 〈금풍리 돌발사건〉참조)

211.jpg
호림부대 생존자와 이범석 장군

대대장은 중복리 출신인 K에게 식량보급을 상의하면서 상복리에서 조달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물어왔다. K는 대원들을 데리고 상복리로 내려갔다. 주민들은 그때도 우익사상을 가진 주민들이 많았기에 식량을 조달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곡식뿐만 아니라 송아지도 한 마리 주민 중 누가 끌고 올라왔었다. 대원들은 산 정상에서 송아지를 잡아 모처럼 포식할 수 있었다.

이튿날 마을의 누군가가 정보를 모아 줄 테니 언제쯤 내려오라고 하였다. K는 그 말을 믿고 시간에 맞추어 내려갔는데, 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필경 사단이 난 게 분명했다. 그 와중에도 K는 고향마을인 중복리의 좌익 집을 습격할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차마 습격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고향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총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서 산으로 올라가는 중에 보니 인민군이 헐레벌떡 내려오는 것이었다. 아마도 인민군 정찰병이 분명했다. 나중에 들으니 산 정상으로 두 명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조준하여 한 명을 사살하고 나머지 한 명이 도망치는 것이었다. K는 대원들과 같이 인민군에게 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그 인민군은 몸 하나 다치지 않고 도망치는데 성공하였다.

상복2리(지금의 설악동)에서 인민군 연락병을 붙잡았다. 인민군이 어디에 있냐고 하니, 어디에서 자고 있다고 하였다. 찾아가니 자고 있기는커녕 마당에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다가 K의 일행을 보고 총질을 가하는 것이었다. K의 일행은 대응사격을 하였다. 나중에 잠잠해져 살펴보니 인민군 대여섯 명이 죽어 있었다.

호림부대의 종적은 이미 탄로가 났다. 그때부터 호림부대는 도망쳐야 했지만, 이미 비장한 마음을 모두가 품었던 터라 북으로 더 들어가고자 했다.

5대대가 화암사에 이르렀을 때였다. 새벽에 인민군들이 수색하며 올라오고 있었다. 5대대는 이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사격을 하고는 삼치령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령 일대에 안개가 자욱하였다. 안개속에서 잠복을 하고 있는데,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인민군들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대원들은 일제히 소리치며 사격을 하였다. 거기에서 인민군 7명-8명을 사살하였다. 또 아직 채 사망하지 않고 부상을 입은 이도 있었다. 그둘 중에 강․표대대 월북사건 때 월북한 대원도끼어 있었다. 그들이 살려달라 하였지만, 종적이 발견 당할까봐 그들을 살려줄 수는 없었다. 그들로부터 노획한 무기들은 인근 구렁에 집어넣었다. 그것이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