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1945년 : 징병, 해방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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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685회 작성일 2010-04-06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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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 징병, 해방 그리고

K는 1945년 21살에 징병을 가야 했다. 처음 훈련을 받으러 간 곳은 길림성 막석이란 곳이었다. 훈련을 서너 달 받고 이제 부대를 배치할 때에 해방이 되었다. 일본이 항복한 것이었다.

일본군이든 한국인이든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K는 혼자서는 활동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은 당시 같이 훈련받던 동료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동료들과 같이 K는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만 길을 찾아 나왔는데, 사실 객지인지라 길을 찾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그래서 철길을 따라 주욱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걸어 나오다 보니 길림 시내가 보였다. 거기에 소련군이 기차를 타고 나오는 모습도 보였다. K는 그 기차에 올라탔다. 당시 돈도 없이 그냥 무임승차였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냥 승차하는 것 같았다. 기차는 며칠을 가더니 강계로 접어들었다. 당시 기차는 목탄차였다. 오는 도중에 기차 연료가 떨어지면 나무의자를 잘라서 넣거나, 혹은 기차를 세워놓고 근처 나무를 벌목하여 연료로 사용하곤 하였다.

K는 기차가 설 때마다 기차에서 내려 근처 옥수수 밭에 들어가 옥수수를 따 허기를 채웠고 또 옥수수대궁으로 황덕을 해놓아 언 몸을 녹이곤 하였다. 만주는 9월-10월이어도 대단히 추웠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소련군이 주는 헐레발이란 빵으로 요기를 한 적도 있었지만, 그외는 대다수 굶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렇게 강계로 접어드니 강계의 부녀자들이 기차 근처로 나와 주먹밥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K는 실로 수십일 만에 처음으로 밥이란 것을 먹어보게 되었다. 그때 K는 비로소 기운을 차릴 수가 있었다.

K가 원산에 왔을 때였다. 그때까지 K와 그의 한국인 징병자들은 일본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소련군은 K와 한국인 징병자들을 일본군 포로 속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군복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본군 포로들은 K를 비롯한 한국인 징병자들을 자꾸 밀쳐내었다. 그런 현상은 일본군 포로들뿐만 아니라 한국인 징병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서로가 밀쳐내는 것이었다. 나중에 소련군도 이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군포로들과 한국인 징병자들을 분리하여 한국인 징병자들은 풀어주었다. K와 그의 일행은 즉시 민가로 들어가 일본군복을 벗어버리고 민간인 복장을 한 후, 비로소 고향 양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K는 고향마을 중복리에 왔지만, 마을은 이미 좌익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우익이라 한다면 민주당이 있었다. K는 좌익이 싫었다. 그래서 K는 민주당에 가입하였고 그들과 같이 활동을 하였다. 당시 회룡리, 장산리, 상복리, 중복리, 하복리 등 5개 마을의 민주당원은 12명이나 되었는데, K가 가장 나이가 어렸다.노동당에서는 징병을 갔다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군관학교에 가라고 하였다. 곧 창설할 인민군의 고급장교가 부족한 탓이었다. 그러나 K는 싫었다. 이리저리 핑계를 대면서 빠져나가자 급기야 보안대에 잡혀가 고문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K의 사촌형이 강현인민학교 교장이었다. K의 사촌형 역시 일제강점기 때부터 교직에 있었기 때문에 추후 미래가 걱정스러웠다. K의 사촌형도 K처럼 이북에서는 살기 힘든 존재였다. 그래서 둘은 같이 오색, 호랑이콧바우, 인제로 이어지는 루트를 통하여 월남을 하였다. K의 사촌형은 강릉에서 교직에 취직을 하였고, K는 주문진에 있는 서북청년단에 들어가 활동을 시작했다. 그때가 1947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