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설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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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90,653회 작성일 10-04-06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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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대

설악대는 양양군 치안대에서 탄생했다. 치안대는 마을의 젊은이들을 동원하여 자기 마을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면, 설악대의 목적은 상복리, 둔전리 등 설악산 일대의 치안과 공비소탕을 위한 특별부대였다. 따라서 이들은 지원을 받아서 선정하였고, 이들은 치안대와는 달리 당시 돈으로 800원 정도의 월급도 받았다. 이 돈은 쌀 몇 말을 사고도 남을 만한 돈이었다.

설악대의 창설시점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HID창설 이후인 점만은 분명하다. HID는 한국전쟁 당시 첩보업무의 활성화 필요에 따라 육군본부 정보국 공작과를 1951년 3월 독립시켜 발족했다.(주96) 따라서 설악대의 창설 역시 1952년 3월 이후인 것만은 분명하다.

설악대는 군복을 지급 받았는데, HID 마크가 붙어 있는 군복이었고, 신발은 워커였다. 배지를 달았는데 쇠꼽으로 매 형상을 한 치안대 배지였고 누런 색이었다. 준군사조직이었지만, 설악대 대원들도 1955년 후에는 다시 군대를 가야 했다.(주97) 이런 점에서는 군인이 아닌 민간치안대에 불과했다.

설악대의 본부는 상도문리에 있었다. 상도문리는 지금은 속초시에 속하지만, 과거는 양양군 속초읍 상도문리였다. 설악대는 본시 1군단 산하 특무대, 그 중에서도 HID 소속이었다.

설악대가 처음 발족할 당시 대장은 김재완이었는데, HID 소속의 이등상사(주98)였다. 상도문리 박의균 씨 집 행랑채에 본부를 두고, 마을의 운동장에서 대원들을 훈련시켰다. 그는 1년 이상 근무를 했다.

그 후 CIC 소속인 강원해가 부임했고, 그는 1년 정도 근무를 했는데 본부는 역시 상도문리에 두었으나 설악대 대장의 거처와 대원들의 거처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대장은 오준택 씨 집에 머물렀고, 대원들은 박용운 씨 집에 머물렀다.

설악대 제3대 대장은 HID 소속인 김기철이었는데, 그는 팔로군 출신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확인할 바는 없었다. 그는 오색에 파견을 나가 있었는데 몇 달 정도를 하다가 그만두고, 제4대 대장이 부임했다. 그는 뚱뚱해서 별명이 곰이었다. 그가 마지막 설악대 대장이었다. 그는 설악대 본부를 당시 상도문리 마을회관(지금의 노인회관)에 두었다.

설악대가 관할하는 마을은 화일리, 둔전리(간곡리 포함), 상복리, 상복2리(오늘날의 속초시 설악동), 상도문리, 고성군 잼버리장 근처(원암리 등), 척산, 장재터 등으로 각기 1개 분대 병력이 매일 출동하였다. 그 외 병력은 중대본부에 예비로 대기하고 있었다.

설악대는 1개 중대병력이었다. 예하에 3개 소대가 있었고, 각 소대는 3개 분대로 구성되었다. 1개 분대는 9명으로 구성되었다. 총 인원은 약100여 명이었는데, 부족한 병력은 각 마을의 치안대의 협조를 받았다.

저녁이 되면 설악대 대원들은 각자 담당할 마을로 배치된다. 이때 치안대원들에게 줄 무기도 같이 갖고 나가는데, 무기는 보통 M1이었다. 각 마을마다 주요 지점에는 줄을 설치하고 그 사이에 깡통을 달아 발목이 걸리면 소리가 나도록 만들어 놓았다. 각 마을마다 주요 지점은 보통 3곳-4곳이었고, 치안대 대원들을 2명-3명씩 같이 보초를 세웠다. 설악대원들은 이들 초소를 수시로 순찰을 돌았다.

1952년-1953년 봄으로 추정되는데, 아직 눈발이 날릴 정도로 늦겨울 초봄의 어림이었다. 당시 본부의 대원 11명이 출동하여 설악산 현장에서 공비3명을 발견하였는데 반항하기에 즉시 총살한 적이 있었다.

그 해가 저물어 가던 초겨울, 날씨는 눈발이 흩날리던 어느 날이었다. 이번엔 화일리에서 공비를 잡았는데, 잠복근무를 서다 보니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산중턱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이보였다. 수상하다 싶어 살금살금 수색하여 나가보니, 발자국이 있었다. 발자국을 따라 갔더니 공비들이 밥을 해먹고 자고 있었다. 살금살금 다가가 “손들어” 하니 몇 명이 급히 도망가는 것이었다. 냅다 총질 을 해대었는데 몇 명은 도망가고, 몇 명은 현장에서 사살하고, 두어명은 생포하여 1군단 사령부로 압송한 적도 있었다.(주99)

1952년-1953년 가을경이었다. 지금 속초시 설악동 켄싱턴호텔이 있는 자리인데, 그 앞에서 공비들이 내려와 군인들과 총격전이 붙었다. 김기철이 대장을 할 당시 오색으로 파견을 나가 있을 때였다. 당시 오색리 일대의 마을은 주민들을 소개하여 집집마다 비어 있을 때였다. 영덕리 근처에 길가에 간이 검문소를 설치해놓고 지키고 있는데, 이상한 사람이 보였다. 올까말까 우물쭈물하는 거동이었다. 데리고 왔는데 그 거동이 자꾸만 총을 올려다보고 내려다보고 하는 것이었다.

대원들은 즉시 이상하다 생각하고 마을로 데려가 일단 하룻밤을 재웠다. 이튿날 HID본부로 연행하려고 데리고 나오는 과정에 그 사람의 손에 포승을 묶었다. 사람이 착해 보여서 포승을 하지 않아도 되겠건만 주위의 사람들이 그래도 포승을 해야 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포승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이 사람을 데리고 서면을 지나 양양 삼거리로 접어들 때였다. 마침 군단 사령부에서 대령이 한 명 지나가다가 포승을 한 사람을 보고는 심문을 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 누구냐?”

“여차여차 해서 청간정 HID본부로 데려가는 중입니다.”

“그게 문제냐? 빨리 심문하여 일당을 모두 잡아야지.”

하고는 대령이 그 사람을 끌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 대령이 가버리고 곧바로 상급기관인 HID에서 백소위가 쓰리쿼터를 타고 나타났다. 설악대 대원들은 총망중에 이상한 사람을 군단 소속 대령에게 빼앗겼다고 보고하였다. 백소위는 즉시 그 대령을 찾았지만, 그러나 대령은 이미 종적을 감춘 후였다. 이 사실을 후에 알게 된 HID대장은 설악대 대원의 귀때기를 한 차례 올려붙였다. 설악대 대원으로서는 공(功)도 빼앗기고 되려 뺨까지 맞게 되었던 아주 억울한 사건이었다.

설악대 대원들은 설악산 인근의 여러 마을을 수시로 순찰을 돌고 같이 생활하다 보니, 마을주민들과 친해져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기도 하였는데, 상복리의 여인과 결혼을 한 사람도 있었다. 또 한겨울에 상복리 근처 설악산에서 곰을 잡은 적이 있었다. 곰고기로 마을 주민들과 같이 나누어 먹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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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김태완,「북파 호림유격대」,『월간조선』2006년 7월호, 397쪽.

97) 양양은 1954년 11월에 완전히 민정이양이 되었다. 이때부터 정상적으로 국군에 갈 수 있었다. 따라서 1955년부터 군대에 간 사람이 이 지역 징집1기가 된다.

98) 당시의 계급은 이러했다. 이병, 일병, 하사, 이등중사(오늘날의 병장에 해당), 일등중 사, 이등상사, 일등상사.

99) 이 사연은 『양주지』에 전하는〈영덕리 공비토벌 개황〉과 유사한 내용이다. 필자 가 제보자에게 몇 번이나 확인하였는데, 그 사건과는 다른 사건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