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술쌀과 밥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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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044회 작성일 2010-04-06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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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쌀과 밥쌀

동짓달 겨울에, 이른바 1․4후퇴 때 아군을 따라 피난을 갔다가 돌아오니 어디로 갈 데가 없었다. 왜냐하면 피난을 가는 와중에 모든 집들이 불에 탔기 때문이었다.

당시 장현수의 집은 200여 평의 널찍한 집이었는데, 집은 불탔어도 주위에 둘러놓은 울타리는 불에 타지 않았었다. 그래서 울타리를 뜯어 그 재목으로 기둥을 하였다. 그리고 마침 이웃집에 함석으로 지붕을 한 집이 있었기에, 그 집 함석을 벗겨 또 지붕을 이었다. 비행기가 폭격을 할까봐 솔가지를 꺾어와 지붕에 덮어 위장을 하였다. 이렇게 만든 임시 거처를 움이라 불렀다. 움막이란 뜻이다.

잠잘 곳은 그럭저럭 해결을 하였지만 먹을거리가 문제였다. 피난을가기 전에 땅에 묻어놓은 쌀은 집이 불에 타는 과정에 화기(火氣)를입어 망가져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이 불에 탄 쌀을 버리자니 달리 먹을 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이 쌀로 술을 담갔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불에 탄 쌀 모두를 술을 담그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일단 그 쌀을 씻으려 고무다라(함지)에 담가놓았다. 그런데 그 숫자가 너무 많은 게 문제였다. 도저히 개인이 먹으려고 담근 것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았던 것이다.

아군의 수색대가 들어오면서 너무 많은 고무다라에 담긴 술쌀을 보더니 아마도 이는 인민군들이 먹으려고 해놓은 것이 아니냐며 추궁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장현수의 형이 보조경찰이었다. 그래서 경찰가족이라 말을 해도 믿지 않았다.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많이 담가 놓은 것은 밥쌀이지 술쌀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침 아버지가 다리춤에 태극기를 걸고 있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솜바지를 걷어 태극기를 보여주었더니 그때서야 아군이 인정을 하고 물러나는 것이었다.

장현수의 가족은 아버지가 너무 술을 좋아해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지금도 장현수는 가게 앞에 국기게양대를 만들어놓고 태극기를 매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