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의용군에서 도망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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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796회 작성일 2010-04-06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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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용군에서 도망치는 방법

고제설은 6․25 당시 전쟁이 난 줄도 모르고, 주문진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고 있었다. 수술을 받고 집에 돌아오니 사람들이 내려오면서 피난을 가라고 난리였다. 그러나 수술을 받고 막 퇴원한 허약한 상태라 어디로든 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겨우 몸을 추슬러 피난을 간 곳이 연곡이었다. 거기서 하루 있다가 다시 돌아왔다.

남들은 광복절이라 말하는 8월 15일에 고제설은 의용군에 잡혀갔다. 그때 인근에서 가장 많이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그만큼 전황이 안좋았다는 증거다. 그런데 곧바로 전쟁으로 투입하지 않고 이북으로 끌고 들어갔다.

인민군복을 입고 소대장 연락병을 했다. 평북 영변 핵폐기물로 유명한 그곳까지 갔었다. 의용군으로 붙잡혀 가면서 내내 도망을 칠 작정을 하였지만, 소대장 연락병을 하다 보니 좀처럼 도망칠 기회가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고제설은 한 꾀를 내었다.

소대장 총을 갖다가 밖에다가 내버렸다. 그랬더니 인민재판을 하면서 자아비판을 시키더니, 상황이 전시인지라 총살을 시켜도 무방하지만, 한 사람도 아쉬운 형편인지라 죽이지는 않고 일반 군대에 편입을 시키는 것이었다. 소대장으로서는 좋은 자리 박차고 나간 놈이 이상한 놈으로 보였겠지만, 내내 도망을 칠 기회만 엿보고 있던 고제설로서는 참으로 천금과 같은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그렇게 일반 군대에 3일을 있다가 끝내 도망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영변의 골짜기는 들어가는 입구는 좁지만 계곡 속은 넓기 그지없었다. 그 골짜기만 벗어나면 되었기에 3일째 되는 날 드디어 계곡입구를 벗어날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의용군 생활을 한 지 2달이 지난 시점이었다.그 후 한국군을 만났다. 사정을 이야기하니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여 평남 순천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보니, 피난민,의용군 갔다가 도망친 이, 인민군 패잔병, 국군패잔병 등 가지각색이 수없이 나오는 것이었다. 참으로 못 보아줄 장면이었다.

순천에서 겪은 일이었다.

무조건 집에 가려고 나오는 사람은 여기 서라는 것인데, 금방 100명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실어서 순천 유치장 같은 곳으로 보냈는데, 그 곳에서 포매리의 정현식을 만났다. 당시 정현식은 헌병대에 입대해 있었는데, 일찍 고향을 떠났기에 고향 소식을 궁금해하던 차였다.

그래서 고향 소식도, 물론 2달-3달 전의 상황이지만 말해주고 또 서로 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정현식은 고향에 돌아가거든 자기가 무사히 잘 있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평양의 시내 한 중학교 건물에 수용되어 있을 때 중공군의 개입 소식이 들려왔다. 이후 열차로 인천사발공장으로 와 있다가 다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