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아이마저 죽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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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775회 작성일 2010-04-07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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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마저 죽었건만

김인랑은 원포리에서 출생하여 두리로 시집갔다. 6․25가 터질 적에 인구지서 곁에서 가게를 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신발을 주로 팔았는데, 남편은 부산에 가서 짝으로 떼다가 도매도 하였다.

6․25가 나던 날 비가 구질구질 내렸는데, 밤중에 자고 있는데 갑자기 뭐가 “꽝! 꽝!” 하는 것이었다. 나가보니 큰길 앞에 이발소가 있었는데, 그 곳에 포탄이 막 떨어지는 것이었다. 당시 남편은 반장을 하였기에 혹시 어떻게 될지 몰라 피난을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청단원들이 나타나더니 짐을 좀 지어달라면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한참 후 남편이 나타났다. 그래서 피난을 갔는데 떠날 때 지서에서 하는 말이 주문진만 가면 괜찮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웬걸 주문진을 나가니 강릉만 가면 괜찮다고 하였고, 또 강릉에 가니 삽당령을 넘어야 괜찮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삽당령을 넘어 조금 더 나아가 여량까지 갔는데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인민군이 벌써 그 곳에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민군이 하는 말이

“우리 인민군은 사람 해치지 않는다. 그러니 고향으로 돌아가라.”

이제는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는데, 돌아와 보니 의용군을 뽑는다고 하여 야단이었다. 남편, 시숙2분, 시동생1명과 이웃집 남자들은 대치리 환재로 도피를 했다.

그랬더니 내무서원들에게 맨날 불려갔는데, 김인랑은 그래도 어쩌다 끌려갔지만, 김인랑의 큰댁형님은 매일 밤낮으로 끌려가서 고초를 당하는데, 도피자를 잡아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밤중으로 수시로 찾아와 도피자를 내놓으라고 협박을 하였다. 이를테면, 밤이 깊으면 마당에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서 불을 켜라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큰댁형님이 옷을 주섬주섬 입고 호롱불을 밝히면 들어와서 살펴보고는 또 도장도 살펴볼 것이니 또 도장(주88)에도 불을 밝히라고 요구한다. 떨리는 손으로 불조차 제대로 못 밝혀 몇 번이나 해야 겨우 불을 밝힐 수 있는데 그렇게 해서 이곳저곳을 모두 살펴보고는 나가곤 하였다. 이런 일이 수시로 밤중에 일어났었다.

당시 지서를 분주소라고 불렀다. 거기 끌려가 있을 적에 세 살짜리 아이가 병이 걸렸다. 큰님이라 부르는 홍역을 심하게 하였는데, 그만죽게 되었다.

아이가 죽은 다음에 방에다 놔두고 김인랑의 시어머니가 조카를 끌어안고 툇마루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내무서원들이 대창, 쇠꼽창, 칼등을 들고 와서는,

“도피자들 왔나?”

하고는 불을 환하게 밝히게 하더니 살펴보고는 또

“애가 이렇게 됐나?”

이러니, 시어머니가 아무 대꾸도 없이 아이를 끌어안고 앉아 있으니 가까이 와 들이대면서

“얘가 죽은 애나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시어머니가

“죽은 애를 내가 왜 끌어안고 있나? 봐라.”

그러니 한 녀석이 있다가 나머지 두 사람을 끌고 나가는 것이었다.

아이가 죽어도 장사를 지낼 남자가 없었다. 당시 시아버지는 분주소 영창에 갇혀서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가 죽었으니 장사라도 지낼 수 있게 잠시 내보내 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그래도 소용이없었다. 그래서 김인랑은 사람을 사서 장사를 지낼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잃고 나서 추석을 쉬고 나서 추위가 찾아오자 옷가지를 해갖고 남편 일행을 찾아갔다. 갔더니 남편은 군인들이 오는 곳으로 갔다고 시숙이 전해주면서 그러면서 왜 이 곳에 왔냐고 그 속도 모르면서 야단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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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88) 곡식을 넣어둔 방을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