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호국군(護國軍) 현남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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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963회 작성일 2010-04-0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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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국군(護國軍) 현남중대

현남면에는 호국군 중대가 있었다. 상위부대로 주문진에 대대가 있었고, 대대로부터 명령을 받아서 일을 처리했다. 그래서 그 상위부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주85) 다만 군(주86)과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했고 군의 명령을 받아 여러 일들을 처리했다.

현남면의 중대가 몇 중대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대원들은 현남중대라고 명명했다. 그 아래에 4개 소대가 있었는데, 각 소대별로 50여 명의 인원이 있었으니 대략 200여 명의 대원이 있었다. 주문진 대대장은 석종문(남․1920년생)(주87)이었고 현남면 중대장은 최용철이었고, 4개 소대장은 1소대장 박성수(인구리), 2소대장 박병호(인구리), 3소대장 박수호(북분리), 4소대장 김주철(잔교리) 등이었다. 김주철은 인구 이봉록 한약방의 사위였다. 그 외 중대장의 연락병이었던 김택진, 그리고 전보암, 최돈기 등이 활동을 했었다. 당시 사무실은 인구 우체국 맞은편에 있는 동창여인숙 부속건물에 있었다. 임대료 없이 임시로 빌려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선임하사였던 홍현진이 주로 근무했었다. 그 외 대원들은 별달리 계급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냥 대원이라 칭했었다.

대원이 되는 조건은 18세 이상의 청년이었다. 젊은 청년이라면 거의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지만, 가사에 반드시 필요한 인물, 즉 농사를 짓는데 반드시 있어야 할 인물 등은 제외해 주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지방자위대처럼 지방의 자치, 보호를 목적으로 하여 설립되었다.

무기는 99식, 38식이라 하여 일제강점기 때 사용했던 무기와 미군 으로부터 M1을 지급받았다. 그러나 1인당 1정씩 돌아갈 만큼 여유가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평상시에는 중대본부에 보관하고 있다가 유사시에는 지급을 하여 출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단체복과 켈로부대 모자도 지급받아 착용했다. 당시 군복은 얼룩무늬가 아닌 일반적 녹색계통의 군복이었다. 그리고 신발도 농구화 같은 것을 지급받았다. 재원의 출처는 모르지만 경비는 지원받았다. 그러나 임금은 없는 무보수였다. 상부의 지시를 받아 훈련을 하고, 인민군이 무단침입하면 군경과 같이 출동하였다. 주로 해안의 경비를 맡았고 검문 등의 일도 동참하였다. 간첩이 침투할 적에 같이 수색작업에 나가기도 하였다. 현북면의 지경까지 통괄하여 현남중대가 활동하였으나 그러나 실제로 현북면까지 가서 활동한 적은 없었다. 평상시 교육은 총기분해 및 소지, 긴급출동 때의 행동요령 숙지 등의 교육을 수시로 했었다.

그러나 밤에 나가 철조망 등을 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는 지방사람들을 징발해서 호를 파고 철조망을 친 것은 낮에 하였고 호국군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다.

6․25가 터지자 울산 방어진으로 피난했다. 여기에서 일부는 현역으로 입대했고, 당시 호국군의 지휘부는 고향으로 돌아가 지방활동을 해야 한다고 하여 입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민군이 있는 고향으로 곧바로 돌아올 수 없어서 울진 근처에서 머물러 있으면서 마을 소식을 탐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울진에서 경찰로 근무하던 김귀영을 만나 고향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50여 일을 객지에서 고생을하다가 돌아와서도 국군이 수복을 하기 전에는 제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피신을 다니곤 하였다. 호국군의 활동은 이때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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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85) 본고〈호국군〉항목 참조

(주86) 軍이었고 미군과도 관련이 있었지만, 경찰과는 관련이 없었다.

(주87) 주문진읍장 역임. 1988년경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