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100일 정치와 자아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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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850회 작성일 2010-04-07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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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일 정치와 자아비판

38선 이남의 현남면 사람들과 현북면 사람들은 6․25가 터지고 9․28수복이 될 때까지(실제 38선을 넘은 것은 10월 1일) 약 100여 일의 기간을 100일 정치라 불렀다. 이 기간 동안에는 피난을 거의 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인민군의 진격속도가 워낙 빨랐기 때문이었다. 주민들의 대부분은 하루이틀 피난을 갔다가 인민군을 만나서 인민군이 하는 말을 듣고는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인민을 해방시키러 왔기 때문에 아무 걱정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

인민군의 말대로 인민군은 별달리 주민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민군보다 더 무서운 것은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된 내무서원과 이들의 지령을 받는 세칭 지방빨갱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온갖 악독한 짓은 모두 하였다. 특히 우익이나 지주계급이 겪어야 했던 것은 혹독한 자아비판이었다.

입암리 토박이인 김상○은 멋모르고 아버지를 쫓아갔다가 자아비판을 하고 혹독하게 두들겨 맞는 아버지를 옆에서 바라보아야 했다.

지방빨갱이들은 구두를 신고 방망이와 각구목 등을 들고 아버지가 말 한 마디 하기 무섭게 때려댔다. 그리고 혁대로도 때리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강현면 도문리 출신인데 이북지역에서 왜 월남을 해 이남으로 살러 왔냐는 것이었고, 또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7년간 반장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유를 대라고 족치는 것인데, 이런 일들에 이유가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예를 들어 아군에 가족을 보낸 세칭 군인가족들도 이런 고통을 한두 번씩은 겪어야 했다.

들리는 말로는 9․28수복이 하루․이틀만 늦었어도 아버지를 비롯한 이른바 반동분자들은 죽었을 것이란 말이 들렸다. 사태가 여의치 못하면 반동분자들을 모두 호리가다(참호)에 몰아넣고 사살한다는 것이었는데 아군의 진격속도가 워낙 빨라 미처 죽이지 못하고 떠났다는것이다.

입암리는 6․25 이전에도 당시 좌우익의 갈등이 심했던 곳이었다. 9․28수복이 되자 이들 지방빨갱이들은 월북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미처 월북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는데, 세포위원장을 하던 이들은 동네사람들이 남애리 지서 가는 산길로 데리고 가 경찰 입회 하에 때려죽이는 보복이 펼쳐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