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문화22호

설화-탁장사/장사 구납(具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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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639회 작성일 2011-02-18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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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장사

 

 020.jpg양양군 서면 송천리에는 전설적인 장사로 탁구삼이라는 인물의 일화가 전승된다. 이 마을에는 그 분의 후손들이 집단적으로 살고 있는데, 현재 이 마을에는 탁구삼 장사
의 8대후손인 탁원기씨를 비롯하여 10촌 내외의 친척들이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해마다 현산문화제 때 관심을 끄는 탁장사뽑기는 조선후기로 그 유래가 올라간다.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전국에서 쓸 만한 목재를 모았는데, 당시 양양군 현북면 어성전2리 개자니골과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가마골 사이의 언덕 위에는 국유림으로 황장목이 있었다.


이곳이 양양과 강릉의 접경으로 양쪽에서는 나라에 바칠 나무를 베기 위해 이곳에서 부역을 하였는데, 공교롭게 제일 큰 나무가 경계선에 서 있었으므로 서로 차지하기 위해 내기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강릉에서는 연곡에 사는 힘세기로 유명한 권장사가 먼저 지고 일어서다가 그냥 주저앉자 양양 서면 소래[송천리]에 사는 탁구삼 씨가 이 나무를 지고 서림까지 내려오자 소래마을에서는 탁구삼 씨를 위해 큰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탁구삼 장사의 이름이 알려졌으며, 매년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서 탁장사의 후계자를 뽑는 놀이가 이어져 왔다고 한다. 이때 장사가 난 마을에는 그 해 풍년이 들고 경사가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1984년 제2회 강원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종합우수상을 수상하면서 현재는 현산문화제 때 탁장사뽑기를 개최하고 있다. 당시 이 장사놀이의 고증은 탁상호외 4명, 지도는 최종덕, 인원은 120명이 참가하였는데, 해설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말엽 이곳에는 천하장사로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여러 가지 힘내기에서 이겨 양양 제1의 역사(力士)로 널리 알려졌다.

그가 죽은 후 양양 서면 마을에서는 탁장사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탁장사의 후계자를 뽑는 놀이를 하였는데,

큰 원목을 지게에 올려놓고 제일 멀리까지 지고 가는 사람을 제2의 탁장사로 칭하여 주는 동시,

양양 제1의 장사로 칭호, 지게로 만든 가마에 태워 축하하여주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 마을이 축제분위기였다고 한다. 이렇게 할 때마다 매년 풍년이 약속되었고,

마을의 영화와 국태민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사라졌다가

송천리 마을 노인들의 고증과 이 지방 사람들의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을 발굴 출연하였다.


021.jpg 이와 같이 발굴되어 양양에서는 탁장사의 후계자를 뽑는 탁장사 놀이가 지역의 민속놀이로 전한다. 탁구삼 장사의 일족은 본래 오색리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탁장사 후손들이 고성군 토성면 성천리와 양양군 서면 송천리 등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현재 탁구삼 장사의 묘소는 토성면 성천리에 있다. 지역에 전하는 유래에 의하면 탁장사의 출생 비밀로 당시 오색 장군바위 맞은 편에 묘를 쓰면 장사가 탄생한다는 설을 믿고 묘자리를 그곳으로 옮긴 후에 탁구삼 장사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가 계속 장사가 날 것을 두려워하여 장군바위를 깨뜨렸다고 한다.


탁씨 후손들은 오색2리 관토마을 뒤에 위치한 탁씨 시조산소에 매년 시제를 드리고 있으며, 탁구삼 장사의 묘소가 있는 토성면 성천리에서도 탁장사 기일에 제를 올리고 있다. 양양지역에서는 탁장사의 구전설화를 바탕으로 탁장사 뽑기대회를 하는데, 무거운 통나무를 지게에 싣고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하는 사람을 탁장사 후예로 선발하고 있다.
양양 탁장사 설화는 인물전설에 관한 연구에 해당된다. 전설은 일정한 민족 혹은 지방에서 민간에 의해 내려오는 설화인데, 신화가 신격중심이라면, 이것은 인간과 그 행위를 주제로 한 이야기다. 인물전설은‘구비상의 전(傳)’이므로, 전기적(傳記的) 유형 또는 일대기적(一代記的) 유형을 띠고 있다. 일대기적 유형은 한 인물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주요한 행적을 다루는 것으로 통시적 관점에서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어느 지역이든지 그 지역에서 위세를 과시하는 명문거족이 있으므로 인물전설은 자기 선조를 내세우기 위해서 이야기되거나, 자기고장을 자랑하기 위해서 그 지역의 인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므로 전설은 역사적 성격과 역사구술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장르라는 점에 주목하여 구술역사와 개인사 또는 생활사를 드러내는 기능의 측면에서 탁장사 전설의 개인사적인 측면과 지역생활사를 연계시켜 논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전설과 민담을 구별지을 수 있는 것은 화자나 청자가 그 이야기의 사실을 신빙하며, 증거물이나 기념물이 있다든가, 역사에서 전설화하거나 역사상 가능성이 있고, 일정한 정형이 없는 이야기 방식이다. 탁장사 설화는 이른바 힘자랑유형, 힘겨루기형의‘이기고 지는’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전설적인 인물로 형상화 되어 태생에서 명당과 관련된 비범한 탄생이라는‘영웅의 일생’유형구조를 지니고 있다.

 

 

 

 

 

장사 구납(具納)

 

양양의 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장사이야기가 전한다. 임거정이 해면에서 날뛰어 관원들을 괴롭히고 있을 때 양양 땅에서는 이경래라는 자가 떼를 지어 관민을 괴롭혀 약탈을 일삼고 있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임거정 일당을 잡기에도 동분서주를 해야 할 참인데 이경래가 또 날뛰고 있다하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더욱이 임거정이나 이경래는 다같이 천하의 장사여서 웬만한 힘으로는 이를 당할 만한 사람이 없어 인재난을 겪고 있을 때였다. 이 시기에 힘이 센 구납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힘도 세려니와 담도 컸으며 풍채도 좋아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호걸이라고 일렀다.


한때는 무과로 주부벼슬을 지낸 일도 있으나 상사와 의견이 맞지 아니하여 퇴관하여 야인으로 있었다. 나라의 형편이 이렇게 어지럽게 된데다가 도적들의 세가 워낙 크니“내가 그들 도적의 무리를 잡아 오겠소”하고 선뜻 나오는 사람이 없어 조정에서는 중신회의를 열어 장사를 천거하라고 하였다. 그 회의에서 이경래를 토벌하기에는 구납이 좋겠다하여 그가 지목받게 되었다. 상감은 그를 친히 불러보고 그 자리에서 선전관을 제수하고 암행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구납
은 오랫동안의 야인생활을 청산하고 관선에 오르게 되니 즐겁기는 하나 한편 대명을 맡고 있어 그 수행에 근심이 없지도 아니 하였다.


그는 이경래 토벌에 관하여 이 궁리 저 궁리하다가 우선 자기를 도와 자기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부하장사가 있어야겠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인물을 물색하였다. 그때 장안 포교 중에 힘센 장사인데다 도적 잘잡기로 유명한 변시진이라는 사람이 우선 머리에 떠올랐다. 변은 서울의 도적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는 변교리를 찾아가 이번 사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동행하기를 승낙을 받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장안의 건달두목이던 임완석을 찾아 협력을 구했다. 그도“동행하겠다.”하기에 든든한 수족을 얻어 날짜를 정하여 양양으로 향해 떠났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들이 양양에 가서 활동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구납의 삼촌을 양양부사로 발령시켜 주었다. 일행이 같이 길을 떠나기는 했으나 양양부사의 행차는 정장을 했고 구납 일행은 광대차림으로 다른 사람들이 이경래 토벌의 선전관임을 알아차릴 수 없는 행색으로 길을 떠났다. 그들 일행은 임지인 양양에 도착하여 산정에서 연회를 베풀고 그 고을에서 유지행세를 하는 모모한 인사들을 다 초청하였다. 그 모임 중에 풍채 좋고 말 잘하는 사람이 유독 눈에 띠었다.


구납은 그 사람에게 눈독을 들이고, 그 옆에 가서 술을 은근히 권하였다. 밤새도록 연회를 하다보니 다른 사람들은 다 술이 취하여 인사불성의 처지에 이르렀다. 구납이 풍채좋은 그 사람의 손을 비틀고 칼을 뽑아 가슴에 들이대면서“너 이놈, 네 놈이 이경래지”하고 호통을 쳤다. 이 돌연한 행동에 놀란 그는“그렇지 않다”고 해명을했다. 그러자“이놈 나는 어명으로 너 경래를 잡으러 온 사람이니 내 칼을 받아라”하고 대들었더니 자기는 이경래가 아니고 이경래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구납은 그“도적놈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일전 이곳에 와서 신관사또가 부임한다는 소리를 듣고 탐지하러 왔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간다고 여기를 떠났다”는 것이다. 구납은 이 말을 듣고“네가 이경래를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행적도 알고 있으니 너도 그와 내통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경래를 잡는데 협조하면 용서를 받을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너는 삼족을 멸할 것이니 그리 알고 협조하라”고 그의 협조를 다졌다.


다음날 구납은 삼인의 동행자를 데리고 금강산 일대를 다니면서 장구와 북을 울리고 좋은 목청으로 노래까지 부르며“우리는 서울서 금강산 구경 온 광대들로 이곳에서 며칠 공연을 할 것이니 노래를 들으러 오라”고 선전하며 다녔다. 금강산에 유람 온 사람들은 장안명창이 왔다는 말에 모두 모여들었으나 그 중에도 이경래는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외금강에서 내금강 장안사까지 거쳤으나 끝내 찾는 이경래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근심에 잠긴 구납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장안사 앞마당을 거닐었다. 한밤중에 나와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다가 장안사 앞산을 바라보니 산중턱에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 는 이상히 여겨 한걸음 두 걸음 그 불을 찾아가 보았다. 조그마한 움막 한 채가 있기에 문을 열어보니 중 한 사람이 당황해하며 무릎 밑에 무엇인가를 감춘다. “당신은 누구길래 이 밤중에 이곳에 왔소?”하고 묻기에“나는 서울서 온 광대하고 잠이 안 와 절 마당을 서성거리다가 이곳에 불이 있기에 찾아 왔소”라고 대답했다.

 

중의 무릎을 살며보니 보통 사람은 신을 수 없는 엄청나게 큰 가죽신 한 짝이 보였다. 구납은 저렇게 큰 신을 신을 사람은 이경래 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되어“이놈, 그 신은 이경래의 신이지. 나를 숨길 수 없다. 나는 서울서 임금의 명을 받아 이경래를 잡으러 온 사람이다. 네가 이경래를 잡는데 협조하면 나라에 알려 상을 줄 것이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네 놈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어서 바른대로 대어라”하고 윽박질렀다. 중도 할 수 없다는 듯 단념하고 자기에게 도적을 잡을 대책이 있다면서“이경래는 본시 노래를 좋아하며 장안사에 장안명창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저에게 신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이 신을 찾으러 모레 이리로 오게 약속을 하였소. 그때 나리께서 이곳에 와서 노래를 불러 흥을 돋구어주면 술을 좋아하는 성미에 더욱 술을 많이 먹을 것이오. 대취한 뒤에 결박을 지으면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기에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였다.

 

구납도 호쾌한 장부로서 이경래의 일대일 대결을 하고 싶었으나 만약 그러다가 일을 그르치면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저지를까 두려웠다.

 

그는 데리고 온 사람을 양양부사에게 급히 보내 날쌘 군졸 50명 만 얻어 오라하여 거사 전에 이들을 변복시켜 요소요소에 배치하여 놓았다. 약속한 이경래는 산에서 내려와 신을 찾으러 왔다. 중은 “신이 좀 덜되었으니 그때까지 기다리라”하고“그동안 심심하면 마침 준비된 술도 있고 하니 명창을 불러 노래나 듣자”하였다. “이경래도 승낙하기에 중은 장안사에서 올라오는 길을 보고 일행이 많으면 수상하게 여겨 도망칠 터이니 나으리하고 저하고 단 두 사람만이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하기에 그렇게 하자고 하고 두 사람만이 장안사를 떠나 산사 움막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주안상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서로 대좌하였다. “그대가 장안명창이라지?”,“ 네, 명창이랄 것은 없어도 소리마디나 합니다. 노래 중에서 무슨 노래를 잘하는가?”,“ 네, 권주가가 특기이니 권주가부터 하겠습니다.”하고는 소리를 뽑았다. 워낙 목청도 좋은 데다가 이 자리가 특별한 계략이 있는 자리라 평소보다 더욱 잘하였다. 술맛 좋은 데가 노래마저 좋으니 흥에 겨워 이경래는 연거푸 잔을 비웠다.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이경래는 도연히 취하여 갔고 구납은 긴장한 탓으로 취기가 없었으나 일부러 취한 척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이경래는 취기에 못 이겨 옆으로 넘어지자 구납은 소매속에 감추었던 철퇴를 뽑아 내리쳤다. 이경래는 술이 취하기는 하였으나 철퇴 한 대를 맞고 벌떡 일어나더니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구납은 그 뒤를 따르며“이놈, 네 놈이 힘깨나 쓴다고 그 힘을 믿고 농사짓는 시골 백성을 괴롭히며 나라의 명을 어겨 왔으니 네 놈은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소리를 지르며 그를 따랐다. 취중이기는 했지만 힘이 장사인데다가 사세가 급하게 된 이경래는 산으로 도망치다가 근처에 매복하고 있던 양양군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다음날 구납은 이경래를 결박하여 서울로 압송하여 금부옥에 가부고“상감의 명이 아니었던들 이경래와 힘내기를 한번 해보는 건데 잡기
는 잡았으나 힘으로 못 잡고 계교로 잡은 것이니 천추의 한”이라고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