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문화23호

설화 - 안심암(安心庵)의 자심탑(慈心塔) 외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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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157회 작성일 2012-03-22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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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안심암(安心庵)의 자심탑(慈心塔)

<편집실>

 

양양에서 서쪽으로 4km쯤 가면 안심암(安心庵)이라는 절이 있다.

 

옛날 이절에 효성이 지극한 자심(慈心)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자심은 불심이 두터워 중이 되었지만 속세에는 불교를 믿지 아니하는 부모가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한 해인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가 홀로 남게 되었다.
효성스런 자심은 신심이 없는 어머니가 절에서 기거하기가 오히려 불편할 것 같아서 절로 오지 아니하겠다는 것을 더 강제로 권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어머니 뜻대로 살게 하고 매일 한 번씩 찾아뵈옵고 노모를 위로하는 것을 일과로 삼으면서 지냈다.
비록 출가한 중이라고는 하나 홀로 남아있는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니 어머니 생전에는 불편이 없이 지내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 멀지 않아 죽으면 신심이 없었던 어머니에게 극락에는 가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어머니 죽은 후의 고초가 걱정이 되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신심을 가지라고 더 권하지도 못할 바에야 어머니의 사후를 위해 어머니를 대신하여 불사(佛事)를 일으켜야겠다고 어머니 몫의 탑을 하나 짓기로 했다.
그는 탑에 쓸 돌을 여러 곳에서 찾아 그 한 덩어리를 정성을 다하여 다듬었다.
망치와 정으로 돌을 다듬을 때에는 어머니의 극락행(極樂行)을 염(念)하면서 다듬었다.
돌을 다 다듬은 뒤에는 자기 어머니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수고를 끼쳐서는 어머니가 극락 가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것 같아 며칠이 걸리던 자기 힘으로 돌을 다듬고 돌을 끌어다가 탑을 쌓았다.
그러다 보니 자심(慈心)의 공력(功力)도 많이 들었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동료 승려들이나 이웃사람들이 그의 성력(誠力)에 감동되어 협력하겠다고 자청해 오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는 모두 사절하고 홀로 자기 힘으로만 이 탑을 쌓아갔다.
그러던 중 아직 탑이 완성되기 전에 어머니가 병상에 눕더니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났다.
탑이 되기 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니 자칫하면 어머니는 극락에 가지못하였을 지도 모르겠다고 혼자 걱정을 하였다.
상사(喪事)를 마치고 절에 돌아와 보니 자심(慈心)이 완성하지 못했던 탑 윗부분이 깨끗이 완성되어 있었다.
자심이 이상히 여겨 동료들에게 물었더니“자네 어머니가 죽어 염라대왕에게 심판을 받기 전에 탑이 다 완성되어야 그 탑의 공력으로 극락에 가겠기에 자네 어머니 병환이 위중하다는 소리를 듣고 남은 부분을 우리가 협력하여 다 마치었네.”라고 한다.
한편 고맙기도 하려니와 한편으로는 남의 힘으로 마치게 되어 개운치 아니한 데가 있었지만 이미 다된 것이니 그대로 두고 날을 받아 탑제(塔祭)를 지내기로 했다.
그런데 탑제(塔祭) 바로 전날 밤 자심(慈心)의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나는 생전에 적선한 것도 없고 불심도 없어 지옥으로 갈 것이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불사를 일으켜 탑을 쌓은 은공으로 극락에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탑의 밑 부분은 염불하며 정성을 다하여 지어서 좋으나 웬일이지 위 부분은 염불도 정성도 없이 지어져 그것 때문에 극락에 못 가고 미결로 남아 있다. 그러니 네가 이왕 나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니 윗부분의 사연을 알아서 잘못되었거든 그 부분만 헐어 다시 쌓아 달라”라는 것이다.
자심은 느껴진 바가 있어 날이 밝은 뒤 탑에 올라가 자기가 쌓지 아니한 부분을 전부 헐어 버렸다.
이것을 본 동료나 동네 사람들이“우리가 그대의 효성에 감동되어 괴로움을 무릅쓰고 그대 어머니 죽기 전에 완공하려고 밤을 새워가며 쌓은 탑이다. 그 탑을 헐어버린다는 것은 남의 성의를 무시한 처사다”라고 노기등등하여 대어 들었다.
자심은 어젯밤 꿈 이야기를 소상하게 말하고 양해를 구하여 겨우 납득을 시켰다. 그날부터 자심은 전과 같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아니하고 혼자 힘으로 열심히 염불을 하며 탑역사(塔役事)를 다 마치고 탑제(塔祭)날을 정하여 탑제(塔祭)를 올렸다.
탑제날 밤 꿈에 또 어머니가 나타났는데 비단옷을 입고 연꽃 속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연꽃을 타고 자심에게 오더니“나는 그동안 극락도 지옥도 아닌 곳에서 미결인 체 고생하고 있었다. 이제 염라대왕이 불러 대왕 앞에 갔더니 대왕이 인과업보란 본인에 의한 것인데 그대는 생전 그대의 업보로는 당연히 지옥으로 갈 것이로되 아들의 효성과 신심이 하늘에 사무쳐 오늘 아들 덕에 극락으로 가게 되었다.
가게 된 연유나 알고 가되 그대는 극락에서 아들을 위하여 축원하라고 하였으니 내가 오늘 극락에 온 것은 네 덕이라고 알려주었다. 그 뒤부터 이 탑을 자심탑이라 부르게 되었고, 죽은 부모가 극락 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꼭 이 탑에 와서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고 한다.

 

 

 

관찰사 오도일(觀察使吳道一)과 소금장수

오도일(吳道一)은 조선조 숙종(1795∼1720년)때의 문신으로, 자는 관지(觀智) 호는 서파(西波) 1673년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 대제학(大提學), 한성부윤(漢城府尹), 병조판서(兵曹判書) 등을 역임하고, 문장이 뛰어난 분으로,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영동지방을 순시 중 낙산사에 도착하여 빈일루 누각위에 자리하고 그 수려한 경치에 도취되어 시를 지으려고, 시운(詩韻)을 읊조리고 있는데 누각 아래서 누군가 인기척을 하면서 말하기를“관찰사 사도오(使道伍)의 글 잘한다는 말이 가소롭도다”하면서 조롱하는 소리가 들려 오도일관찰사(吳道一觀察使)는 그래도 시운을 계속 읊조리니 역시 같은 곳에서“관찰사 사도오(使道伍) 글 잘한다는 말이 가소롭기만 하도다.”하는 소리가 또 들려와 관찰사 오도일은 노하여 수행원을 시켜 어느 놈인지 찾아보도록 한즉 하인들 말이 어떤 소금장수 한 놈이 누각 밑에 소금지개를 괴여놓고, 그 옆에서 돌을 베고 자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하인들을 시켜 그놈을 잡아 와 자기 앞에 앉혀놓고 말하기를 네놈이 어찌하여 감히 나를 비웃는다는 말인가 하니 소금장수 말하기를“사도께서 밤이 새도록 글만 읊조리시고 잠자리에 들지 않음으로 그러한 말을 하였습니다.”하니 관찰사 오도일은 말하기를“내가 운자를 부를 터이니 네가 시를 잘 지으면 상을 줄 것이고 못 지으면 곤장(棍杖)을 면치 못할 것이다.”하면서 일천천자(千字)를 운자로 부르니 소금장수는 곧이어 부르기를“부천대해(浮天大海)는 동남북이요, 삽지기봉(揷地奇峰)을 만 2천올시다.”하였다.

이것을 곧 해석하여 보면“하늘에 띠워놓은 큰 바다는 동쪽, 남쪽, 북쪽 3면이 다 바다이고 땅에 꽂아놓은 기특한 봉들은 금강산 1만2천봉이 뒤가 됩니다”하니 관찰사 오도일은“이렇게 멋진 글귀를 보고 놀라서 말하기를 자네는 과연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로다.”성명은 무엇인가 하니 소금장수는 말하기를 “천한 사람이 성명을 세상에 전하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하필 사도오(使道伍)께서 물으시니 소인의 성명만이나마 오가(吳哥)라고 불러주십시오”하고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6·25한국전쟁 전까지 낙산사 경내에 이름이 난 빈일루에 오르면 낙산사 주위 사방의 경색을 관상조망하는 곳으로 특히 시선묵객(詩仙墨客)들의 글 짓는 곳으로 유명했다. 지금은 그 자취도 볼 수 없어 낙산사의 옛 정취를 잃은 것 같다.

 

 

 

구탄봉(九嘆峰)

함창봉에서 바로 서쪽으로 약 500m 거리로 마주보는 산이 구탄봉이다. 그런데 산명은 구탄봉이라고 하기까지에 물론 거기에 대한 유래도 있거니와 또 근사하게 전하여 내려오는 속설도 많은 것이다. 고려시대에 지술가로 유명하던 도선(道詵)이 오대장맥(五坮長●)을 타고 들어오다가 지진두인 남대천 머리에 다달아 동으로 흘러가다가 이 산세를 바라보니 반드시 여기에는 명당이 숨어 있을 것을 짐작하고 두루 더듬어 보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탄식하고 내려와서는 다시 쳐다보고 또 올라가서는 탄식하기를 아홉 번이나 하였다. 그래서 구탄봉이라고 하였다한다. 또 항간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양양의 안대산은 화산이었다. 그래서 이 화산을 앞에 놓은 양양에서는 이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매년 춘추 2회식 이 산상에서 무녀를 불러드려 굿놀이를 하였다. 그래서 굿터봉이라고도 전하고 있다. 이 봉을 수위로 열두봉우리가 중중(重重)히 양쪽으로 늘어섰으니 무산(巫山) 12봉이라고 말한다.
이 상봉에 올라서면 주위경관이 안하에 전개하였으며 삼삼(森森)한 수림들은 천년림을 이루고 있다.
백리장강의 남대천물은 굽이굽이 산밑을 안고 돌아 동해로 흘러가고 설악에서 쏟아지는 일진풍은 정방향으로 마주친다. 산이 체용도 좋거니와 골 이름도 기묘하니 이 산을 찬미하기에는 자연동명[곤우꼴]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임천리에 함평이씨라면 한참 구한국시대에 대소과(大小科)가 쏟아져서 사관으로나 문한(文翰)으로나 양양의 갑족이라고 하리만치 가성이 진진하였지만 또 그 이씨문중에서도 제일 문한이 좋고 가세가 부요(富饒)하여 만석꾼이라고 호칭하든 이교환씨의 조부 산소가 이 골안에 들어와서 미좌축향으로 앉게 되었다. 그때 묘지를 점택하던 지술가의 판정이“천곤장익(天●張翼)”하늘의 곤조가 나래를 펴고 앉은 형국이라고 크게 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이 지명을 곤우꼴이라고 불러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