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문화23호

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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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371회 작성일 2012-03-22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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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편집실>

>>> 조산리(造山里)

고려말에는 마을명을 시상촌[柴桑村: 조인벽이 양양조산리에 은거하여 그 마을 이름을 중국 동진(東晋)의 은일시인(隱逸詩人) 도연명(陶淵明)이 살던 중국 산서성 시상산을 모방하여 시상촌이라 하였다고 함]이라고도 하였는데 현재는 조산(造山)이다. 옛날 이 마을 산맥이 바닷가까지 이어져 있지 않고 중간이 끊어진 것을 보신 고승이“그 산맥이 끊어져 있어 훌륭한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앞날의 발전을 위하여 동리 주위에 산을 만들어야 한다며 1657년 선조들이 인력으로 만든 연고로 조산리라 칭하였다. 산을 인위적으로 만든 후 이 마을에서 훌륭하고 유능한 선비, 학자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지금도 조산초등학교 옆에는 산봉우리가 있는데 그 때 동네 사람들이 만든 산이다. 또한 이 마을 솔밭 속에는 고려시대부터 나라의 예법(禮法)에 따라 중사(中祀)로 제례를 올리는 신성한 동해신묘(東海神廟)가 있다. 조선 성종 21년(1490년)에 해군부대였던 대포영이 강릉 안인포에서 이곳 조산리로 옮겨왔으며, 수군사령관인 대포만호의 작전지휘 하에 동해안을 방어하던 곳이다. 또한『한국지명총람』에도 조산리는 성(城)안에 있는 마을이란 의미의‘성안말’북쪽 문 뒤편 마을이란 의미의‘북문뒤’등의 지명이 기록되어 있고,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도평에 대한 유래는 1667년에 산이 붕괴되어 섬이 되었던 것이 1867년에 대홍수로 인하여 매몰되어 현재는 전답으로 화하였으므로 과거의 섬을 추상하여 섬들[島坪]이라고도 한다.

 

 

>>> 황이리(黃耳里)

황이리는 일명 황룡마을이라 한다. 신라시대 수도승들의 요람이었던 선림원지와 미천골을 품에 안은 전형적 산촌마을인 황이리는 마을 형상이 귓불이 늘어진 누런 황룡이 머무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한가운데로 남대천 지류인 1급 수질의 후천이 흐르고 있다. 또한 미천골은 하늘과 산이 맞닿는 곳에서 쏟아지는 폭포수, 미천골자연휴양림, 불바라기약수터, 문닫이암산, 얼음굴, 맑은 계곡 등 풍부한 관광자원인 자연환경에 곁들인 황이리의 특산물은 친환경우렁이농법으로 재배하는 친환경쌀과 인진쑥, 장뇌, 산채, 송이, 토종꿀, 표고버섯, 목공예품 그리고 산천어 등 희귀어가 맑은 후천에서 살고 있으며, 특히 여름이면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드는 원시림이 무성한 천혜의 아름다운 마을이다.

 

 

>>> 수여리(水餘里)

고려 명종(明宗)때부터 조선초기(1450년) 단양우씨(丹陽禹氏)의 우거지(寓居地)였다. 전염병으로 우씨일가(禹氏一家)가 몰락하고 두 가구만 남았을 무렵 이세문(李世門)이 단종폐위 계유정란(癸酉靖亂)시 삼척에 정배되었다가 1456년 함흥 본궁으로 양이(量移) 중 양양에 잠시 머물었을 때 무혐의 특별 몽유[蒙宥: 죄인이 놓임을 입음]로 윤허[允許: 임금이 허가함]의 은혜를 입고, 이곳을 매입 정착한 곳이다. 당시 마을 안은 온통 굴참나무숲이던 것을 개간 정지하여 양양제일의 명당 터라 불리는 흥덕말을 조성하고 보니 곳곳에 넓은 바위가 있어 그들 바위에서 글공부를 하였다하여‘문바우마을’[文巖鄕]이라고 하였다. 한편 마을 뒤는 남대천의 물굽이가 휘어 닿는 곳으로 물이 풍부하고 경치가 아름답고 물이 모자라는 때가 없다하여‘무내미’라고 불렀으며 조선시대 관덕정이 있었다. 행정구역상 조선시대는 통칭 동면(東面)이라 하였으며, 1916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당뒷말, 바구매[博古馬], 버덩말, 솔말, 동녘말, 흥덕말, 서녘말, 넘말을 병합하여 수여리라 명하고 손양면에 편입되었다. 수여리에는 얄궂은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시대 1580년 송강 정철이 강원관찰사가 되어 동해안을 순행 중 이 마을 서낭재에 올라 서서 “이크! 여기 대리[大● : 큰 교룡, 큰 뿔 없는 용]한 마리 있군”하면서 소금항아리로 살(煞)을 지르고 갔다한다.

 

 

>>> 둔전리(屯田里)

신라시대에 창건한 진전사가 있었는데 고려때 둔전(屯田)이 있었으므로 둔전리라 칭하게 되었다. 조선조 때 강선면으로 있을 때에는 강선역의 토지인 둔전이 있었으므로 둔전동이라 불러 오다가 1916년 행적구역 폐합에 따라 둔전리라 하여 강현면에 편입되었다. 여귀소는 진전사지 탑 앞 하천에 수심이 10m 가량 되는 소가 있는데 진전사 창건 시 여승이 절을 지으려고 기도를 하는데 중에 현몽하기를“이 소를 뛰어 건너서갔다 오면 절을 짓도록 하여준다.”고 하므로 여승이 이 소를 뛰어 건너가다가 익사하여 여귀소라고 한다.(둔전리 추종삼의 증언) 한편 옛날 아기를 업은 아낙이 이곳 물가 언덕에 뽕을 따러갔다가 등에 아기를 업고 뽕 따기가 힘들어 아기를 내려 잠재우고 뽕을 따다가 젖을 먹이려고 아기를 찾으니 간곳이 없어 찾으니 그녀의 귀여운 아기는 잠에서 깨어나 엄마젖을 찾아 엉금엉금 기어가다가 그 깊은 소에 빠져 익사한 것을 발견하고“아기야! 아기야!”애타게 부르던 그 소리 오래오래 메아리지니 세인들이“아기소”라 했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단다.(사교리 최돈수의증언) 둔전리는 추계 추씨(秋溪秋氏)의 세거지(世居地)로 탑거리 동남쪽에 추계 추씨 10대 기념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여지도서』양양부편에 의하면 영조 35년(1759년)에는 둔전동리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