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문화24호

제27회 향토문화 공모전 대상 국무총리상 수상 논문 / 동해신묘의 역사적 고찰과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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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674회 작성일 2013-04-04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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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향토문화 공모전 대상 국무총리상 수상 논문>
동해신묘의 역사적 고찰과 이해
<양양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

Ⅰ. 연구의 목적 

고래(古來)로부터 나약한 인간들은 신(神)이 우주 만물을 만들었고, 이러한 만물에는 신이 함께하고 있으며, 자연재해(自然災害)는 이러한 신들의 노여움 때문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므로 평안을 위해 산 천해악(山川海嶽)에 제단(祭壇)을 만들고 수시로 제사(祭祀)를 지내왔다. 
여기 양양(襄陽)의 동해신묘(東海神廟)는 황해도 풍천의 서해단(西海壇), 전라도 나주의 남해신사 (南海神祠) 등과 함께 해신에게 국토수호, 국태민안과 풍농 풍어를 기원했던 곳으로 4해(海)의 으뜸인 동해지신(東海之神)이 주석하는 이곳에서는 왕(王)이 내린 향(香)과 축(祝)으로 매년 새해 별제(別祭) 와 2월과 8월에 상제(常祭)를 행하여 왔다. 
양양 동해신묘의 창건연대는 자세하지 않으나 고문헌·지지자료·고지도 등을 종합해 볼 때 적어 도 고려 제6대 성종 10년(991년)에서 고려 제8대 현종 19년(1028년)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동해신묘(東海神廟)는 강원도 양양 땅에 있으며, 사해(四海) 가운 데 첫 번째로 동해신(東海神)의 신호(神號)를 내렸다.”고 하고 있고, 『고려사』동계편과『조선왕조실 록』,『 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도 고려조에 동해신묘는 양양 땅에 있다고 하고 있으며, 조선조에도『조 선왕조실록』등에 태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현종, 영조, 정조, 철종, 순종 당시에도 양양 지역에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고, 동해신묘가 이전(移轉)하였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 다. 
그럼에도, 1968년 양양교육청 발간『향토지』와 1976년 양양문화원 발간『향토지』에“묘(廟)가 본 래는 강릉에 있었는데 성종 21년(1490년)에 수군만호영을 강릉으로부터 대포성(양양읍 조산리)에 이 전할 때에 같이 이건하였다는 설이 전파된 것이 아닌가 본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1990년 양양군이 출간한『양주지』에는“본래는 강릉 안인포에 있었는데, 성종 21년 (1490년)에 수군만호영이 현 양양 읍 조산리에 이건하였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으며”라고 이를 답습하고 있다. 또한 강릉시청 공식홈페 이지인 디지털 강릉 문화대전에는 동해신묘의 정의를“우리나라 동해안 강릉 정동의 동해신을 모신 곳”이라고 하고, “본래 정동진에 있었으나 현재는 양양 조산리에 이전되어 있다.”라고 하고 있으며, 건립연대를“고려 공민왕 19년(1370년)으로 추정”하는 등 역사기록이 왜곡되고 있다. 그럼에도 네이 버(naver), 다음(daum) 등 인터넷 검색 사이트의 지식백과에 링크시켜 놓고 잘못된 정보를 국민들에 게 제공하고 있으며, 문화재청의 설명자료도 미흡한 것으로 판단된다.1) 이에 동해신묘에 대한 역사기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올바른 역사를 알릴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순종 2년(1908년) 일본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따라 일제(日帝)의 통감부훈령으 로 동해신묘가 훼철(毁撤)된 후 85년만인 1993년 정전(正殿)을 복원했으나, 일제가 민족혼 말살을 위 해 흔적을 철저하게 훼손하였고, 한국전쟁, 낙산도립공원 관광개발 등 격동기를 거치면서 심각한 훼 손으로 흔적을 찾지 못한 채, 검증이 부족한 상태로 복원됨으로서 방위문제에 대한 논란까지 제기되 고 있어 관련 역사기록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오해(誤解)를 해소(解消)시킴으로서 역사를 바로 세워 민족의 유산(遺産)으로 승화 발전시키고자 한다

Ⅱ. 해신(海神)에 대한 역사적(歷史的) 고찰(考察) 

『삼국사기(三國史記)』등의 문헌기록에 미루어 삼국(三國) 이전에는 주로 종묘(宗廟)를 세워 시조신 (始祖神)이나 조상신(祖上神)에 제사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제전(祭典)에 삼산(三山)에 대한 기록은 백 제(百濟)에도 있었으니, 『삼국유사(三國遺事)』권2 남부여조에“(扶餘)中有三山, 曰日山·吳山·浮山, 國家全盛之時, 各有神人, 居其上, 飛相往來, 朝夕不絶”이라고 하고 있어 산신(山神)에게 제사를 지냈 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新羅)의 종묘제도는 제2대 남해왕(南解王) 3년에 비로소 시조(始祖)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사당을 세워 4시〔春夏秋冬〕로 제사(祭祀)하였고, 제36대 혜공왕(惠恭王)에 이르러 5묘(廟)2)의 제(祭) 를 정하였으며, 당(唐)의 도움으로 3국을 통일한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당의 영향을 받아3) 제37대 선덕왕(宣德王)에 이르러 名山大川에 대한 제전(祭典)을 확립하였다.
그러나『증보문헌비고』제61권 악해독산천 신라편을 보면“신라7대 일성왕 5년(138년) 임금이 북순 (北巡)하여 태백산(太白山)에서 제사하였다”고 하고 있어 이미 신라초기(新羅初期)에도 삼산(三山)에 대한 제사제도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5)와『증보문헌비고』6)를 보면 통일신라의 제전(祭典)은 3산(山) 5악(岳) 4진(鎭) 4해(海) 4독(瀆) 이하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나누어 제사(祭祀)를 하였 던 것으로, 여기 대중소(大中小) 3사(祀)의 분류 역시 중국 고대의 사전(祀典)을 모방한 것이니, 주례 (周禮) 춘관(春官) 소종백조(小宗伯條)에“立大祀, 用玉帛牲, 立次祀, 用牲幣, 立小祀, 用牲”이라 하 고, 그 주(注)에“鄭司農(鄭衆)云, 大祀, 祭天地, 次祀, 日月星辰, 小祀, 司命(宮中小神) 已下, 玄(鄭玄) 謂大祀又有宗廟, 次祀又有社稷·五祀·五岳, 小祀又有司中(星名)·風師·雨師·山川百物”이라고 하 고 있다. 
신라의 국도(國都)인 경주(慶州)는 남쪽에 위치한 관계로 당시 동해는 경주의 동쪽인 아등변(阿等 邊: 지금의 영일군 흥해면)에, 서해는 미릉변(未陵邊:지금의 옥구군 임피면)에, 남해는 형변(兄邊: 지 금의 동래)에, 북해는 비례산(非禮山: 지금의 삼척)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4해신은 이미 중사(中 祀)로 모셔졌었고, 이를 관장하던 용왕전(龍王典)에는 대사(大舍)와 사(史) 각 2명이 있었다.
통일신라의 뒤를 이어 건국한 고려는 도읍을 개경(開京)으로 정하면서 개경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제전(祭典)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고려 제전의 설치기록은 성종(成宗) 10년(991년) 처음 사직단(社稷 壇)을 설치하도록 명하고,8) 이를 관장하는 기구로 사직단에 장상 2명을 두었다.
『증보문헌비고』악해독산천 고려편을 보면“현종 19년(1028년)에 남해신(南海神)을 사전(祀典)에 올렸는데, 그것은 정안현(定安縣)에서 다시 산호수(珊瑚樹)를 바쳤기 때문이었다.”라고 하고 있고, 숙 종(肅宗) 원년(1096년)10)과 숙종 3년11)에“5해신(海神)에 비를 빌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 이미 5해에 신사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공민왕 4년(1355년)에는 명나라 황제가 비서감 직장 하상봉(夏 祥鳳)을 파견하여 신호(神號)에 대한 규정을 정하여 조서해 왔으므로 고려에서도 신호가 봉해졌다고 본다.
고려시대 해신(海神)은 국가수호, 국태민안, 풍농 풍어뿐만 아니라 바다와 비를 관장하는 신으로 모 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해신은 신라와 당(唐)은 4방(四方)의 4해신(海神)을 모셨으나. 고려 숙종 원년 과 숙종 3년에는 다섯 곳의 해신에, 숙종 7년에는 세 곳의 해신에 제사를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 려는 북쪽의 두 강과 함께 5해신을 모셨던 것 같다. 이는『신증동국여지승람』과『여지도서(輿地圖 書)』의 기록을 보면, 동해묘(東海廟)는 강원도 양양 땅에 모시고, 서해를 지키고 다스리는 서해단(西 海壇)을 황해도 풍천에 모셨으며, 남해를 다스리고 지키는 남해신사(南海神祠)를 전라도 나주에 모셨 다. 그리고 북쪽은 바다가 없어 해신을 모시는 대신 강의 신을 모셨으니 강신을 봉사한 사당으로는 북 동편은 함경북도 경원에 두만강신사(豆滿江神祠)를, 북서편에는 평안북도 의주에 압록강사(鴨綠江祠) 를 모셨음을 알 수 있다.13)
『대동지지(大東地志)』강원도 양양군 단유편에“그 전고(典故)에 의하여 조선에서도 그대로 따랐다.”고 하고 있어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도 제전은 중국의 제도를 따랐던 신라와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태종은 부·주·군·현(府州郡縣)에 모두 사직단(社稷壇)을 세워서 봄·가을에 제사를 행하고,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으며,14) 동 해신묘 찬실도에 보면, 조선 태종 14년(1414년) 8월 예조에서는 조선의 제전을 대중소사로 등급을 정 했는데, 악해독(嶽海瀆)은 이때에도 중사(中祀)로 모셨다.
세종은 악(嶽)·해(海)·독(瀆)·산천의 단묘(壇廟)와 신폐제도를 정하면서 나라에서 행하는 해(海) 는 중사로 행하고, 사묘의 신호, 제복, 신위판, 제사의식, 단유 등 단묘(壇廟)와 신폐(神牌) 기준을 정 하고 이에 따르도록 하였다.
중사(中祀)인 해신(海神)은 조선시대도 고려처럼 국가의 안녕과 풍년, 풍어를 기원하였던 곳으로 매 년 새해의 별제와 중춘, 중추의 상제에 왕이 향과 축을 보내어 제사를 올렸으며, 이외에도 가뭄 등 국 가적 재난이 있거나 안전을 빌기 위해 수시로 제사를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조선 태종 4년(1404년) “종묘(宗廟)·사직(社稷)과 악해독(嶽海瀆)·명산 대천(名山大川) 및 소격전(昭格殿)에 비를 빌었다.”고 하고 있고,17) 중종 11년(1516년)에도“가뭄으로 향(香)을 내려 팔도의 악·해·독(嶽海瀆) 의 신에게 비를 빌도록 하였다.”고 하고 있으며,18) 또 영조 18년(1742년)에는“북도의 곡물선이 무사 히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동·남·북 3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해신(海神)에게 치제(致祭)하였다.”고 하고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권61 오례의(五禮儀)에 이르기를“악해독(嶽海瀆)의 신좌(神座)는 남향 으로 북쪽에 모신다. 정월에는 원장제(元壯祭), 2월 8월은 상제(常祭)로서 제사한다. 축문에는 국왕(國 王)의 성명을 쓴다. 헌관은 정삼품(正三品) 지방수령이 맡는다.”』고 하였으며,20『) 세종실록』오례의(五 禮儀)를 보면“동해신묘 축문과 홀기(行禮)는 다음과 같이 하고 축판은 소나무로 하되 규격은 가로 8촌 (寸) 세로 1척(尺) 2촌(寸) 두께 6분(分)으로 하고, 폐백(幣帛)은 저포(苧布)를 사용한다. 길이는 1장(丈) 8척(尺) 지금의 포백척 11척(尺) 5촌(寸) 2분(分), 색깔은 청(靑)색으로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에서 볼 때, 해신(海神)은 신라, 고려, 조선 이래 중사(中祀)로서 엄격한 기준에 의거 관리되었 으며 예를 갖추고, 왕이 향과 축을 보내어 새해와 중춘, 중추, 그리고 국가적 어려움이 있을 때 해신 에게 국태민안과 풍년, 풍어,기우(祈雨)를 기원하던 매우 중요시 되었던 곳이었다.



Ⅲ. 동해신묘에 관한 역사 기록들

앞의 역사기록에서도 보았듯이 당나라 때부터 시작된 중국의 오악, 오진, 사해, 사독제도를 처음 받 아들인 나라는 당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한 신라로 사해(四海)는 중사로서 당시 경주를 중심으로 동 해는 영일군 흥해면에, 서해는 옥구군 임피면에, 남해는 동래에, 북해는 삼척에 설치하였으며,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는 도읍인 개성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오악, 오진, 사해, 사독을 설치하였다. 
『고려사』제58권 동계편 익령현(翼嶺縣)에“지양주사(知襄州事: 지금의 양양)에 동해신사(東海神 祀)가 있다”고 하고 있고,22)『신증동국여지승람』양양도호부 명환(名宦)편에도 고려 때 왕이 내려준 향을 존무사가 받아온 기록이 있으며,23『) 신증동국여지승람』양양도호부편에“고려 때는 동해이므로 중사에 실려 있다. 그대로 따랐다.”고 하고, 고종 1년(1864년) 『대동지지(大東地志)』강원도 양양군 단유편에도“양양군 동쪽 13리에 있는 동해신묘에서 고려 때부터 중사(中祀)로 받들어 왔으며 그 전고(典故)에 의하여 조선에서도 그대로 따랐다.”고 하고 있어 고려 때 이미 개성(開城: 고려의 도 읍)의 정동인 양양에 동해신사가 모셔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를 보면 고려의 국가체제를 완비한 고려 제6대 성종 10년(991년) 춘추로 제사하는 사직단 의 터를 선정해 세우도록 대신들에게 명하였다고 하고, 국역『증보문헌비고』악해독산천 고려편을 보 면 현종 19년(1028년)에 남해신(南海神)을 사전(祀典)에 올렸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사』의 기 록에 의하면 동해신묘(東海神廟)는 강원도 양양 땅에 있으며, 사해(四海) 가운데 첫 번째로 동해신(東 海神)의 신호(神號)를 내렸다고 하고 있고, 여지도서에 동해는 묘(廟), 서해는 단(壇), 남해와 두만강 은 신사(神祠), 압록강에는 사(祠)로 기록하고 있음에 비추어 볼 때, 동해신묘는 남해신사 보다 앞선 시기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숙종(肅宗) 원년(1096년)과 숙종 3년에“5해신(海神)에 비를 빌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 이 미 5해에 신사가 모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공민왕 4년(1355년)에는 명나라 황제가 비서감 직장 하상봉(夏祥鳳)을 파견하여 신호에 대한 규정을 정하여 조서해 왔으므로 동해신호는 동해지신(東海之神)으로 봉해졌음도 알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동해신묘는 강릉으로 이전했다거나 강릉에서 이전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을 뿐만 아 니라, 조선 초기의 각종 기록에도 동해신묘는 양양 땅에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동해신묘 찬실도에 보면, 태종 14년(1414년) 8월 예조에서는“동해는 양양, 남해는 나주, 서해는 풍천으로 정하고 치제를 관에서 주관하였다.”고 하고 있으며, 조선의 제전을 대·중·소사로 등급을 정하였고, 악해독(嶽海瀆)은 이때에도 중사(中祀)로 모셨다.24)『세종실록』에 세종 19년(1437년) 3월 13일 2번째 기사에“나라에서 행하는 강원도 양양의 동해는 중사(中祀)이고 사묘(祠廟)의 위판(位版) 은 동해지신(東海之神)이라 쓴다. 동해는 강원도 양주 동해에 있다.”고 하고 있으며,25) 단종 2년 (1454년) 완성된『세종실록지리지』양양도호부편에도“동해신사당(東海神祀堂)은 양양부(府) 동쪽에 있는데 봄과 가을에 향과 축을 내려 보내 중사(中祀)로 제사를 지낸다.”고 하고 있으며,26)『세조실록』 에 세조 12년(1466년) 윤3월 10일(신사) 1번째 기사에“명하여 동해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27) 3일 후인 윤3월 13일 낙산사에 거동(擧動)하셨던 것으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중종실록』중종 11년(1516년) 4월 17일 2번째 기사에 보면, 나라에 가뭄이 심하여 강향사(降 香使)를 내려 보내 팔도의 악해독(嶽海瀆) 〔양양의 동해〕의 신에게 비를 빌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28) 중종 25년(1530년) 조선 전기의 전국지리지인『신증동국여지승람』양양도호부 산천편과 사묘편을 보 면, “동해신사는 부(府) 동쪽 13리에 있고 중사이며 봄과 가을에 향과 축을 하사하여 제사를 지낸다.” 고 하고 있으며,29) 조선후기의 대표적 지리지인『여지도서(輿地圖書)』의 산천과 단묘편에도 동해묘 는 부(府) 동쪽 13리 해상에 있으며 중사이고 정전 6칸, 신문 3칸, 전사청 2칸, 동서제 각2칸, 백천문 1칸으로 매년 새해(歲首)와 중춘, 중추에 향과 축을 내려 제사를 지낸다고 쓰여 있다.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저서『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권19의 비갈(碑碣)에 양양부사를 역임(1581∼1583)한 황해도 관찰사 배삼익(裵三益)공의 신도비문(神道碑文)에도“매년 축문을 받아 제사를 지냈다”고 하고 있으며,31) 현종 8년(1667년) 미수 허목의 글에도“양양(襄陽)에는 해상(海上) 에 동해신사(東海神祠)가 있다.”고 하고 있으며,32) 정조 24년(1800년) 4월 7일(己丑) 기사에“양양 (襄陽)의 낙산진(洛山津)에 있는 동해신묘(東海神廟)는 제향을 드리는 예법이 나라의 법전(法典)에 실 려 있으니 이곳을 어느 정도로 중시했던가를 알 수 있다.”33)고 하고 있으며, 영조 33년 읍지를 모아 편찬한 조선후기의 대표적 지리지인『여지도서(輿地圖書)』의 기록에도“동해를 지키고 다스리는 동해 묘(東海廟)를 강원도 양양 땅에, 서해를 지키고 다스리는 서해단(西海壇)을 황해도 풍천에, 남해를 다 스리고 지키는 남해신사(南海神祠)를 전라남도 나주에 각각 모셨다. 그리고 북쪽에는 바다가 없어 해 신을 모시는 대신 강(江)의 신을 모셨으니 강신을 봉사한 사당으로는 북동편은 함경북도 경원에 두만 강신사(豆滿江神祠)를, 북서편에는 평안북도 의주에 압록강사(鴨綠江祠)를 모셨다”고 하고 있다. 동해신묘는 수차례 중수를 거듭하였다. 조선 경종 2년(1722년)과 조선 영조 28년(1752년)에 양양 부사 채팽윤(蔡彭胤)과 이성억(李聖檍)에 의하여 각각 중수되었으며, 어사 권준(權晙)의 상소(上疏)에 대해 전교(傳敎: 임금의 명령)를 내리니 강원관찰사 남공철(南公轍)의 주장으로 동해신묘를 중수(重 修)하고‘양양동해신묘중수기사비(襄陽東海神廟重修紀事碑)’를 세웠다. 그 후에도 철종원년(1850년) 부사 홍운모(洪運謨), 광무 4년(1900년) 부사 이구영(李龜榮)에 의하여 중수(重修)했다고『양양읍지』 에 기록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의해 일제 통감부 훈령으로 순종 2년(1908년) 12월 26일 양양군수 최종낙(崔鍾洛)이 동해신묘를 훼철(毁撤)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최종낙 군수는 동해신 묘 훼철(毁撤: 헐어서 치워버림) 후 3일 만에 급사하였다고 한다. 그 후 1993년부터 복원사업이 추진 되어 현재 정전 6칸 1동이 건립 되었으며 정전의 북·서쪽에 두 토막이 났던 동해신묘중수기사비(東 海神廟重修記事碑)를 복원(復元)하여 세워 놓았다. 2000년 1월 22일 동해신묘지(東海神廟址)와 남공 철의 중수기사비는34)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되어 양양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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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동해신묘는 고려 때 개성(開城)의 정동(正東)인 양양에 처음 세워진 이래 계속 양양 땅에 있었다는 기록은『고려사』뿐만 아니라 조선조 태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현종, 영조, 정조, 철종, 순종 당시 역사기록으로 남아있으며 오히려 세조실록을 보면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상 소하기를“동해·남해·서해의 신사(神祠)는 모두 개성(開城)을 기준하여 정하였기 때문에 방위(方位) 가 어긋난다면서 동해신(東海神)을 강릉(江陵)에, 서해(西海)는 인천(仁川)에, 남해(南海)는 순천(順 天)에, 북해(北海)는 갑산(甲山)에 이제(移祭)하고, 일대의 사전(祀典)을 새롭게 할 것을 상소하니 임 금이 듣고만 있었다.”고 하고 있으며35) 그 후 4해의 어느 신사도 이전하였다는 기록이나 새로운 지역 에 신사가 있었던 기록은 전혀 찾을 수가 없다. 

Ⅳ. 동해신묘의 잘못된 이전(移轉) 논란

강릉시청의 인터넷 공식홈페이지인“디지털강릉문화대전” 등의 동해신묘 이전설 내용을 보면, “동해신묘는 당초 강릉도호부 정동진(正東津)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조선(朝鮮) 성종(成宗) 21년 강릉 대도호부 안인진에 주둔하였던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이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 대포진으로 이전 되는 시기인 중종 31년(1536년)에 함께 이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해신묘가 함께 이전하였다 는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의 이건 연혁을 살펴보면, 『세조실록』세조 13년(1467년) 8월 24일 기사에“혁파(革罷)한 연곡·양양 두 포(浦)의 선군(船軍)과 강(江)의 선척(船隻)을 다시 설치하고, 만호(萬戶) 가 수어(守禦)하게 하였다.”고 하고,37) 세조 14년(1468년) 6월 4일 기사에 의하면“혁파(革罷)한 연곡 포(連谷浦)·양양포(襄陽浦) 두 포의 선척(船隻)과 수부(水夫)를 안인포(安仁浦)에 이속(移屬)하고, 만 호(萬戶)를 차견(差遣)하여 방어(防禦)를 굳게 하였다.”고 하고 있으며,38)『 대동지지』에 의하면“혁폐 (革弊)한 대포진(大浦鎭)은 양양부 동쪽으로 12리에 있다.”고 하고, “성종 21년(1490년)에 강릉 안인 포에서 옮겨오고 만호(萬戶)를 두었다. 중종 15년(1520년)에 성을 쌓았으며, 둘레가 1천 4백 69척이 었는데 후에 고쳤다. 청초호(靑草湖)는 고려 때 만호를 두어 정박하는 병선을 관리하였다.”라고만39) 기록되었을 뿐으로, 수군만호영을 이전 할 때 동해신묘도 함께 이전하였다면 중사인 동해신묘의 이전 (移轉) 기록도 함께 있어야 할 것임에도 동해신묘 이전에 관한 기록은 없으며, 수군만호영과 동해신묘 가 함께하여야 할 상관관계도 없다. 
그렇다면 동해신묘에 대한 이전 설은 허균(許筠)의『성소부부고』에 있는 동해용왕비문 (東海龍王碑文)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한 기록은 1968년 양양교육청 발간『향토지』와 1976년 양양문화원 발간『향토 지』에“묘(廟)가 본래는 강릉에 있었는데 성종 21년 경술(1490년)에 수군만호영을 강릉으로부터 대포 성(양양읍 조산리)에 이전할 때에 같이 이건하였다는 설이 전파한 것이 아닌 가 본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1990년 양양군『양주지』에는“본래는 강릉 안인포에 있었는데, 성종 21년 (1490년)에 수군만 호영이 현 양양읍 조산리에 이건하였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으며…”라고 채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국어국문학자인 강릉대학교 장정룡교수가“강원도민속연구”논문에 허균(許筠)의『성소부부고』에 있는 동해용왕비문(東海龍王碑文)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이해관계가 있던 강릉시청이 공식홈페이지인“디지털강릉문화대전”에서 이를 왜곡 공론화시킴으로서 동해신묘가 강릉에서 이전해 온 양, 정사(正史)가 왜곡되고 있다. 
먼저 동해신묘의 강릉 이전설의 근원인 허균의『성소부부고』중 중수동해용왕비문(重修東海龍王碑 文)을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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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중수동해용왕 비문(重修東海龍王碑文)의 내용을 사실에 근거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신증동국여지승람』양양부 동산(襄陽府洞山)과『세종실록지리지』양양도호부편에 보면“동산현에 는 朴·金·崔·李·陳·林성씨가 있다.”고 기록되었고 池씨는 없는 것으로 보아 池益福은 가공인물 일 가능성이 높다.
2. 동해의 한 섬에 용왕의 궁이 있었고 이를 보았다고 한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내용으로 홍 길동전을 쓴 허균의 풍자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3. “내가 강릉(江陵)에서 제사를 받아먹은 지 수천 년이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강릉부 사람에게 쫓 기어 이곳에 옮겨와 보니 좋은 곳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글로 보아 이곳은 동해의 외딴 섬을 가 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양양의 동해신묘를 직시하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앞의 역사기록에서 볼 때 동해신묘는 통일신라시대에는 경주의 동쪽인 영일군 흥해면에, 고려조 이래 개성의 정동인 양 양에 위치하고 있었음이 역사기록으로 확인되고 있으므로 수천년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동해신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4. 동해신묘는 중사이므로 왕의 명에 의해 이전하거나 고치거나 해야 함에도 용왕이“목민관에게 말하라.”라고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해신묘를 보수했다면 왕의 명이 있어야 함에도 역사기록도 확 인되지 않고 있다. 
5. 향임(鄕任) 이석림(李碩霖)에 말하여 관에 보고하게 하였다는데, 이석림은 대포수군만호(大浦水 軍萬戶)를 역임한 이봉(1486∼1552)의 둘째 손자로 당시 10대 소년에 불과한데 어찌 향임(鄕 任)의 역할을 수행 할 수 있었겠으며, 녹봉까지 떼 내어 공장이와 인부를 모아 향임 이석림에게 감독 케 하고 보수 후 공이 몸소 제사를 지냈다고 했다. 동해신묘의 제사 예법이 나라의 법전에 실려 있었 는데, 임금의 승인도 없이 부사가 마음대로 보수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은 맞지 않다.
6. 부사 홍여성(洪如誠)을 홍여성(洪汝成)으로 기록한 것은 사실인양 하기 위해 비슷한 이름을 다르 게 쓴 것으로 보이며. 홍여성(洪汝成)이 전고(典故)를 들어 상고해 보니 사당(祠堂)이 강릉부 정동촌에 서 중종 31년(1536년)에 이곳으로 옮겨졌음을 알았다고 하는데, 이미 6년 전인 중종 25년(1530년)에 만든『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도“동해를 지키고 다스리는 동해묘를 강원도 양양 땅에(중략) 모 셨다.”41)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3해(海: 동해: 양양, 남해: 나주, 서해: 풍천)에 대한 지명이 표기되 어 있는 팔도총도(1481년)가 있다. 
특히 심언광(沈彦光)은 당시 문신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편수에 참여한 관원 중 일원이었는데 심 언광이 편수당시인 중종 25년(1530년)에는 동해묘가 양양에 있다고 기록하고, 6년 뒤인 중종 31년 (1536년)에 심언경, 심언광 형제가 용왕사당을 비용이 든다하여 옮겼다는 내용은 맞지 않다. 
7. 동산현에 산다는 지익복이 만났다는 왕이라는 자가 사당을 옮겨 달라고 했었는데 퇴락한 사당이 이미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동해신묘는 오래전부터 양양에 있었다고 보아야 하므로 앞뒤 정황이 맞 지 않다. 
8. 사당을 보수 단장하고 제사를 지내니 이때부터 양양에 바람이 없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고 하 였는데, 동해신은 양양의 신이 아니라 동해의 신임에도 강릉과 양양지역으로 한정하였음에 비추어 볼 때, 일정지역을 지키는 용왕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9. 강릉시는 디지털 문화대전에서 우리나라는 사해용왕을 위해 사당을 세우되 강릉이 동해의 한가운데이고 정동이라 이름하고 신라 때부터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의 동해묘는 경주의 동쪽인 아등변(阿等邊: 지금의 영일군 흥해면)에, 북해묘는 비례산(非禮山: 지금 삼척시)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고려사』에 보면 고려 때는 개성의 정동인 양양에 동해묘가 있다고 기 록하고 있음에도 신라 때부터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내용은 맞지 않다. 
앞에서 보았듯이 사해 해신은 고려시대 개성을 중심으로 방위(동해-양양, 서해-풍천, 남해-나주) 를 설정한 후 조선조에도『조선왕조실록』등에 태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현종, 영조, 정조, 철종, 순종 당시에도 양양 땅에 있었음을 확인되고 있고, 동해신묘가 이전(移轉)하였다는 기록 이나 흔적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또한 동해신묘가 고려 개경의 정동인 양양에서 한양의 정동 인 강릉으로 옮겨졌다면 서해나 남해신사도 풍천과 나주에서 인천과 순천에 함께 옮겨졌어야 이치에 맞을 뿐만 아니라, 한양의 정동인 강릉에 동해신묘가 이전하였다면 정동이 아닌 양양으로 다시 이전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고려 말 이래 동해(東海) 신(神)의 공식 신호인 동해지신(東海之神)과 동해용왕(東海龍 王)은 분명하게 다르다. 
용왕신에 관한 기록으로『지리지』전라도 남원도호부 용담현 편에 보면“마산담(馬山潭)은 현의 동 쪽. 곧 웅진분소가 있는데, 용왕신(龍王神)이 있다. 봄·가을에 그 고을에서 제사를 지낸 다.”고 하고 있으며,42)『 지리지』황해도 연안도호부 우봉현 편에 보면“박연(朴淵), 개성(開城)의 한우 물[大井]과 임진(臨津)의 덕진(德津)과 함께 세 곳 용왕(龍王)이라 하여, 가물 때 비를 빌면 응험이 있 으므로, 지금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한다”고 하고 있으며,43)『지리 지』경기 양주도호부 편을 보면“양진(楊津) 부(府) 남쪽에 있으니, 곧 한강[漢水]의 남쪽이다. 단(壇)을 쌓고 용왕(龍王)에게 제사지내는데, 봄·가을의 가운데 달[仲月]에 (나라에서) 향(香)·축(祝)을 내리 어 제사 지낸다.”고 하고 있어44) 해신과 달리 용왕신은 연못이나 우물에서도 용왕제를 올린 것으로 보 아 당시 강릉 고을에서도 고을의 안녕을 위해 동해용왕에게 제를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오랜 정치생활과 판서까지 지낸 허균이 동해지신과 동해용왕을 구별하지 못했을 리 없음 에도 모순투성이『성소부부고』를 지은 이유를 생각하건데 허균은 당시 사회문제를『홍길동전』을 통 해서 알리고 개혁하려 했었다면, 당시 관리가 소홀했던 제전의 문제를『성소부부고』를 통해서 알리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이를 문학적 해석이나 당시의 사회문제로 이해하려하지 않고 개인 문집을 정사와 연결시킴으로서 발생한 잘못된 역사해석이라 봄이 타당할 것이다.

Ⅴ. 동해신묘 복원과 방위문제

『관동읍지』양양부 단묘편과『여지도서』강원도 양양군 단묘편에 의하면 동해신묘는 정전 6칸, 신문 3칸, 전사청 2칸, 동·서재 각 2칸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의하여 일제 통감부 훈령으로 1908년 12월 26일 동해신묘가 훼철(毁撤)된 후 80여년이 지난 지금, 주변이 많이 훼손되었고, 동해신묘의 경우 일반인들이 왕래 할 수 없었던 곳이었던 관계로 원래의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을 찾지 못하여 동해신묘중수기사비가 있었 던 곳을 중심으로 악해독(嶽海瀆)의 신좌(神座)는 남향으로 북쪽에 모신다는『세종실록』오례편46)과 『증보동국문헌비고』권 61 오례의(五禮儀)에47) 근거하여 제단의 신위를 남향으로 하여 1993년 정전 6칸 1동을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강릉대학교 박물관에서는 1998년 11월 2일부터 12월 3일까지 약 1개월에 걸쳐 동해신묘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나, 일제의 동해신묘지에 대한 철저한 훼손과 한국전쟁 시 치열한 격전 으로 피난민들이 돌아와 임시거처를 마련하고 농지를 개간하고, 낙산도립공원내 집단시설지구를 조 성하면서 심하게 훼손되어 발굴지 에서는 방향을 확인할 수 있는 특 이한 자료는 나오지 않았다. 한편 “동해신묘 복원지에서 서쪽으로 100여 미터 지점 민가 앞에는 옮 겨온 것이라는 기단석인 장대석이 2개가 발견되었다.”고 하고 있고, 발굴조사 결과, “건물지의 규모나 범위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정전지 로 추정되는 지점에서 건물지의 기 단석 열이 일부 확인되었는데 이들 석렬 유구 2. 3. 4의 방향이 모두 북서-남동방향으로 노출된 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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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 동해신묘의 정전의 방향은 동남방향으로 안치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발굴현황 도면으로 볼 때, 건물이 동남향을 하였다면 건물이 악해독의 신은 북쪽에서 남향으로 앉아야한다(嶽海瀆神座在北南向)는『세종실록』이나『증보문헌비고』의 남향이 아닌 동남향 으로 안치된 상당한 이유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발굴조사나 구전을 통해 건물의 방향과 위치 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역사기록을 통해서 방향을 추정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먼저 고지도를 통해 방향을 추정해 보고자 한다. 고지도 중 해동지도(海東地圖; 1750), 광여도(廣 輿圖; 1800), 여지도(輿地圖; 1736), 지승(1776) 등 대부분의 지도에는 관청, 역, 동해묘, 사찰 등의 위치를 표시하면서 글씨와 건물 그림 모두를 위(上) 한 방향으로 그려놓았으나, 지방도(地方圖; 1872) 와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 1745-1765)에는 건물그림의 방향을 글씨방향과 다르게 그 려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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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고을에서 그려 올린 것으로 알려진 1872년의 지방도(地方圖)를 보면 글씨는 지도의 윗방향인 서 향으로 쓰여 있으면서도 관아(府官), 상운관(驛), 향교(文廟) 등은 남향으로, 신흥사와 낙산사는 동향 으로 그려져 있는 반면에 동해묘와 명주사는 서향으로 거꾸로 그려져 있으며, 1745년의 비변사인방 안지도에도 관아(衙舍), 상운관(驛), 향교(鄕校) 등은 동남향으로, 신흥사와 낙산사는 동향으로 그려져 있는 반면에, 동해묘와 명주사는 서향으로 거꾸로 그려져 있고, 현재 건물이 남아있는 신흥사, 낙산 사, 명주사의 현 방향에 비추어 볼 때, 동해묘의 방향은 서향이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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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세조 7년 예조판서 황수신과 참판 민원이 세조에게 아뢰기를“성신(星辰) 1단(壇)은 동 쪽에 있어 서향(西向)하고 있다.”고 하면서“동쪽의 10단(壇)은 북악단(北岳壇)·북진단(北鎭壇)·동 악단(東岳壇)·동진단(東鎭壇)·동해단(東海壇)·태세단(太歲壇)·제왕단(帝王壇)·산천단(山川壇)· 신기단(神祇壇)·사독단(四瀆壇)”이라고 하고 있으며, 전하께서는“이러한 옛날의 제도에 의거하여 전(殿)을 짓고, 담을 두르는 것은 진실로 좋은 일이다. 다만 근년에 국가에서 일이 많아서 갑자기 시 작할 수가 없으므로 여력(餘力)이 있기를 기다려야 하니,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하라”고 하였 고,49)『관동읍지』와『여지도서』에 보면“동해묘는 양양부 동쪽 10리 해상에 있다.”고 하고 있고, 『기 언』35권 미수 허목의 글에도“양양에는 해상에 동해신사가 있다.”고 하고 있어50) 아마도 동해신묘 정 전 뒤쪽은 바다와 접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는 삼국유사에도 문무대왕을 동해 대왕암에 상사한 후, 해룡(海龍)이 된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변 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는데 아들 신문왕이 용이 들어올 수 있도록 금당계하(金堂啓下)에 동향한 한 구멍을 냈다고 하듯이,51) 이는 동해신이 인간의 눈에 띠지 않고 재단에 쉽게 올 수 있게 하기 위해 바 다를 등지고 있지 않았을까? 
또한『연재선생문집』에 보면“동해신묘는 좌우 송림속에 있다.”52)고 함에 비추어 볼 때도 동해묘 정전은 서향을 하고 있었고, 뒤에는 바다가, 남북에는 지금과 같이 구릉지를 따라 송림이 있었을 것으 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아래의 1908년 일제에 의해 동해신묘가 철회된 지 9년만인 대정 6년(1917년) 일제에 의해 측량된 지적도면을 보면, 조산리 399번지만 신사부지로 되어있고 현재 복원한 정전이 일부 점 유하고 있는 조산리 434-55번지는 당시 임야였으므로 현재의 복원 위치는 맞지 않다고 봄이 가할 것 이며, 도면의 형태로 볼 때도 맞지 않다고 할 것이다. 
또한, 동해신묘는 정전 6칸, 신문 3칸, 전사청 2칸, 동·서재 각 2칸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일제가 측량한 조산리 399번지는 671㎡로 이를 모두 짓기에는 협소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강릉대 학교의 발굴조사 시 399번지 경작지 일부에서도 석열 유구가 발굴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복구도 면을 보면 신사부지 주변 토지가 국가소유였고 주변에 송림이 울창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일제가 동 해신묘 철회 후 기사중수비가 있던 지역을 중심으로 면적을 줄여 측량했을 수도 있으므로 휴경기인 겨울을 이용하여 임야 사이인 조산리 398번지, 399번지, 400번지 일대를 추가로 발굴 조사한 후 신 묘 터의 위치를 확인하고 주변 토지를 매입한 후 국가사적으로 지정받아 복원함으로서 더 이상 역사 가 왜곡되지 않도록 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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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맺는말 

우리나라의 해신(海神)에 대한 제례문화는 통일신라 당시 이미 시작되었으며, 이후에도 고려, 조선 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제례의 기준과 절차를 엄격하게 만들고, 매년 정례적으로 제례를 올려 국태민 안과 풍농, 풍어를 기원 해 왔다. 
그런데, 신라의 도읍은 경주였던 관계로 당시 동해는 영일군 흥해면에, 서해는 옥구군 임피면에, 남 해는 부산(동래)에, 북해는 삼척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 후 고려가 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개성의 정동 인 양양에 동해묘를, 정서인 풍천에 서해단을, 정남인 나주에 남해신사를, 바다가 없던 북쪽에는 해신 대신 강의 신을 모셨으니 북동편은 함경북도 경원에 두만강신사(豆滿江神祠)를, 북서편에는 평안북도 의주에 압록강사(鴨綠江祠)를 모셨었다. 
여기 양양의 동해신묘는 국태민안과 풍농, 풍어 등을 기원하던 4해의 으뜸인 동해지신이 주석하는 곳으로 왕이 내린 향과 축으로 매년 새해 별제와 2월과 8월 상제를 행하던 곳이다. 
동해신묘는 고려 현종 19년(1028년) 이전에 이미 양양에 설치된 후, 조선조에도 태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현종, 영조, 정조, 철종, 순종 당시 역사기록들이 동해신묘는 양양 땅에 있었 음을 확인하고 있으며, 세조 당시 한양을 중심으로 한 이전이 논의된 적은 있으나 중사인 동해신묘뿐 만 아니라 서해신단, 남해신사 또한 이전했다는 기록이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어 동해신묘 가 강릉으로 이전되었다는 주장은 잘못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정책에 따라 1908년 동해신묘가 강제 철거 훼손된 후 80여년이 지난 1993년 정전 1동을 복원하였으나, 복원위치, 방위 등이 역사기록과 상이하고, 1998년 강릉대학교 박 물관의 발굴조사에서도 복원위치와 방위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고 있어 향후 광범위한 발굴조사를 통 한 복원이 필요함도 확인하였다. 
오늘 동해신묘의 역사를 재정리하면서『삼국사기』·『고려사』·『조선왕조실록』·『동국여지승람』, 그 밖의 수많은 역사기록들이 남아있음에도 이들 정사(正史)들을 종합적으로 정리 분석하여 역사를 정립하지 않고, 일개 문학집이나 일정구역의 발굴 단면만을 가지고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누(累) 는 인터넷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가는 정보화 시대에는 돌이킬 수 없는 왜곡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잘못된 역사일지라도 이를 통해 과 거를 되돌아봄으로서, 더 밝은 미래로 나갈 수 있는 것이므로 역사를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동해신묘의 역사적 고찰을 통해 지금까지 잘못 알려졌던 동해신묘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고,정사를 바탕으로 역사를 바로 잡아 공공기관부터 관련된 기록들을 수정 보완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 다고 할 것이며, 또한 지금 복원중인 동해신묘의 위치와 방향문제도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역사기록과 광범위한 발굴조사를 통해 복원해야만 할 것이다.
아울러 민족정신 말살정책으로 일제(日帝)에 의해 강제로 철거 훼손된, 고려시대 이래 국가의 안녕과 풍농, 풍어, 기우 등을 기원하던 중사인 동해신묘지를 국가사적으로 지정하고 체계적으로 복원해 국민 정신문화의 기반으로 삼아나가야만 할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증보문헌비고』
『여지도서』
『대동지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서애선생문집』
『기언』
『관동읍지』
『양양읍지』
『백호전서』
『연재선생문집』
『양양읍지』
『증보문헌비고』
디지털강릉문화대전
장정룡, 『강원도민속연구(江原道民俗硏究)』, 국학자료원, 2002
장성욱, 『고려시대 도자제기 연구』석사학위논문, 2007
주강현, 『觀海記3 동쪽바다』웅진지식하우스, 2006
강릉대학교, 『양양 동해신묘』,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