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문화24호

전악(典樂)허억봉과 漢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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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635회 작성일 13-04-04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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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악(典樂)허억봉과 漢詩이야기

양양문화원장 양동창

양양의 관노 허억봉은 조선 중기 장악원 전악이 된 천재 음악인이다. 
8대조는 세종대왕 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문경공 허조(許稠)로서 단종 복위와 관련되어 아들 허후 는 수양대군의 권력찬탈에 반대하다 교형을 당하였고 허후의 아들 허조가 교형을 당한 아버 지의 빈소에서 사육신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기도하다 발각되어 자결했다. 이 사건과 연좌하여 세조는 하양 허씨 문정공파 가문을 일제히 사형하거나 노비로 만들어 버렸다. 
허억봉의 조상은 이때 먼 지방 잔읍의 노비로 영원히 소속시키라는 세조의 명에 따라 관노가 된 것이 다. 
험난한 곡절 끝에 관노로 전락하여 양양에까지 와서 전전 하였다. 100여년이 지나 후손 중 한명인 허 억봉이 양양의 관노로 있던 10대(중종 10년 1535년경 출생한 것으로 추정) 중반에 대금 연주에 능함을 인정받아 악공으로 한양으로 불려가 장악원(掌樂院)의 최고 지휘자인 전악(典樂)을 십 수년간 역임하였으 며, 그의 수많은 음악활동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허억봉은 족보상에 허락(許珞)으로 표기돼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許億福혹은 許億逢으로 표기하고 당시 사대부의 문집 여러 곳에는 許億鳳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기록에 의하면 양양의 관노는 동구리(同仇里)와 원손(元孫)이 양양군지에 수록되어 있는데 동구리는 양양의 관노로 조선왕조실록 중 세조실록에 세조12 년(1466년) 세조 대왕이 강원도를 순행하면서 윤 3월14일 양양 낙산사를 둘러보고 월정사로 향하던 중 연곡에서 장막을 치고 농가(農歌)를 잘하는 자를 불러 모아 노래를 하게 하였는데 그중에서 동구리가 가장 잘하여 유의 한 벌 을 하사하고 악공의 예로 수가(隨駕)하게 하였다는 기록에 의거하여 양양문화원에서는 동구리를 기리기 위하여 2001년부터 동구리 경창대회를 2010년 까지 개최하였으며, 2011년 부터는 강원도 대회로 격상하여 제2회 강원도 동구리 전통민요 경창대회를 개최하므로 전통 민요 를 발굴 전승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고 있다. 
원손은 중종 28년(1533년) 양양의 관노로 승려와 함께 불탱(佛탱)을 만들어 부상대고(富商大賈: 자본이 없는 상인)와 여염(閭閻: 백성들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집을 드나들며 민중을 속이면서 동궁(東宮)에 서 나온 것이라 사칭하다 의금부에 잡혀가 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관노 허억봉은 악사로서 정사룡(鄭士龍:1491-1570:명종5년 예조판서)의 집에 자주 초청되어 연주를 했 다. 요즘 예능인들이 아르바이트로 연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연주자들도 연회에 초청되어 연주를 해 주고 약간의 식량을 얻거나, 사례비를 받아 생활에 보태곤 했다. 정사룡은 허억봉의 대금 소리가 워낙 훌 륭하여“허억봉의 대금연주”라는 시까지 지었다. 
그는 시에서“재주가 여러 사람들에게 이르렀지만 자네 오직 독보적이라”고 극찬했다 한다. 시를 소개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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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룡은 음악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명종 6년 그는 임금에게“음악은 신명(神明)을 감격시키는 것이니 반 드시 음악이 조화된 뒤에야 신이 복을 내리는 법입니다”라며 악기의 수리와 보수를 건의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정사룡은 그의 시문집에서 국공들을 자주 불러 연주를 하도록 하고 스스로 기뻐하는 모 습이 기록되어 있다. 명종 5년(1550년) 3월 하순 당시 예조판서였던 정사룡의 집 정원에서 연주회가 있었 다. 
허억봉은 대금을 불고, 이좌(李佐)는 요고(腰鼓)를 두드리고, 정의견(鄭義堅)은 가야금을 탔다. 
허억봉은 대금 연주에도 뛰어났지만, 악보 만드는 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안상은 명종 16년 (1561년)에 장악원 첨정(僉正)의 자리에 있었다. 그는 악사 홍선종, 악공 허억봉, 이무금 을 불러 장악원에서 악인들이 악기를 연습할 수 있도록 악보를 새로 만들도록 했다. 이 악보가 현재 보물 제 283호로 지정되어 있는「금합자보(琴合字譜)」이다. 
허억봉은 금합자보 중 대금 악보인 적보(笛譜)를 만들었다. 《금합자보》서문에 안상은 허억봉에 대해“대금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사람”이라고 평했다. 손곡 이달(蓀谷李達)의 스승인 정사룡은 허억봉의 대금 연주에 대해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내린바 있었다. 허억봉은 나이가 들어서 당대의 시인 손곡 이달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이달이 악공이라 하지 않고 악사라 고 부른 것은 허억봉이 장악원에서 승진하여 악사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뒤 허억봉은 장악원 악인 중에서 최고의 직책인 전악에 이른 것으로 나타난다. 
허균의 스승 손곡 이달은 장악원에서 대금을 잘 부는 허억봉을 보고“악사 허억봉에게 주는 시”를 칠언절 구로 다음과 같이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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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은“나는 소시적에 태평한 문물을 볼 수 있었다, 
악공에 허억봉이란 사람이 있어서 대금을 잘 불었는데, 만년에는 현금(玄琴)으로 옮겨서 또한 잘했다“며 허억봉을 소개한 바 있고, 
조선 중기의 문신 서성이 평해군에서 옛 악사 허롱을 만나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지은 시에서 전 악 허억봉에 대한 기록이 발견 된다. 
허롱은 허억봉이 자신의 형이라고 소개하고 10년 동안 전악을 한 대단히 뛰어난 음악인이었다고 자랑 한 다. 이에 의하면 허억봉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던 듯하다. 
이름은 허롱(許弄), 그 또한 악사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허임(허억봉의 아들로 침술에 뛰어나 침 구경험방 등 침술에 관한 책도 저술한 조선후기 침술의 대가였다고 한다)과 그의 부모는 황해도 쪽으로 피난 을 갔는데 허롱은 강원도 쪽을 거쳐 경상도 평해로 간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3년이 지난 선조 28년 (1595년) 상우도 관찰사 서성이 평해군으로 시찰을 나가 허 롱을 만났다. 서성은 거기서 허롱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지은 시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 시에서 허억봉의 모습이 비교적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너는 어디에 살았느냐”관찰사의 질문에 허롱 은 옛날 생각이 나서 눈물을 흘렸다. 허롱은 스스로 예전에 악사였다고 말하며 지난날을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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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악 허억봉에 대하여조금더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당시 뛰어난 인기 연예인이었던 허억봉은 30대 초반까지도 장가를 가지 못했다. 악공은 천직(賤職)이었고 생활이 너무나도 가난 했다. 양인집안 여식과 혼인을 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그럭저럭 허억봉은 30대 중반 에 이를 때까지 노총각으로 지내고 있었다. 1560년 말경 허억봉은 악공에서 승진하여 악사로서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허억봉은 궁중연회 뿐만 아니라 양반 사대부가의 각종 연회에 불려가 대금연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허억봉이 예조판서 김귀영(金貴榮)가에 불려가 악공으로 지낼 때 사비(私婢)와 남녀의 연을 맺고, 조선 제 일의 침뜸 명의가 된 허임을 임신한 것도 이때 즈음이다. 김귀영은 1568년 5월에 예조판서가 되었다. 예조판서는 예악(禮樂), 제사, 연향(宴享), 외교, 학교, 과거 등을 총괄 관장한 예조의 으뜸 벼슬이다. 가비(歌婢), 금비(琴婢), 무비(舞婢)라고 불린 이들은 사대부의 풍 류를 도왔다. 사대부들은 회갑 등의 잔치 때는 물론 평상시에도 악공들을 집으로 불러 풍류를 즐겼다. 이때 초청 음악인들에 더하여 집안의 사비들을 참여 시켰다. 이때 다만 가난하지만 대금으로 심금을 울리는 허억 봉을 끔찍이도 사모한 여비가 정성들여 마련한 둘만의 조촐한 잔칫상을 상상해 볼수는 있다. 그리고 두 사람 을 살림을 꾸렸을 것이다. 끝으로 이와 같이 조선 중기 험난한 삶을 살다간 양양의 관노 허억봉에 대한 전악으로서의 천재적인 음악 활동과 그에 얽힌 한시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앞으로 자료가 확보되는 대로 다른 분야에서 소개하기로 하고 여기에서 끝맺고자 합니다. 한시 번역을 위하여 양양문화원 문화학교 한시교실 이종우 선생님께서 수고하여 주셨습니다.

참고문헌
“조선 침뜸이 으뜸이라“ 손종양 지음 (사단법인) 허임 기념사업회
“한국음악의 거장들” 송지원 저, 태학사
“장악원 우주의 선율을 담다.”
“처음으로 읽는 조선 궁중 음악 이야기” 송지원 저 추수밭 2010. 5.25
“악인열전” 허경진(교수) 저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