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철광산의 문화사-2

鑛夫들의 이야기-공작실 및 선광수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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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153회 작성일 2013-04-25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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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상평리 강춘명72세)
사례 1
공작실의 하루일과
67 ~ 88년까지 재직했고 처음부터 공작실에서 임시부로 일했다. 광산 내에서 필요한 모든 기계 제작. (광차, 권양기) 수리부에서 수 리하지 못하는 기계를 연말에 수리를 하였다.
당시 임금은6000원(지금 100만 원 이상) 정도 받았다. 기술력과 성실성을 보고 고입 여부를 결정하였다.
공작실은 교대 근무가 없고, 업무가 많을 경우에는 연장근무를 했 다. (오후 5시 이후 12/1시 정도)농가에서 필요한 기구는 공작실에 서 쓰고 남은 자재를 이용해서 만들어 반출하기도 하였다. (연탄집 게,불삽,곰배,불집게,절구 등)자제는 많이 부족했으나,필요한 자재가 나오 는경우 감추어 두고 차후에 사용해서 만들었다.
공작실에서 선광장 지원(기계 고장 수리)등을 해주었으며, 그 당 시에 많은 부탁을 받았다.
자재 조각을 모아두었다가 노무자들의 가정에 필요한 기구 등을 만들어 주었는데 입소문이 난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달라고 하는 경 우가 많았다.


사례 2
영국기술자에게 욕을 했더니
항내 150마력짜리 권양기는 메다를 빼 낸 후에 재조립하였다.(혼 자빼지는 못함) 그 안을 바베트라는 것을 부어서 선반에서 따로 빼 낸 후 맞지 않지만 샤우트라를 이용해서 맞춤.컨베어 벨트,로우러, 200마력짜리 메다를 수리하려면 힘들었다.
쪼크라샤,콩그라샤,볼밀기계는 독일제로써 매우 비싸다. 라이너 같은 건 교환하지 않았다. 양양 광업소 자체에서 하지 못하는 것은 외국인 전문가가 와서 고치는 경우도 있었다.
제2선광장 위에2수항 권양기 설치할 때와 200마력짜리 콤프레 샤를 설치할 때 영국 도는 독일 사람들이 와서 설치해 주었다.
수항으로 기억되는데 얼굴 모양이 좁고 길죽하게 생긴 영국 기술 자가 와서 기계를 설치하는데 얼굴이 xxx못 생겼다고 우리말로 했 는데 나중에 그 기술자가 어께를 툭 툭 치면서 “그러문 쓰나 ?” 우리 말을 못 알아듣는 줄 알았는데 .... 무안해서 혼이 났는데 나중에 그 영국 기술 자 와 친하게 지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외국 기술자들이 와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항내 에서 주로 탐사하는 조사과에도 간혹 외국인(독일)이 일 하였다.기 술자라고 특혜는 없었으나 곤조(못된버릇)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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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9-11> 당시 공작실 선반 모습 1956년경



(구술자 장승리 이규삼62세)
사례 1
한평생 광산에 몸담고 지금도 다니고 있다
양양광산은 1971년 5월24일에 입사하였고 1994년 5월30일 폐광 한 후 이갑수 소장님과 임철혁 과장과 함께 마지막까지 정리하고 퇴 사하였습니다. 그 후 일양레미콘을 거쳐 2011년 대한광물이 다시 재 개발되면서 입사하여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으니 거의 한 평생을 양 양광업소에 몸담고 있는 셈입니다.


사례 2 학업보다 먹고 사는 것이 급해 고등학교를 중퇴 했지요
그러니까 고등학교 다니다 가정형편이 워낙 어려워 월사금을 낼 수 없었습니다.그래서 학업보다 우선 먹고 사는 것이 급했지요.그 러나 미성년이라고 광업소에는 정식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천양회사 에 임시부로 들어갔지요. 그 후 나이가 먹으면서 선광장 오와삔에서 2년,조사과에서1년, 선광 수리실에서 용접공으로 있다가 1991년부 터 선광수리실 관리책임자인 감독으로 근무했습니다.


사례 3
주로 막걸리 힘으로 일을 했다.
1973년부터 조사과에서 일했는데 조사과는 주로 철 광맥을 찾는 일입니다. 그런데 산에는 전기가 없으니 자동차 엔진을 끌고 산에 올라가서 시동을 걸고 시추기를 돌려야 하자나요. 그런데 나는 기술 이 없으니 엔진을 끌어 올리는 잡부인 셈이죠. 그땐 주로 막걸리 힘 으로 올리는데 막걸리를 챙기는 직원이 별도로 있을 정도였으니까 요.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지 지금도 어깨에 뼈가 튀어나온 자국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어린나이에 너무 힘들어서 기술을 배우 기 위해서 선광수리실로 옮겼습니다.


사례 4
입사 후 3년 만에 국가 공인 용접기술 자격증을 취득
선광수리실에서 용접공 조수를 하다가 1974년에 춘천기술고등학 교에서 국가 공인 용접기술자 자격증을 땃습니다. 그 당시에 선광기 계는 내 손이 닿아야 돌아갔으니까요. 크라사와 조크레샤를 수리했 는데 현장에 가서 하기도 하고 수리실로 가지고와서 수리를 했는데 조크레샤 수리를 하다가 끼어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고, 잘못 하면 컨베이어에 감겨 죽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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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12> 당시 사진을 설명하는 이규삼 2011. 9
당시 돈을 많이 번 사람은 일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 렇지 못한 사람들은 2대에 걸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광부의 아내가 남편이 광산에 일하러 간 사이에 나무 땔감을 구해서, 집에 서 불을 때기도 하고 이웃집에 팔면서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인고의 세월이 한 순간 지나간 듯합니다. 이 모두 지난날의 역경과 고난의 연속이었으며 그 덕택에 지금도 대 한광물 재개발회사에서 용접 일을 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