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철광산의 문화사-2

鑛夫들의 이야기-분석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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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197회 작성일 2013-04-2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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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서문리 황백주76세)
사례 1
분석실의 하루일과
분석실은 광석이 몇 %가 포함되었는지를 시험하는 부서인데, 분 석실이 있고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고 그래요 . 현장에서 일하 는 사람들은 분석재료를 만들어 가지고 분석실에 갖다 주면 분석실 에서 약품을 넣어가지고 몇% 철광석이 나온다 . 또 광석에 유황이 몇% 들었는지를 확인한다.
유황이 많이 들어간 광석은 잘 안 알아주었다. 선광과에 분석실에 서 10~15년 있었는데 나중에 광업소가 작아지니까, 통폐합 시키고, 인원 감축을 시켰다. 과는 관리과지만 근무는 선광부에 가서 일했 다.
광석이 나오게 되면 조금 쪼개 가지고 그걸 가루로 만들어요. 밀 가루처럼 가늘게 싹 빻아 가지고 그걸 분석실에서 시약을 넣어가지 고 광석이 지금 몇%인지를 환산한다.분석은3교대하다가 2교대 하 다가1교대로 변경되었다.
광석은 분광도 나오고 굵은 광석도 나오고, 버리는 것도 나오는데 그것도 다 했다.
채광에서 광차로 나오 면, 한 광차마다 뜨는 것이 아니라 한 다리 또는 두 다리 건너 채취를 해서 분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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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10> 당시 분석실 1958년경
샘플은 광차가 굴에서 나올 때 마다 채취해서 하였다. 각 항마다 광차가 나올 때 마다 매번 채취하였다. 한 광차 당 무조건 한번 씩 캐고 양도 한 광차에 몇kg 기준이 있는데, 각자의 감각으로 도구에 다가 홉빠 같은 걸로 긁어서 채취했다.
사람 많을 때는4명이 있었다.1개조가 광차가 나오 는동안만 채 취하는 시료공이라고 하는데,광차가 들어오는 만큼 채취를 하는데, 결과적으로 광차가 들락거리면 무조건 하게 되어 있다.
광차가 선광장으로 들어오는 횟수는 대략 200대 내지 300대 정도 되었고,광차는 몇 대라고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작업에 따라 많 을 때도 있고 적을 때도 있고 채광해서 광이 없으면 며칠 동안 안 나오고 그럴 때도 있다.
도목항이나 양양항 같이 사람 많은 항은 많이 나오 고, 사람이 적 은 항은 또 몇 대 안 나오고 광차의 소속은 따로 있다. 사람의 수에 따라 달랐고,디젤카 운전수는 각 항별로 따로 있었다.
분석실은 원래 관리과 분석계인데 계장과 주임이 있었으며, 현장 에 나가서 시료공이라고 24명(8명 ×3교대)이 있었다.
분석계가 해체 되고 난 후에 오야삥 둘 선광 하나 자선단에 하나 넷인가 있었다.
선광과 에서는 한 기계를 오래 못보게 한다. 한 6개월인가에서 한번 씩 작업장을 바꿔주는데 볼밀도 봤다가 자이라 기계도 봤다가 쪼크레샤라 든가 그런 것도 봤고,그사람 능력을 봐가지고.그 자이 라 라는 기계는 서독제 그 기계는 좀 특이하고 꼼꼼한 사람이 해야 지 막말로 희미한 사람은 거기에 가지도 못하는데, 자이라는 큰 돌 을 잘게 부스는 거고,볼밀은 부슨 돌은 더 잘게 부스는 기계다.
선광장에서는 다리도 다치고 기계에 팔이 딸려 들어가 팔을 다치 기도 하고 사람이 죽는 사망사고가 한 6~7명 되는 것 같았다.
광산에서 눈 맞아서 결혼한 사람이 한 5명? 양양사람들도 많았고 객지 사람들도 많았는데,결혼하고 나서 거의 다 객지로 나갔다.
물로 하는 습식 자선이라고 쇠를 물로 씻겨 내서 가루를 만들어내 는데. 그 겨울이면 추워서 얼잖아요 막 교대 들어갔는데 엄청 추웠 지요.사항골 이라는 데에서 내려치는 바람이 얼마나 쎈지,그기계 가 얼게 되면 기계가 안돌아가잖아요 거기다가 불로 화덕을 만들어 서 녹여가지고 기계를 돌리고 그랬는데,그게 힘들었던 거 같다.봄, 가을은 일하기 참 좋았는데,특히 겨울엔 힘들었다.
물이 딱딱하게 얼게 되니 물을 녹이는 것이 아니라 기계를 녹이 는 거다.
처음 임시부 때에는 버스가 한 대 밖에 없어서 고입인 사람도 승 차권으로 출퇴근 버스를 탔으나 임시부들은 걸어 다녔다.
한겨울에 눈이 허리만큼 왔을 때 한 2번 정도 출근을 해서 갔다가 온 것 같다.
밤 12시에 출근하는 날에 버스가11시30분에 오는데, 시간에 늦 어서 광산까지 3~40분 정도 걸어간 적도 3~4번 정도 있었다.